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공무원연금 4월호 칼럼
처음 보는 것인데, 왠지 전에 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것을 기시감(旣視感)이라고도 표현하는데요, 보통 사람들에게는 한자어보다는 프랑스어로 더 친숙합니다. 데자뷔(Déjà vu)라는 말입니다. 프랑스어로 ‘이미 보았다’는 뜻인데요, 처음 본 것을 이미 본 것처럼 느끼거나, 최초의 경험을 이미 경험한 것처럼 느끼는 현상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데자뷔를 거꾸로 한 신조어도 있습니다. 바로 뷔자데(Vu Jàdé)입니다. 데자뷔를 거꾸로 읽어 만든 말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뜻도 거꾸로입니다. 뷔자데는 익숙한 것에서 낯설고 새로운 것을 보는 것을 뜻합니다. 낯선 것에서 익숙함을 보는 데자뷔와는 정반대입니다. 이런 말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뷔자데가 혁신의 속성을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혁신과 창의는 ‘무(無)’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것은 늘 원래 있던 것을 뒤집고 나옵니다. 문자를 주고받는 일은 2G폰이 사용된 이후로 계속 있던 것이었습니다. 카카오톡은 이것을 메신저 앱으로 혁신했습니다. 음식을 주문해 배달시키는 일도 아예 없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배달의민족으로 대표되는 배달앱은 이 익숙한 일을 스마트폰 시대의 방식으로 새롭게 만든 결과입니다. 이렇듯 혁신은 원래 알고 있었으며 늘 익숙하게 사용하던 것들에서, 낯설고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뷔자데의 역량에서 비롯됩니다.
저는 뷔자데의 우리말 표현을 ‘새롭게 정의하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새롭게 정의하기는 내 삶과 내 업(業)의 맥락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개념화하는 일입니다. 쉽게 ‘이름 바꾸기’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과거에 ‘사망보험’이란 보험상품이 처음 나왔을 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죽어야 보험금을 받는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상품 이름에 붙은 ‘사망’이란 말은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망보험은 곧 생명보험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죽어야 보험금을 받는다는 것은 그대로지만, 이름 하나 바꾼 것만으로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사람에게 필수적인 보험상품이 됐습니다.
국민 강연 프로그램 ‘세바시’도 새롭게 정의하기를 통해서 태어났습니다. 방송가에서 강의 프로그램은 가장 기본적인 교양 콘텐츠입니다. 보통 강사를 초대해 스튜디오에서 비공개 녹화합니다. 방송 편성 시간에 맞춰 30분이나 60분 길이로 제작합니다. 강사는 대학의 교수나 작가, 기업의 대표 등 유명한 사람들이 섭외됩니다. 세바시는 강연 프로그램이라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시작했습니다. 스튜디오 녹화가 아니라, 대규모 콘서트 형식의 공개 강연회를 열었습니다. 유명 강연자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들을 무대에 세웠습니다. 강연 시간은 15분으로 줄이고, TV가 아닌 유튜브 채널에서 확산시켰습니다. 그리고 세바시 강연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이야기’라고 새롭게 정의했습니다. 그곳이 세바시 성장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과거 한 상업광고에 등장해 크게 유행한 문장입니다. 나이에 관해 이렇게 절묘한 새로운 정의가 또 있었을까요.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문장은 오히려 더욱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시나브로 ‘환갑잔치’란 말은 사라졌습니다. 은퇴 설계가 아니라 인생 후반전 설계라고 부릅니다. 신중년을 지나 신노년이란 신조어가 유행합니다. 나이가 삶을 영역을 제한하는 장벽이 아니라, 삶을 확장시킬 기회이자 도전의 자양분으로 정의 내린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을 바꿔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만의 새로운 정의를 내리면 할 일이 달라집니다. 나의 삶을 새롭게 정의하면, 다른 삶을 계획할 수 있습니다. 남은 내 삶에 다른 제목을 붙일 때, 거기에 담길 새로운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은 자신의 시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말합니다. 언제부터인가 4월이 되면 누구나 떠올리는 유명한 시구가 됐습니다. 시인은 왜 생명이 움트고 피어나는 봄,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정의 내렸을까요? 이 시구를 두고, 후세의 평론가들은 저마다의 해석과 이유를 내놓았습니다만 사실은 그 이유에는 관심 없습니다. 다만 시인이 4월에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히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질문으로 글을 마칩니다. 여러분은 이 꽃피는 4월을 뭐라고 정의하고 계신가요?
- 구범준 세바시 대표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