3줄 이상은 안 읽습니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종종 이런 댓글을 마주하곤 한다. '3줄 이상은 길어서 안 읽습니다. 누가 요약 좀.' 물론 그 밑에는 '정규 교육도 못 받았냐' 따위의 답글이 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짧은 밈(meme)이 시사하는 바가 인터넷 속 한심한 족속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첫 영화 리뷰를 올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인에게 브런치를 보여줬을 때 가장 먼저 들은 말도 '요새 누가 그렇게 긴 글을 읽냐'였으니 말이다. 이를 증명하듯 대한민국 1인 독서량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어 2018년에는 최저치를 찍었다. 일명 '음슴체'로 쓰인 인터넷 속 글도 길다고 불평하는 '요새' 사람들에게 책을 한 권 읽는 일은 달나라 토끼가 떡을 찧는 일만큼이나 허황하다.
출판 생태계란 쉽게 말해, 출판과 관련된 모든 요소들, 즉 저자, 출판사, 독자 그리고 이들을 연결시키는 서점과 도서관 그리고 관련 제도 등의 유기적 관계 또는 울타리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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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촘한 먹이 사슬로 구성된 생태계에서는 단 하나의 종이라도 개체 수가 줄거나 늘면 생태계 전체가 붕괴한다. 출판 산업도 마찬가지다. 출판 생태계를 구성하는 개체 중 하나라도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출판 산업 전체가 휘청거린다. 거대한 산업화의 물결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현혹하는 더 자극적이고 더 흥미로운 것들을 쏟아냈고 마침내 게임과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외래종은 위협적인 속도로 '독자'들을 잡아먹으며 출판 생태계를 완전히 무너뜨릴 준비를 마쳤다.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은 종은 서점이다. 각종 문구류 및 카페를 갖춘 대형서점은 수 천 수 만권의 책을 구비해놓고 영세 서점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가격에 도서를 판매한다. 그뿐인가.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만 가능하면 집으로 도서를 배송시킬 수도 있고 거의 새것 같은 중고 책을 반값에 구매할 수도 있다. 가뜩이나 '3줄 이상 읽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대 사회에서 조그만 서점이 할 수 있는 선택은 폐점뿐이다. 25년간 성균관대학교 앞에서 학생들에게 사유의 즐거움을 깨우쳤던 책방 풀무질도 결국 올해를 기점으로 폐점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풀무질을 인수하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지만 요즘 서점 사정을 생각하면 이마저도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영세 서점의 몰락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도,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이미 20년이 넘은 영화, <유브 갓 메일>에서 여자 주인공 캐슬린은 근처에 생긴 대형 서점 때문에 어머니 대부터 43년간 운영해온 어린이 서적 전문 서점을 처분한다. 아마존의 본거지인 시애틀에서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독립 서점들의 이야기를 그린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서점> 속 주인들은 입을 모아 '책만 팔아서는 가게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관점을 바꿔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그 나름의 생존전략을 추구하는 대형서점을 무작정 비난하고 영세 서점을 보호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답은 'Yes'다. 그리고 이러한 영세 서점을 살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단연코 '도서정가제'다. 도서정가제는 대형서점을 견제하고 영세 서점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로 대형서점이 자신의 자본력을 이용하여 과도한 할인 판매를 할 수 없도록 도서의 가격을 동결하는 제도이다. 2014년 도서정가제 강화 시행이 결정된 이후 도서정가제의 시행 목적을 모르는 일반 대중들은 무작정 가격이 올랐다며 분통을 터뜨렸고 부끄럽게도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도서정가제는 단순히 소상공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도, 소비자들을 우롱하기 위한 제도도 아니다.
