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의 툴루즈 로트렉은 이름이 아닌 성이자 프랑스 남부지방의 유명한 귀족 가문이다. 툴루즈 로트렉 가문은 혈통과 부를 계승하기 위해, 근친에의 자손을 낳았고, 유전적 형질로 장애를 가지는 경우가 있었다. 정상적인 부모님 아래에서 많은 결핍을 앉고 태어난 "앙리 마리 레이몽드 드 툴루즈 로트렉 Henri Marie Raymond de Toulouse-Lautrec-Monfa (이하 로트렉), " 이 이번 전시회 화가의 주인공이다. 당 시대의 귀족 출신의 이름은 서민층보다 길었고, 이름이 길 수록 가문의 명성이 높았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1864 - 1901)
어렸을 때 귀엽고, 주위의 사랑을 많이 받은 로트렉이었지만, 커가면서 농축 이골증(상염색체 열성 방식으로 유전되는 선천성 질환)이라는 뼈가 으스러지는 유전병을 얻었다. 장애를 앓고 난 뒤부터 아버지의 사랑은 단절되었고, 금전적인 지원만 있었다. 13살 때, 양쪽 넓적다리 뼈를 다친 후 키가 자라지 않았고, 성인이 되었을 때의 키는 154cm였다. 말을 할 때,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으며, 온전히 걸을 수 없어 지팡이에 의존하였다. 명성이 높은 가문의 귀족 출신이었지만 사회에서 소외된 기피대상자였다.
두 다리를 다쳐 걷지 못하고, 병원에 누워있을 때 어머니께서는 청각장애를 지닌 동물화가를 붙여주었다. 로트렉은 마음을 열면서 그림을 배우고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림을 빠르게 그리는 타입이었으며, 동물의 중요한 부분만 캐치하여 그리곤 하였다. (개의 얼굴이나, 곰의 개괄적인 형체를 그리고, 마무리하지 않은 듯한 그림들을 찾아볼 수 있다.) 선생님과 외부 활동을 함께 하고, 서커스를 보러 가기도 하였다. 로트렉의 작품 중에 가장 많이 등장한 동물을 꼽자면 '말'이다. 아버지가 승마를 좋아하였고, 그가 존경하는 에드가 드가도 말을 좋아하였으며, 첫 선생님이 동물화가 임에 따라 말을 곧 잘 그리곤 하였다.
1886년 툴루즈 로트렉은 코르몽의 작업실에서 11살이 많은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나,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었다. 로트렉은 부유하지만 선천적 장애(유전질환. 농축 이골증)를 가지고 있었고, 고흐는 가난과 함께 후천적 장애(자괴감, 정신질환)를 가지고 있었다. 둘 모두 소외감, 열등감을 느낄 수 있는 위치에서 서로의 내면을 알아갔다. 부유한 로트렉은 고흐에게 술을 사주고, 재정적으로 많은 것을 베풀었다고 한다. 당시의 로트렉의 그림들을 살펴보면, 고흐의 그림체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로트렉이 그린 고흐의 초상화(1887. 54 * 45 cm,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인상파의 다른 말로 외광파로도 불리었다. 밖에서 빛을 연구하고, 관찰하며 그림을 그리는 파를 가리켜 외광 파라 하였다. 에드가 드가는 실내조명에서 인물을 그렸었고, 외광파라는 단어는 인상파로 귀결시켜졌다. 당시 인상파의 그림들은 일본의 그림인 '우키요에'에서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서양미술의 주된 기법인 원근법 달리, 동양미술은 평면예술을 강조하며 원근법을 지양하였다. 이는 서양미술사 인상주의에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 포스터, 일러스트 발전에 기여하였다. 로트렉은 이 인상파의 대표 인물화가인 에드가 드가를 만났고, 존경심을 표하며 그를 따라다녔다. 반대로 에드가 드가는 로트렉을 매우 귀찮게 여기고,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훗날 에드가 드가는 로트렉을 두고, "로트렉은 내 옷을 가져가 자신의 몸에 맞게 재단하였다. " 로 평하였다.
