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zi Apr 15. 2024

安子, Who are you?

1부 한국 고향 중국 고향, 증조부님과 족보, 떼놈 누나

1화. 한국 고향, 중국 고향


     "동훈아, 넌 무슨 성씨나?"

     "순흥 안 씨"

     "고향은 어디지?"

     "강원도 철원군 어운면 이길리!"

     "노할아버지(증조부) 이름은?"

     "안교립(安教笠)!"

     "할아버지 이름은?"

     "안인호(安仁浩)!"

      ......

     1970년대 초, 만주땅 어느 오지 산골마을에서 아버지는 네댓 살밖에 안된 나를 품에 안고 종종 이런 대화를 노랫말처럼 주고받았다. 중국에서 살면서 아버지는 왜 어린 나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이런 정보를 주입했을까?

    그때는 몰랐지만 스무 살이 되고, 서른, 마흔 그리고 반백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는 그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하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그것은, 비록 몸은 이국타향에 묶여 있었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고국의 고향마을 산과 들을 그리워했을 나의 증조부, 조부 그리고 아버지 세대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처절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하고.


    2000년 겨울, 중국 창저우라는 도시에서 외자유치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던 나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깨끗한 도시와 단정하고 깔끔한 옷차림의 시민들, 잘 정비된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는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사통발달한 지하철, 그리고 빌딩 높은 곳까지 매달려 있는 화려한 한글간판들,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낯설고도 신기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북경이나 상해 같은 대도시에서 꽤 오래 살았기에, 서울은 대도시가 주는 그런 위압감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아기자기하게 잘 가꾸어 놓은 작은 공원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심플한 디자인의 빌딩들, 먹자골목에서 풍기는 익숙한 음식 향기 등은 나에게는 연일 감탄의 연속이었다. 입에 넣자마자 내뱉었던 홍어회를 뻬고는 모든 음식이 엄마가 해 준 집밥처럼 입에 맞았다. 아니, 엄마의 집밥보다도 훨씬 더 맛있었다. 시민들은 지하철 에스결레터를 탈 때엔 한편으로 비켜서서 시간 급한 사람들이 먼저 올라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큰 빌딩의 문을 열고 드나 들 때는 앞선 사람이 뒤에 오는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잠깐 문을 잡아주는 매너에 또 놀랐다. 젊은 분들은 어르신이 운전하는 차에는 무조건 양보해 주었고, 혹시라도 행인이 놀랄까 봐 클락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뒤를 따라가주고...,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런 건 그때의 중국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20여 년이 흐른 지금의 중국에서도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너무도 예의 바르고 친절한 모습에 나는 한국을 처음 방문한 그 며칠 연일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자랑스러웠다. 내가 이런 시민들과 정체성을 같이 하고 있다는 자긍심으로...

    그렇게 연 며칠 흥분 상태에서 예정되어 있던 한국기업들 방문을 마치고 나니, 나에겐 5일 정도 한국 출장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때 중국에서부터 알고 지냈던 한국 지인분이 나를 초대하는 식사자리에서 나한테 물었다. 남은 시간 한국에서 뭐 할 거냐고.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고향에 가보고 싶습니다."

    "고향이요? 안주임님 한국에서 태어났어요?" 한국 지인분이 의아해했다.

    "저는 중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아버지 고향 말입니다."

    "아, 그러세요? 아버님 고향이 한국이세요?"

    "네. 한국입니다. 강원도 철원군 어운면 이길리입니다."

    "그래요? 제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시간 되면 제가 모시고 갈게요." 한국 지인분이 호탕하게 가이드를 자처하고 나섰다.


    다음날 아침, 한국 지인분이 내가 머문 호텔로 다급하게 전화를 해왔다.

    "안주임님, 아버님 고향 찾았습니다. 강원도 동송읍에 있습니다. 어운면은 해방 후 동송읍으로 편입되어 지금은 동송읍 이길리라고 합니다. 서울에서 서너 시간(사실 폭설로 6시간 넘게 걸렸다.) 걸릴 것 같은데요, 제가 모시고 갈게요. 언제 출발하실 건가요?"