영화를 예로 들면 이해하기 편할 것 같다. 이미 영화관은 대형 멀티플렉스의 독과점이 상당히 진행되어 대부분의 독립극장은 문을 닫은 지 오래다(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들의 행보를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멀티플렉스의 쾌적함과 각종 할인 혜택들은 단기적으로는 소비자의 권익을 증진했다. 아니, 적어도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더는 경쟁을 할 필요가 없어진 멀티플렉스 영화관들은 적자를 핑계로 매년 10%씩 티켓 가격을 인상했고 각종 프리미엄 관들을 만들어서 더 높은 가격에 티켓을 팔았다. 심지어는 자사에서 배급하는 영화로 스크린을 독점하고 그렇지 않은 영화들은 이른 아침이나 새벽 시간대에만 상영해 영화의 다양성이 크게 저해되었다. 보고 싶은 영화의 선택지가 줄어들고 매년 상당한 수준으로 가격이 올라도 이제 관객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영화관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 멀티플렉스를 제외하고는 갈 수 있는 영화관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출판업계에도 비슷한 바람이 불고 있다. 대형 서점의 베스트셀러 가판대는 판매를 보증하는 수표가 되어 대형 서점의 추천서 목록에 오른 도서는 판매율이 급격히 높아지지만, 대형 서점을 통하지 않거나 대형 서점의 주요 매대에 비치되지 않은 도서들은 질과는 상관없이 사장된다. 이러한 문제는 가시화된 지 오래여서 각종 포털 사이트 베스트셀러 순위는 같은 작가의 책들로 도배되어 있거나 '여러분은 힘들 거예요. 왜냐하면 여러분은 힘드니까요.' 따위의 소리를 하는, 알맹이는 없고 표지만 예쁘장한 에세이 책들로 넘쳐난다. 출판사 또한 판매량을 올리기 위해 대형 서점의 매대를 사거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리기 위해 자사 책을 사재기한다. 특정 대형 유통사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진 나머지, 출판의 다양성이 저해되고 저자나 출판사의 능력보다는 대형 서점의 매대를 선점하는 일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책을 내면서 출판은 지속성과 세월의 누적이 빛을 발하는 분야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한결같은 주제로 수명이 긴 책을 한 권 한 권 펴내며 세월을 쌓다 보면 슬그머니 매출 하한선이 높아지고 전문성도 커지며, 뚜렷한 색깔을 띤 출판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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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영세 서점들이 폐점이라는 운명을 앞둔 사형수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출판계가 불황이라는 말을 장장 20년간 들으면서도, 책방은 돈이 안 된다는 얘기를 무수히 많이 들으면서도 독립 출판과 독립 서점들은 전에 없이 성황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전문 서적만을 취급하는 서점이나 출판사가 많이 늘었다는 점이다. 자연과학 도서 출판사인 자연과 생태 또한 전체 출판업의 1%도 안 되는 생태 도감으로 그 명성을 얻었다. 자연과 생태 조영권 대표의 말처럼, 이대 앞에는 추리소설 전문 서점 미스터리유니온이, 혜화에는 시집 전문 서점 위트앤시니컬이 꿋꿋하게 자리를 버티고 있고 축구 전문 출판사, 공부법 전문 출판사 등이 마니아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출판산업도 하나의 생태계임을 인지한 민음사와 문학동네는 대형 서점에는 입고되지 않는 '동네서점 한정판' 도서들을 출간하며 책방과의 공생을 꾀하고, 서울 도서관은 동네 서점에 유명 작가를 초대하는 '우리 동네에 작가가 찾아왔다' 프로젝트를 진행해 동네 서점의 홍보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먼 것은 사실이지만 출판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출판산업을 하나의 '생태계'로 인지했다는 것만으로도 영세 서점에는 큰 힘이 된다.
현대 사회의 변화는 잔잔한 물결이 아닌 범선도 뒤집을 수 있는 격랑이다. 그리고 이 격랑에서 출판산업만 제외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앞으로 형태와 매체는 계속해서 변화하더라도 독서라는 본질만큼은 이 격랑에서 살아남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책의, 책을 위한, 책에 의한 사람들의 열정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번 글은 특별히 목차도, 소제목도, 사진도 넣지 않았다. 긴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출판문화 발전을 위해 소소하지만 출판 저널 통권 310호만큼은 대형 서점이 아닌 경희 문고에 들러 구매해야겠다.
위 리뷰는 아트인사이트를 통해 출판저널 309호를 제공받아 대가를 받지 않고 작성되었습니다.
원문출처: http://artinsight.co.kr/news/view.php?no=406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