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모태팀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 Aug 09. 2022

팀장도 숨을 곳이 필요하다

내 삶의 경계를 스스로 잘 지킬 것

외국으로 여행 가는 이유는 뭘까.


평소 보지 못했던 풍경, 우리나라에선 구할 수 없는 물건들, 이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특유의 공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이방인이 되기 위해서이다. 내가 연예인도 아니고, 당연히 날 보는 시선을 견딜 수 없어서는 아니다. 이방인이 된다는 것은 익명이 되는 것이다. 익명의 사람에겐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의미가 없다.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그저 길가의 가로수처럼 그냥 그곳에 존재만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익명의 공간에선 왠지 모를 자유와 휴식을 얻는다. 일부러 나와 같은 국적의 사람이 없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국적이 같거나 말이 통하는 사실 만으로 느껴지는 압박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한정된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이 느끼기 위해서이다.


익명의 공간은 귀국하면 나만의 공간으로 이름이 바뀐다.


회사가 이사하거나 이직했을 때 제일 먼저 찾는 건 나만의 공간이다. 회사에서 나만의 공간은 사무실의 내 자리도 아니고 나만 들어갈 수 있는 비밀 요새 같은 곳도 아니다. 전 직장에서는 회사 옆 아파트 놀이터였고 그 전 직장에서는 회사 옥상이었다. 상사에게 깨졌을 때, 밀려드는 일에 생각을 멈추고 싶을 때, 누구도 마주치고 싶지 않을 때 찾을 수 있는 익명의 공간이다. 쉽게 갈 수 있는 외국이다. 그곳에선 생각 없이 SNS를 넘기기도 하고 마음이 맞는 누군가를 데려가 수다를 떨기도 한다. 그렇게 짧게라도 다녀오면 한참을 잠수하다 물 밖으로 나온 듯이 쉬어지는 숨이 반갑다. 저 멀리 팀장이 보인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자리에 돌아와 앉는다. 나도 저 팀장처럼 모든 곳을 나만의 공간으로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괜히 모니터를 팀장이 자리에서 잘 안 보이는 방향으로 틀어본다.


그런데 생각보다 팀장은 외로운 자리였다.


팀원 누구에게 가도 어색한 장면이 아니었지만, 누구에게 가더라도 팀원은 어색해했다. 어느 팀원과 식사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함께 식사하는 팀원은 음식을 잘 넘기지 못하는 듯했다. 그래서 내 자리에 앉아 있는데 또 이상했다. 내 자리에 있는데도 나만 할 수 있는 일보다 다른 사람이 맡은 일을 더 많이 이야기해야 했다. 결국 팀원들의 일을 보느라 정작 내 일은 모두가 퇴근한 후에나 시작할 수 있었다. 그 어디에도 있을 곳이 없었다. 생각을 정리할 공간도, 생각을 멈출 공간도 없었다. 회전 초밥처럼 들어오는 초밥들을 모두 먹어 치우기에 급급했다. 뭘 씹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일의 효율은 더 떨어져 갔다.


아무 미팅도 없는데 홀로 노트북 하나 들고 사내 카페에 갔다. 창밖을 바라보는 1인석에 앉았다. 멍하니 창밖 풍경을 보았다. 차들은 열심히 달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바삐 횡단보도를 건넜다. 생각이 정리되고 보니, 나만의 공간이 없었다. 팀장이 된 이상, 일의 가고 서는 것과 달리고 걷는 것은 스스로 정해서 지키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이렇게 열심히 했으니 좀 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좀 무리하면 될 일을 하는 것도 계속해선 안 될 일이었다.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의무였다. 더 삶의 경계를 명확히 해야 했다.


창밖을 바라보는 1인석은 당분간 나만의 공간으로 삼으려 한다. 오히려 멈춰야 잘 달릴 수 있을 때가 있다.


나는 또 내일 잘 멈출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팀원이 나 때문에 퇴사한다고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