일본 우키요에
로트렉은 이후 물랭루주에 들어간다. 물랭루주는 '빨간 풍차'라는 뜻으로 당시 카바레 지붕에 빨간 풍차가 장식되어 있었다. 로트렉은 이곳에서 자신의 삶에 안정감을 찾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어투와 걸음걸이 그리고 외모에 대해 그 누구도 기피하거나 등한시하지 않았다. 물랭루주 사람들은 그의 친구들이자 인생의 동반자였다. 유명 공원 및 술집에서 공연 제일 앞좌석과 술을 무한히 먹을 수 있게 하는 조건으로 화가로서 그림을 그려주겠다고 하였다. 당시 공연계의 셀럽이었던 잔 아브릴은 사생아 출신이었고, 로트렉은 여기서 동질감을 느꼈다고 한다. 몸이 가냘프고 우아하면서 지적인 댄서였고, 유독 다리를 높게 드는 댄스를 포인트 화하여 그림을 그렸다. 사람들은 그 그림을 보면서 잔 아브릴이라는 것을 더욱 쉽게 인지할 수 있었고, 이는 잔 아브릴의 인지도를 더욱 올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로트렉의 포스터 "잔 아브릴 자댕 드 파리"
로트렉이 저녁마다 찾아갔던 카바레 "미르리통"에서는 당시 인기가수 브뤼앙이 줄곧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로트렉은 브뤼앙의 노래를 매우 즐겼다. 입이 거칠고, 황소 같은 사람이었지만 마음은 따뜻했던 브뤼앙은 의외로 섬세한 감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로트렉은 내면의 감성을 공감하며, 자신의 일부를 보았다고 한다. 급격하게 형제와 같은 친구관계가 된 둘에게서 로트렉은 브뤼앙을 위한 포스터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빨간 스카프와 나무막대는 브뤼앙이라는 가수의 시그니쳐가 되었다.
로트렉의 포스터 '브뤼앙'
또한, 권력과 재력을 갖춘 명문가에서의 고상한 귀족문화보다 몽마르트르 밤거리의 카페 콩세르를 더 좋아했다. 19세기 파리의 수많은 카페 콩세르에서 단연 돋보인 가수는 이베트 길베르였다. 아래는 카페 콩세르 중 하나였던 '디방 자포네'가 문을 열었을 때의 포스터이다. 로트렉이 열광하였던 이베트 길베르는 어디 있을까? 포스터 가운데 우아한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성은 의 댄서 물랭루주 잔 아브릴이다. 당시의 몽마르트르 밤문화를 좋아하고, 카페 콩세르를 즐겨하던 사람들은 이 포스터를 보고 이베트 길베르가 어디 있는지 바로 알았다고 한다. 좌측 상단의 검은 장갑을 끼고 있는 목이 잘려있는 여성이 이베트 길베르이다. 당시 인체의 부분 중 일부만을 그리는 방식 또한 일본 우키요에의 영향이었다고 한다. 이베트 길베르의 포인트는 검은 장갑이었으며, 포스터에 검은 장갑만을 보고 사람들은 이베트 길베르 공연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로트렉의 포스터 '디방 자포네'
로트렉의 포스터 "이베트 길베르 음반 광고"
이후 로트렉은 줄곧 70도에 독소도 가득한 압생트라는 술을 마시곤 하였다. 알코올 중독과 정신질환에 시달렸고, 길거리에 쓰러지게 된다. 주위 지인들이 발견한 후 집이 아닌 정신병동으로 그를 보낸다. 로트렉은 의사에게 자신이 정상상태임을 증명하기 위해 어렸을 때, 첫 동물화가 선생님과 갔었던 서커스에서 본 장면들을 기억에만 의존한 채 그림을 그려 의사에게 자신이 정상상태임을 증명하였다. 의사는 그림들을 보고 즉시 퇴원시켰다고 한다. 자신의 처지와 동질감을 느끼며, 창녀들의 삶을 그림으로 그리고, 판화집을 연재하지만.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를 기대했던 것과 달리 창녀의 청소하고 빨래하는 인간적이고 심심한 모습들을 담아내기도 하였다.
평생의 포스터 31점을 만들었으며, 포스터는 4초 안에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단순해야 하고, 적은 색을 사용해야 하며, 글씨의 앞글자를 크게 가져가는 그의 포스터 철학은 현대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36살이라는 짧은 나이에 삶을 마감하였다. 작품은 어머니가 모아 후대에 가치를 알아봐 주기를 바라며, 고향에 로트렉 미술관을 만들고 전시하였다. 정통 회화에서 비주류로 취급받았던 로트렉의 예술관이 현시대에서 재조명받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그 가치에 대해 높이 평가될 것이라 생각한다.
귀족 출신이나 핸디캡을 지니고 있던 로트렉은 물랭루주, 몽마르트르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같은 눈높이에서 소통하였다. 그리고, 주어진 현실과 이상속에 로트렉만의 예술적 승화를 가져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