소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어차피 출장 업무도 다 봤고, 관광 말고는 딱히 할 일도 없었다. 나는 오늘 당장 가볼 수 있겠냐고 물었다. 한국 지인분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호텔로 픽업 오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고마운 분이었다. 내 고향뿐만 아니라, 그 후 며칠 동안 한국 지인분은 오래된 포드 자동차를 끌고 나를 데리고 갓 개통한 서해안고속도로를 거쳐 서산, 평택, 무안, 목포, 남해, 통영, 부산 등 지역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 지역 맛집들을 찾아서 정말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맛있는 음식들을 사 주었다.   


    그날 오전 10시쯤 호텔에서 출발한 우리는 서울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정신없이 달렸다. 그해 겨울, 서울과 강원도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특히 강원도로 진입하면서, 눈이 무릎까지 쌓인 도로를 우리는 중간중간 마주 오는 트럭이나 승용차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 힘겹게 달려서, 서울에서 출발한 지 6시간 만에 겨우 동송읍에 도착했다. 희미하게 힘없어 보이는 겨울해가 하얀 눈으로 뒤덮인 산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강원도는 그야말로 온통 산지었다. 내가 태어난 중국 흑룡강성 대오사구 풍경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내 증조부가 1940년대 가족들을 이끌고 왜 그런 오지마을을 찾아들었는지, 그 느낌을 왠지 알 것도 같았다. 첩첩산중, 끝없는 소나무숲과 하얀 눈밭, 내가 본 강원도 산지 풍경은 내 고향 대오사구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한국 지인분이 알아보았는데, 이길리는 DMZ 구역에 있어서 일반인이 방문하려면 사전에 등록해야 한다고 해서, 우리는 먼저 동송읍 사무소를 찾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동사무소 여직원도 그렇게 설명해 주었다. 더욱이 나는 "외국인"이다 보니 적어도 방문 보름 전에 국방부에 통행증을 신청해야 한다고 했다.

    6시간을 눈길을 헤쳐 아버지 고향을 찾아왔는데, 고향을 코 앞에 두고 멈춰 버렸다. 조금만 더 가면 아버지 고향땅인데...

    적잖이 실망해하는 나를 보고, 동사무소 직원도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중국 같았으면, 인맥을 동원하거나, 돈을 쥐어 주거나 하면 해결할 수도 있을 법 한데, 여기 한국은 그런 게 먹힐 것 같지 않았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시죠?" 한국 지인분이 말했다. "다음에 오시면 사전에 미리 통행증 신청해서 우리 또 같이 와요." 말만 들어도 너무 고맙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좀 알아보고 가야 할 것 같아서 동사무소 여직원분한테 몇 마디 더 물어보았다.

    "제 증조부님이 여기 살았는데요, 아버지도 여기서 태어나서 중국으로 데려갔구요. 제가 순흥 안 씨거든요. 여기 안 씨 분들이 많이 사나요?"

    "아 네. 여기 동송읍에 안 씨 분들이 많이 살아요. 그분들한테 물으면 선생님 증조부님을 아실만한 분도 계실 것 같네요." 동사무소 여직원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래요? 어디 가면 순흥 안 씨 어르신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경로당이 있는데 거기 한번 가보실래요?" 동사무소 여직원이 친절하게 지도까지 그려주었다.

    우리는 곧바로 경로당을 찾아갔다. 눈이 많아 와서 그런지, 경로당에는 할머니 몇 분만 계셨고, 방금까지 고스톱을 하셨는지 방 한편으로 밀어 둔 화투판이 보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여기 순흥 안 씨 어르신 계신가요?"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순흥 안 씨요? 누가 순흥 안 씨지?" 할머니 한분이 의아한 듯 다른 할머니들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여기 우리들은 안 씨가 없어. 그 뭐야. 그 교장선생 할아버지가 안 씨 잖아..." 할머니 한분이 빨간 패딩에 팔을 껴 넣으면서 말씀하셨다.

