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시대가 열린 지 약 20년.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새로운 시대를 눈 앞에 두고 있다. 그 용어에 대해 많은 논란과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필자는 '2차 산업혁명 기술과 3차 산업혁명 기술의 융합'이란 정의를 지지한다. 사실 2차 산업혁명 기술(전기, 자동화)과 3차 산업혁명 기술(컴퓨터, 인터넷)은 현재 잘 '협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스마트폰이라는 3차 산업혁명의 대표 생산품 예를 들어보면, 플라스틱 공장(2차 산업혁명)에서 만든 케이스 안에 인터넷이 연결되는 작은 컴퓨터(3차 산업혁명)가 들어가고, 그 위에 각종 소프트웨어 앱을 올려서 정보통신 서비스(3차 산업혁명)를 사용하는 형태이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기술들은 어떤 형태일까? 또 기술의 '융합'은 '협력'과 어떻게 다르고 어떤 효과가 있을까? A, B 두 기술의 융합이란, A 기술 안에 B 기술이 들어가고, B 기술 안에 A 기술이 포함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융합된 기술을 C라는 새로운 기술이라고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2차 산업혁명 기술과 3차 산업혁명 기술의 융합을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숫자를 붙일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다. 어쨌든 숫자는 둘째 치고, 약 50년의 격차가 있는 두 개의 다른 시대 기술의 융합이 일어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또 자연스러운 기술의 발달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설명을 위해 2차 산업혁명의 결과로 자동화된 '공장'이 탄생했고, 3차 산업혁명의 결과로 공유된 '정보'가 탄생했다고 단순화해보자. 먼저 공장에 정보가 들어가면서 거듭난 공장을 우리는 '스마트 팩토리'라고 부른다. 기존 자동화 공장이 서로 대화하지 않는 독립된 프로세스들의 연결이라고 한다면, 스마트 팩토리는 각 프로세스들이 새로운 정보를 생산하고, 서로 대화하며 정보를 공유하고 작업 스케줄을 서로 조정한다. 소위 '팀워크'가 생기는 것이다. 두 번째 공유된 '정보'에 '공장' 기능이 들어갈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정보만 있다면 어느 곳 어느 때에도 바로 생산이 가능한 3D 프린터가 그것이다. 그러면 기존 공장을 거치지 않아도 공유된 정보만을 통해 집에서 나만의 제품을 만들 수 있다. 로봇을 비롯하여 많은 DIY 제품들이 벌써 그렇게 제작되고 있다.
또 다른 융합의 예로, 제품 생산을 위한 기술 융합을 넘어서 기술 자체의 융합이 있다. 여기서는 2차 산업혁명의 대표적인 제품인 자동차와 비행기 등 이동기술을 '모빌리티'라 하고, 3차 산업혁명의 산물인 지도 정보 및 길 찾기 기술을 '내비게이션'이라고 하자. 이 두 가지 기술이 융합된 기술이 바로 자율주행 기술(Autonomous driving)이다. 이 새로운 기술이 만들어낸 자율주행차와 드론을 이용한 서비스는 상용화를 눈 앞에 두고 있으며, 관련 산업들은 벌써 시장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먼 미래의 것이 아니라 현재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이 융합기술이 새로운 산업혁명이라 명명할 정도로 새로운 것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이러한 논의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시장과 산업구조에 파급효과가 크다는 사실은 자명해 보인다. 또 융합기술의 무서운 점은 기하급수의 다양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각각 10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는 두 기술이 융합한다면 10 x 10 = 100 가지의 새로운 융합 기술이 나올 수 있고, 이를 10명의 사용자가 각각 다른 방법으로 융합한다면 10 x 10 x 10 = 1000 가지의 새로운 제품이 나올 수 있다. 이 중에서 어떤 제품이 시장에서 성공할지, 어떤 방법으로 융합해야 할지를 미리 예측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20세기 3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국가가 주도로 비공개로 특정 기술의 발달을 주도해왔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정보'와 내 손안에 '공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술의 융합에 동참할 수 있게 하였다. 즉, 3차 산업혁명과 4차 산업혁명의 가장 큰 차이점은 새로운 기술의 출현이 아니라, 기술이 진보해가는 방식 그 자체의 변화이다. 한 천재 해커가 차고에서 혼자 자율주행 자동차를 만들어서 스타트업을 창업했다는 등의 소식은 더 이상 놀랄만한 것이 아니다. 가장 최신의 인공지능 방법과 오픈 소스코드가 1주일 안에 전 세계에 공유되는 세상에 이런 현상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단순 계산으로 100명의 연구원이 있는 기관에서 비공개로 10가지 융합방법을 테스트하는 것보다, 모든 지식이 공유된 1000명의 사람들이 한 가지씩 테스트하면 가장 좋은 기술이 10배 더 빠르게 나오는 거야 당연하다.
실제로, 4차 산업혁명의 대표 기술이라고 하는 자율주행과 딥러닝은 공개 챌린지를 통해 개발되었다. 자율주행 기술은 미국 국방성 (DARPA)에서 2004 - 2007년에 주최한 그랜드 챌린지를 통해 그 기초가 다져졌다. 한 예로 여기서 우승을 차지한 스탠퍼드 대학의 세바스찬 스룬 (Sebastian Thrun) 교수는 후에 구글로 가서 2012년 최초 시내 주행을 성공한 구글 자율주행차를 개발을 주도하게 된다. 또한 딥러닝의 폭발적인 발전에는 스탠퍼드 대학의 Fei-Fei Li 교수가 주도한 이미지넷이라는 공개된 데이터셋을 기반으로 하는 컴퓨터 비전 챌린지 (ILSVRC)가 큰 역할을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두 기술의 발전에는 1. 기존에 축적된 기술을 기반으로 2.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3. 서로의 기술을 공유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시 말하면, 이 기술들은 사실 그동안 많은 연구기관에서 꾸준히 연구해온 SLAM이나 뉴럴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바로 이 세 가지 요소가 없었다는 점에서 그동안 아무도 이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다.
