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옆에 있는 사람」
초가을의 문턱, 어느 나무 아래에서 일어난 일이다.
교복을 입은 한 소녀가 호젓한 길을 걷는다. 어깨엔 가방이, 그리고 한손엔 노트 같은 것이 머물러 있다. 그녀가 걷는 방향 앞쪽으로 굵은 나무 한 그루가 있다. 그런데 그 커다란 나무 뒤에 언뜻 뭔가가 보인다. 소녀가 움직일 때마다 그 물체는 조금씩 조금씩 소녀가 안 보이게끔 각도를 틀어 이동을 한다. 기다렸다 가만히 보니 물체의 정체는 한 소년이다. 소년은 자신의 몸을 최대한 숨기려 애쓰면서도 쿵쾅쿵쾅 뛰어대는 심장의 진동은 감추지 못하고 있다. 소녀가 지나가는 길목에 서서 몰래 기다리고 있다가 소녀가 자기 앞을 지나가고 나면 곧이어 소년이 뒤를 따를 거라는 귀여운 시나리오가 커다란 나무 아래 진행되고 있었다.
둘은 어떤 사이일까. 소년이 소녀를 좋아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인가. 어쩌면 소녀가 헤어지자고 말한 지 한 달째 되는 날일지도. 아니 어쩌면 모든 상상을 불허하는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 길이나 가자며 고개를 돌리려 했을 때였다.
마치 섬광 같은 반전이 있었다. 소녀가 나무를 충분히 지나친 후였다. 정확히는 소녀가 나무에 가려진 소년을 살짝 어깨 한쪽으로 넘기면서 지나치는 그 상태였다. 소녀가, 큭큭 웃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고개는 돌리지 않은 채, 최대한 어깨의 들썩임을 자제한 채. 소녀는 나무 뒤에 소년이 숨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근데 어떻게 알았을까.
주변에 꽃들이 피어 있었다면 같이 따라 웃었을 텐데 나만 웃고 있었다. 뭔가 대단한 것을 목격한 듯 싱글벙글하면서 별로 좋을 것도 안 좋을 것도 없었던 기분이 급작스레 수만 개의 풍선을 달고 떠올랐다. 좋아한다고 말은 했을까. 아니, 아직 못했을 거야. 소녀는 그냥 소년의 행동만 기다리고 있을 뿐.
소년의 마음이야 눈을 가리고도 알겠고 소녀도 소년이 싫지 않은 기색이야.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묘한 타이밍에 저리 아름답게 웃을 수는 없어.
하늘은 높아지고 있었다. 하늘이 높아지는 것은 여름이 그치고 어쩌지 못한 감정들이 침착하게 한곳에 모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한곳이라는 데는 바로 사람의 마음일 테고.
그날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어쩌면 내 속에서 꺼내놓은 두근거림일 수도, 어쩌면 나무가 차려놓은 아름다움일 수도 있다. 그 무엇보다도 나는 그 풍경한테 몸을 흠씬 두들겨맞은 사람처럼, 온몸이 뻐근했다.
같은 상황이라 해도 봄에 보는 것과 가을에 보는 것은 다르다. 봄에 봐서 아련하다라고 반응하는 것을, 가을에 볼 때는 보고 싶다라고 중얼거리게도 한다. 봄에 피어난 꽃들에게서 뭔가를 수혈받는다면 가을에 떨어지는 것들 앞에서는 마음이 호릿해져서 뭔가 빠져나가는 기분마저 드는 것이다. 봄에 가슴 뭉글뭉글해지는 것이 가을에는 뭉클뭉클해지지 않는가 말이다.
나는 가을 초입의 나무 한 그루가 연출한 것인지도 모를 한 소녀와 소년의 감정을 오래 기억하고만 싶다. 이 사랑의 그림 한 장을 가슴팍에 품은 이상 당분간 등짐을 무거이 지고도 뛸 수 있을 것 같다. 나무도 나를 기억했으면 한다. 나무 아래에서의 일들을 몰래 훔쳐보고는 하나하나 세세히 간직하려는 한 사내의 안간힘이 이 가을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