    "맞아, 교장 할아버지가 안 씨여.." 다른 할머니도 맞장구치셨다.

    "오늘은 안 나오셨는데... 근데 무슨 일로..."

    내가 찾아온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해 드렸더니, 할머니들은 중국에서 온 나를 신기해했다. 안교장 선생님은 내일 오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어느덧 날도 저물었고 할머니들은 귀가 채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폐를 끼칠 수가 없어서 서둘러 인사드리고 나왔다.

    "안주임님, 오늘은 그냥 서울로 돌아가야겠네요. 다음에 다시 오시죠. 제가 또 모시고 올게요." 한국 지인분도 아쉬운 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사실 저는 이미 고향에 온 기분입니다. 여기는 제 조부님과 아버지 고향인데, 모든 풍경이 제가 태어 난 중국 고향마을과 너무 닮아서, 마치 내 고향에 온 기분이네요."

그리고 우리는 밤길을 달려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동송읍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순대국밥집을 들러서 저녁을 먹었다. 내가 중국 고향마을에서 자주 먹었던,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순댓국이랑 맛이 너무도 닮아서 첫술을 입에 넣는 순간 나는 할머니 생각에 눈시울이 젖어 올랐다. 우리 가문에서 유일한 대학생이었던 순흥 안 씨 28 세손인 나를 대견스럽게 바라보시던 할머니의 자상한 얼굴이 떠 올랐다. 그 무렵, 할머니는 이미 10여 년 전에 이국땅에서 세상을 하직하셨다. 제발 넋이라도 여기 이길리 고향땅에 돌아왔으면 좋겠다...  






    대오사구(大乌蛇沟), 내가 태어난 고향 마을이다. 까마귀와 뱀들이 득실거리는 산골짜기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만주땅 가장 동쪽에서 작은 강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마주 보고 있다. 어느 정도 작은 강이냐면, 가장 좁은 데는 불과 10미터 정도, 건기에는 바짓가랑이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면 첨벙첨벙 바로 러시아 영토로 넘어갈 수 있다.

    대오사구는 이름만 산골짜기지 실은 길죽하게 생긴 분지이다. 수 백 만년을 걸쳐, 수 없이 폭발한 백두산 화산으로 인해 화산재가 가득 덮이고, 또 수 만년을 걸쳐 발효하고 견뎌내어서 지금은 당장 먹물이라도 짜 낼 듯 검게 윤기 나는 비옥한 흑토대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 분지 주변으로 완달산 산맥이 겹겹이 발달되어 있고, 사람들이 이주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여기는 백두산호랑이를 비롯한 수많은 산짐승들의 지상낙원이었다.  

    내 증조부님이 식솔들을 데리고 여기 대오사구 마을로 이민 온 것은 1947년 여름이라고 한다. 그때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1949년 10월 1일 건국) 전이다. 하지만 그때 만주지역은 소련 홍군의 세력범위에 있었던 터라, 이미 공산당 지방정권들의 장악하에 있었고 일사천리로 진행된 토지개혁으로 내 증조부는 목단강 동경성 지역에서 십 수년을 고생해서 일군 모든 땅을 하루아침에 공산당 인민정부에 "자진반납" 해야 했다.    

    그리고 그 당시 국내외 정치적인 문제로 남북한 왕래가 갑자기 끊어지며, 강원도 이길리 고향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점점 모연 해졌다. 마침, 소련 접경지역인 대오사구 개간에 이주민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증조부님은 또다시 "이민"의 길에 올랐다.


    증조부님이 식솔들을 소수레에 태우고, 크고 작은 산을 수 십 개나 넘어서, 보름만에 도착한 대오사구는 말 그대로 오지 중의 오지었다고 한다. 사람 키 두 배는 될 법한 삼베나무(대마초) 숲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하게 자라고 있었고, 하늘에는 시도 때도 없이 까마귀 떼가 새카맣게 날아다니고, 도처에는 뱀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한다.