현재에도 많은 새로운 기술들이 각종 공개된 소스코드와 데이터셋과 챌린지를 통하여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개발하고 있다. 특히 필자가 몸담고 있는 로봇분야를 예로 들면 재난구조 로봇 기술 개발을 목표로 하는 2012-2015 DARPA 로보틱스 챌린지를 비롯하여, 2050년에 인간 축구 세계 챔피언 팀을 이기는 걸 목표로 하는 로보컵 대회, 물류 포장 및 관리 로봇 개발을 위한 아마존 로보틱스 챌린지, 지상로봇과 비행로봇의 협력 과제를 수행하는 Mohamed Bin Zayed International Robotics Challenge (MBZIRC), 스마트 팩토리에서 사용될 협용 로봇 개발을 위한 유러피언 로보틱스 챌린지 등 셀 수도 없는 챌린지들이 매년 엄청난 상금과 명예를 걸고 전 세계 연구자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학계에서는 챌린지 참가나 논문 출판을 위해 소스코드 공개를 의무화하고 있다. 이는 그 기술을 공개적으로 검증하기 위함과 동시에 후속 연구자들이 그 기술을 재현하고 더 발전시킬 수 있길 기대하는 인류 보편적인 기술의 진보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기술 공개는 4차 산업혁명 시대 기술의 진보를 가속화하는 독특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기술 그 자체는 어떤 특정 기관의 소유물도 아니고 소유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또한, 이런 문화에 동참하는 것만이 그 기술의 진보에 참여할 수 있다.
얼마 전 한국의 4차 산업혁명을 이끈다는 미래창조과학부에서 '인공지능 R&D 챌린지'를 선보였다. 정부가 직접 사회/경제적인 파급효과가 클 것으로 예상되는 문제를 발굴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챌린지 형태를 빌려 연구자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함이다. 올해 첫 챌린지 주제는 '가짜뉴스 판별하기'이다. 챌린지에서 우수한 연구자는 100~300만 원의 상금과 더불어 후속 연구비를 지원한다. 매년 주제는 전문가들의 문제 해결 수요조사를 통해 다르게 선별될 것으로 예상된다. 즉, 이 챌린지의 목표는 정부가 전문가들과 함께 선별한 특정 주제를 가장 잘할 수 있는 한 팀을 뽑고 그 팀이 그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앞서 필자가 제시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기술 진보를 위한 세 가지 조건을 바탕으로 미래부가 준비한 챌린지를 감히 비판해보고 싶다. '축적된 기술'을 가지려면 한 분야를 꾸준히 오랜 시간 연구해야 한다는 건 당연하다. 딥러닝의 발전을 가져온 ILSVRC는 2010년부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휴머노이드 로봇의 대표 챌린지 로보컵은 1997년부터 10년간 성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중복 과제 금지라는 명목으로 매년 연구주제가 바뀌는 우리나라 연구풍토에서, 매년 새로운 주제를 발굴하는 새로운 챌린지가 얼마나 가치있는 기술의 축적을 유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두 번째,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위해서는 그 챌린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보상이 매력적이어야 한다. MBZIRC와 같이 신생 챌린지는 그 매력을 큰 상금(5M USD 상당)으로 뽐내고, 로보컵이나 ILSVRC와 같이 전통이 있는 대회는 상금이 없이도 대회 순위권에 입상하는 것 자체로 연구자는 큰 명예를 얻을 수 있다. 주제는 둘째 치고서라도 미래부가 주최하는 새로운 챌린지에 100~300만 원 정도밖에 안 되는 상금이 얼마나 매력적일까? 또, 몇억 단위의 후속 연구비가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국가 R&D 과제를 수주하기에 쉬운 편인 국내에서 또 다른 국가과제를 따기 위해 과제 제안서 작성보다 비교적 어려운 챌린지에 도전하는 게 연구원들에게 얼마나 동기부여가 될까?
세 번째, '서로의 기술 공유'는 한 팀 안에서의 기술 공유를 뜻하지 않는다. 챌린지에 참가하는 모든 팀들의 기술 공유를 통한 기술의 진보를 의미한다. 이는 매년 같은 주제로 챌린지가 유지가 될 때 가능하다. 미래부의 챌린지는 챌린지를 수행하는 동안 팀들 간 기술이 공유될 가능성도 없고, 선발된 후에는 한 팀에만 후속 연구 과제를 준다. 이는 서로 간에 기술 공유를 하지 말라는 뜻이다. 또한 매년 주제가 동일하지도 않아서 이 챌린지를 통한 기술 공유 효과는 아무래도 기대하기 어려울 듯하다.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하기 위해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나 획기적인 기술의 발명이 필요한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연구개발 환경을 이해하고 여기에 동참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정부는 국내 과학기술자들이 이런 새로운 문화에 적응할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해야할 일이 많을 것이다. 미래부의 새로운 챌린지 과제는 챌린지라는 껍데기만 빌려왔을 뿐 주제 선정 절차 및 운영 방법에 있어서 '국가 주도 비공개 기술 개발'이라는 냉전시대 3차 산업혁명 마인드를 벗어나지 못한것 같아서 많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