    뱀이 얼마나 많았냐면, 그때 이주민들은 삼베나무를 베다가 임시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밤에 자다가 천장에서 뱀들이 후드둑 떨어지는 바람에 깜짝 놀라 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대오사구 초기 정착민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개간을 시작했는지는 상상도 안 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산짐승과 물고기들이 넘쳐나서 중국의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 같은 동란의 시기에에도 배를 굶은 적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주민들이 하나둘씩 들어오면서 대오사구는 비로써 마을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상툰, 중툰, 하툰으로 나눠지게 되었다. 이주민들은 밤낮으로 삼베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논과 밭을 만들었다. 화산재가 수 만년을 걸쳐 쌓이고 또 썩어서, 땅은 비옥하기 그지없었다. 지금은 거의 모든 평지가 논과 밭으로 일구어져 있고, 완만한 산비탈도 대부분 경작이 가능한 밭으로 일구어져 있다. 대오사구의 3개 마을은 문화대혁명(1966년~1976년) 시기에 각각 광성, 오성, 동방홍으로 개명되어 지금까지 쓰고 있으며, 그 이름에는 모두 모택동주석이나 중국공산당을 찬양하는 뜻이 담겨 있다. 광성은 빛나는 별(중국공산당을 비유), 동방홍은 동방의 붉은 태양(모택동주석을 비유), 오성은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상징하는 단어들이다. 땅이 하도 비옥하고 풍요로워 농사가 너무 잘 된다는 소문을 타고 중국동포 이주민들이 만주땅 여기저기서 하나둘씩 모여들다 보니 1960년대에 대오사구는 이미 2000명이 넘는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고 마을 가장자리에 있는 큰 습지를 제외한 대부분 땅이 비옥한 논과 밭으로 개간되었다. 그 규모는 무려 1인당 오 백 평 정도로 전체 논과 밭 면적은 100만 평은 족히 된다.

    간혹 가다 장마로 홍수도 지긴 하지만, 가을이 되면 물이 빠져나간 논밭은 어김없이 노랗게 풍년이 든다. 여기서 생산되는 쌀은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고가의 유기농 쌀이다. 한국사람들이 한국산 쌀에 자부심이 대단하지만, 솔직히 한국쌀은 내 고향 쌀과는 그 맛이 비교가 안된다. 내 매부가 한국사람인데 내 고향 쌀밥을 처음 먹어 보고는 그 맛에 감탄하여 눈이 다 휘둥그레 해졌다고 한다. 여동생이랑 중국 칭다오에 살 때는 어김없이 고향 쌀을 구매해서 먹었다고 한다.

    우리 마을 동쪽으로 흐르는 강은 정식 명칭이 호부투하(胡布图河) 라고 한다. 아마도 만주족 언어이지 싶다. 러시아와의 국경을 이루는 강이기에 우리는 그냥 간단하게 국경강(혹은 소련강)이라 불렀고, 어릴 땐 매일 거기서 살다시피 했다. 여름엔 국경강에서 수영도 하고 낚씨도 하고 철렵도 하고, 겨울엔 꽁꽁 얼어붙은 강 위에서 하루종일 발구(얼음 썰매 비슷한 놀이기구)를 타면서 돌매질을 했고, 얼음이 풀리는 초봄엔 작살을 들고 다니면서 가재를 잡아서 구워 먹었다. 내가 어렸을 때엔 동네 아낙들이 국경강에 나가 빨래를 하다가 북태평양에서 산란하러 올라 온 연어들을 빨래 방망이로 내리쳐서 몇 마리씩 잡아 오기도 했다.


    그 무렵, 나는 그 강에서 기이한 경험들을 참 많이 해보았다. 한 번은 이른 새벽에 국경강에 나가 밤새 놓은 낚싯줄을 거두고 있는데, 불과 20m도 안 되는 강물 위쪽에 어미 사슴과 새끼 사슴이 나타났다. 나는 낚싯줄을 걷다 말고, 숨을 죽이고 조용히 지켜보았다. 어미 사슴도 나를 힐끔 보더니, 별로 경계도 하지 않으면서 새끼를 데리고 옅은 물을 유유히 건너서 러시아 쪽 울창한 갈대밭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 시절엔 산속에서도 드문드문 사슴이나 고라니들을 마주쳤지만, 매번 짐승들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꽥꽥 소리를 지르며 내빼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불과 20m도 안 되는 근거리에서 하얀 김이 솔솔 피어나는 새카만 사슴 코까지 관찰한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사슴이라는 단어가 보이거나 생각나면 제일 먼저 하얀 김이 솔솔 피어나는 새카만 사슴 코가 떠 오른다. 그 하얀 김이 사슴 코에서 피어오른 건지 아니면 강 수면에서 피어 오른 물안개 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또 한 번은, 전날 내린 폭설로 눈이 허벅지까지 쌓인 강변 갈대밭을 소꿉친구와 함께 별생각 없이 걸어가고 있었는데 앞에서 걷던 친구 놈이 갑자기 멈춰 섰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물을 사이도 없이, 친구 놈이 갑자기 옆에 있는 갈대숲을 향해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나는 깜짝 놀라서 어리둥절하고 있었는데, 나보다 더 놀란 놈이 있었다. 까투리다. 갈대와 비슷한 위장을 하고 있어서 나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지만, 공부는 죽어라 싫어하고 산짐승과 물고기 사냥만 즐기는 친구 놈의 예리한 눈을 속이진 못했다. 친구가 갈대숲 속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 깜짝 놀란 까투리도 친구 겨드랑이 밑으로 쏙 빠져나가 죽어라고 내빼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까투리는 달리기만 했지 날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눈밭에서 까투리와 쫓고 쫓기는 달리기를 했다. 한참 쫓다 보니, 까투리는 바로 앞쪽 갈대숲 사이 눈 속에 머리를 처박고 꼼짝도 않고 있었다.

    죽은 건가? 내가 또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에 친구 놈이 순식간에 까투리를 덮쳤다. 이번에 성공이다. 친구 두 손에 날개를 잡힌 까투리가 꽥꽥 소리 지르며 발버둥 치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두껍게 쌓인 눈밭에서는 꿩이 잘 날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죽어라고 도망가다가 체력이 떨어지면 숲 속이든 눈 속이든 머리를 틀어박고 "숨는다"는 것이다. 미물이라, 자기가 안 보이면 다른 동물이나 사냥꾼도 자신을 못 볼 거라 생각한다나 뭐라나...


    그날 나는 친구집에서 처음으로 꿩고기를 먹어 보았다. 닭고기 비슷한 식감이지만, 기름기가 거의 없고 닭고기보다 더 고소하고 담백했다. 증조부님이 처음 여기로 왔을 땐 산짐승이 너무 흔해서 숲 속에 여기저기 올가미를 쳐두기만 해도 하루에 꿩을 수 십 마리씩 잡았다고 한다. 대약진시기와 문화대혁명 시기를 거치면서 알곡을 훔쳐먹는 모든 산짐승들과 쥐, 그리고 참새들이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서 거의 멸종되다시피 했지만 요즘은 환경보호니 동물보호니 해서 사냥을 금지한 지 20년이 넘어서 산짐승들도 조금씩 돌아오고 있고, 폭설이 내리면 꿩이나 까투리(사실 까투리도 암컷 꿩이다)도 심심찮게 마을로 내려와 탈곡장 같은 데서 낱알을 주어 먹는다고 한다. 심지어 근년에는 백두산 호랑이도 가까운 산속을 다녀간다는 소문이 있다.

    앞에서 대오사구는 분지라고 적었는데 사방이 모두 산이다. 동쪽만 러시아산이고, 나머지는 모두 중국 쪽 산이다. 그리고 산을 하나 넘으면 또 산이고, 그 산을 넘으면 또 다른 산이 나오고 하는 이런 식이다. 얼마나 오지 산골인지 짐작이 가실지 모르겠다. 지금은 교통 인프라가 잘 정비되어서 고향에서 연변이나 목단강, 하어빌 등 도시로 서너 시간이면 갈 수 있지만, 내가 어릴 땐 연변으로 가려면 버스로 하루, 다시 기차로 하루, 이렇게 이틀은 꼬박 가야 했다. 내가 연변대학교 다닐 때만 해도 그렇게 다녔다. 지금은 마을 사람 대부분이 한국으로 나와 일하고 있어서, 마을은 텅 비어 있다고 한다. "전성기"에는 2000명이 넘게 살던 동네가 지금은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과 농사를 짓는 중년 농삿꾼들 수 십 명만 남아서 마을을 지키고 있고, 어린 아기나 학생들은 마을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고 한다. 30년 전까지만 해도 초등학교가 3개, 중학교 1개가 있었는데 이젠 모두 폐교가 되었고, 학교 건물들은 지금 양돈장, 양계장 등으로 "재활용" 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검은 흙의 논과 밭은 여전히 "힘"이 좋아서 해마다 풍년이란다. 농사도 모두 현대식 기계화로 진행되고 마을에 남은 중년 농민들이 1인당 수만 평을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요즘은 농약이나 비료 살포도 모두 드론으로 해결한다고 하니, 이 땅을 처음 개간하신 내 증조부님이 구천에서 그 광경을 보고 계신다면 얼마나 감개무량 해 하실까...         






2화.  증조부님 그리고 족보


    내 증조부님 함자는 안자 교자 립자, 안교립(安教笠)이다. 순흥 안 씨 참판공파 1파 사용공파 25 세손이다. 증조부님은 1930년대에 철원군 어운면 이길리에서 식솔들을 모두 데리고 만주로 이주하셨다고 한다. 처음 정착지는 흑룡강성 목단강시 동경성(발해왕터)이었고 일본이 패망한 후 1947년, 공산정권에 의한 토지개혁이 진행되자 다시 동녕현(지금의 동녕시) 대오사구로 "이민" 했다. 대오사구 이민 1세대인 셈이다. 대오사구 지금의 100만 평 비옥한 논과 밭은 바로 증조부님의 첫 삽으로 개간된 것이다.

    증조부님은 외동아들을 두셨는데, 즉 내 조부님 얘기인데, 조부님은 강원도 철원군 이길리에 살 때 소를 방목하다가 소가 뿔로 조부님의 머리를 들이박는 바람에 하마트면 죽을 뻔 했단다. 12살 때라고 한다. 왼쪽 태양혈 가장자리에 달걀만한 크기의 홈이 움푹하게 파여 들어갔는데 그때부터 몸이 허약해져서 시름시름 자주 앓다 보니 증조부님의 근심이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한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하나뿐인 외동아들인데 장가도 못 보내고 죽으면 순흥 안 씨 참찬공파의 사용공파가 대를 끊게 될 텐데.

    그러던 차 조부님이 18살 되던 해에 "적당"한 혼처가 들어와서 부랴부랴 혼인을 올리게 되었다. "적당"한 혼처라고 말한 건, 내 조모님의 처지도 조부님 못지않게 딱했기 때문이다. 조모님은 한양 조 씨인데 14살 때 큰 사고를 당했다. 기차를 타다가 치맛자락이 기차바퀴에 말려 들어가는 바람에 발목이 잘려 나갔다. 그 후 상처부위가 계속 곪아서 일본인 병원에서 세 차례나 큰 수술을 받으면서 허벅지 절반을 절단하고 나서야 상처가 겨우 나았다고 한다. 16살에 조부님과 혼인을 하고 아들 셋, 딸 하나를 낳아 주었다. 3대째 외동아들인 집안에 큰 복이 아닐 수 없었다. 조부님은 혼인 후에도 계속 시름시름 앓다가 조모님이 네 번째 아이, 그러니까 내 고모를 임신하고 5개월 되던 해에 끝내 만주땅에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고모는 아버지 얼굴도 못 보고 태어 난 유복자다.

    하나뿐인 아들이 신체가 허약한 데다가 며느리도 쌍지팡이가 없으면 서 있지도 못하는 다리 하나뿐인 장애인이다 보니, 온 가족의 생계가 오롯이 연로하신 증조부님한테 달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조부님은 온 가족을 데리고 강원도에서 만주로, 그리고 다시 대오사구로 두 번이나 이주하면서 가족들을 끝까지 부양하셨다. 논밭을 개간하고 씨를 뿌리고 거두고 산짐승이나 물고기들을 잡으면서 얼마나 고된 삶을 사셨을지, 그 고달픔과 고민의 무게를 지금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훗날, 할머니한테서 들은 얘기지만 그런 고된 노동을 하시면서도 증조부님은 저녁식사후 반드시 기름 등잔 밑에서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손주들에게도 한글과 한자를 가르치셨다고 한다. 먼 훗날, 아버지가 어린 나를 품에 안고 들려주던 강원도 이길리 고향마을 얘기도 틀림없이 증조부님한테서 배운 것이니라...


    1930년대에 일본인들 등쌀에 못 이겨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이주한 증조부님 꿈은 필시 돈을 벌어 다시 이길리 고향마을로 돌아가는 것이었으련만, 증조부님은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시고 1967년 만주땅 오지마을 대오사구에서 세상을 하직하셨다. 만주땅을 전전하는 30여 년 동안에 일본항복, 공산정권 수립, 토지개혁,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 여러 격변의 시대를 거치면서도 증조부님이 꼭 지켜낸 물건이 하나 있으니, 바로 족보다.


    그 당시 중국은 어마어마한 정치운동 태풍 속에 있었고 모든 전통 문물을 때려 부수고 태워버렸던 무시무시한 시대였다. 증조부님이 족보를 간수하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었다면 아마 증조부님은 반혁명분자로 낙인 찍혀서 사형당하거나 감옥살이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증조부님은 족보를 꽁꽁 감추고 세상을 하직할 때가지 끝까지 보관했다. 300년은 족히 될법한 낡고 낡은 그 족보를 지금은 내가 보관하고 있는데 어려운 한자로 조상님들 출생일자, 출생지역, 배우자와 자손 그리고 그 자손의 출생일자, 출생지역 등등을 세대별로 적어 놓은 그 족보를 나는 지금도 제대로 읽어 보지 못한다. 몇 년 전에 그 족보 모든 페이지를 사진 찍어서 순흥 안 씨 대종회에 이메일로 보내서 진위여부와 살아 계신 친척들이 있는지 확인한 적이 있다. 메일 보낸 걸 거의 잊고 있었던 어느 날, 대종친회 부회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부회장님 함자에 승자 돌림을 쓰는 걸 보면 아버지와 같은 항렬이고 나한테는 삼촌벌인 셈이다.

    "조카님, 반갑습니다. 보내 주신 족보를 확인한 결과, 조카님은 순흥 안 씨 1파, 참판공파의 사용공파 후손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현 족보(1980년도 간행)에는 기환-> 교진, 교근, 교악 세분만 등록되어 있고, 교립(내 증조부), 교영, 교풍 세분은 등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교진, 교근 두 분도 아들 이후로 후손이 없습니다.

    "다만, 기환 조상님은 둘째 아들인 교근을 아들이 없는 동생한테 양자로 보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분이 이름을 교립으로 개명한 것 같습니다."

    나는 참판공파니 사용공파니 이런 단어들은 처음 듣는 얘기인데, 다행히 부회장님께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순흥안씨는 여러 공파가 있는데, 사용공파는 이미 100년 전에 대가 끊긴 걸로 기재되어 있단다. 사용공파 24 세손이신 안기환 조상님께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이름이 각각 안교진, 안교근, 안교악이었고, 동생 안상환이 아들이 없어서 둘째 안교근을 동생한테 양자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고 했다. 교근과 교립은 출생연월일도 같고, 배우자도 모두 풍천 임 씨로 기록되어 있는 걸 보면, 아마도 동일 인물이고, 그분이 내 증조부이신 안교립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사용공파 후손이 중국에서 여태껏 대를 잇고 있다니 참말로 기적이다, 종친 뿌리를 찾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인데, 조카님이 이렇게 노력해 주시니 종친회를 대신해서 감사드린다"라고 적었다.         


    순흥 안 씨 27 세손인 내 아버지는 우리 동네 유지셨다. 다섯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증조부 손에서 크다 보니 너무 가난해서, 초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에 졸업하고도 중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열네 살 때 대흥안령(중국 동북지역과 러시아 시베리아에 걸쳐 넓게 분포되어 있는 큰 산맥) 벌목꾼으로 가서 몇 년 일하다가 성인이 되어서야 고향에 돌아왔다. 워낙 총명하고 결단력이 있어서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고, 곧 중국공산당에도 가입하게 되었다. 그 후 대오사구 당서기를 10년 넘게 하다가 동녕현 향진기업관리소로 전근되어 탄광개발 업무를 맡게 되었다. 평생 30여 개 탄광을 개발하고 운영하다 보니 다들 아버지를 안쾅장(矿长,탄광 지배인이라는 뜻) 혹은 안털보(수염이 장난 아니었다)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술과 담배를 즐겼는데, 특히 술을 좋아해서 늘 술이 거나하게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는데, 나는 단 한 번도 아버지가 주사를 부린 걸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들어오면 늘상 하는 말씀이 있었다.

“중국 놈들이 술로 이겨보려 하길래 내가 몇 놈을 골로 보냈지”

    아버지는 대주가로 소문나 있다. 들리는 얘기로는 60도짜리 고량주 서너 병은 끄떡없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 놈들이 술로 이겨보려 한다”는 말은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본인도 “중국인”인 조선족일텐테 왜 상대방을 "중국 놈"이라고 표현하시는지.


    한국사람들은 그런 감정을 절대로 느껴 본 적 없겠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중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온 우리는 자신들을 조선사람이라 생각하고 살아왔다. 잠시 중국에 머물고 있는 것이지 중국사람은 아니다라는 것이 그 시절 중국동포들의 정체성이었다. 우리는 한족들을 가리켜서 중국사람 혹은 떼놈이라 불렀고, 한족들은 우리를 조선사람 또는 꼬리빵즈(고려인을 비하해서 부르는 말)라고 불렀다. 적어도 아버지 세대까지는 그랬다.

    지금도 우리 마을 고령의 어르신들은 중국어를 전혀 못하신다. "통역"을 대동하지 않으면 도시 나들이도 하지 못하시고 아직도 한족들을 중국사람이라고 부른다(이제는 시대가 변해서 그런지, 떼놈이라고 욕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젊은 세대들은 그냥 한족, 조선족 이렇게 구분해서 부른다. 다 같은 중국사람이고 난 조선족, 넌 한족일 뿐 우리는 모두 중국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직은 거북하다. 내가 정말 진짜 중국사람일까...







3화.  예쁜 "떼놈" 누나


    어릴 때 일이다. 아마 열 살쯤 됐을 것이다. 동네 애들과 시냇가에서 통발을 놓고 물고기를 잡고 있는데, 버스 한 대가 마을 어구(버스 정류장이 따로 없었다)에 멈춰 서더니,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학생이 보따리를 끌어안고 내렸다. 그리고 "버스정류장"에 모여 있는 어른들에게 뭘 물어보는것 같았다. 소통이 잘 안 되었는지, 동네 어른 한분이 우리 쪽에다 대고 소리 질렀다.

    "동훈아, 이 중국여자가 너네 집에 온 것 같다, 최 선생네 집이 어디냐고 묻는 것

같더라..."

    최 선생은 내 어머니다. 마을에 최 씨 성 가진 초등학교 선생님은 내 어머니밖에 없었다.

내가 통발 속에서 버들치를 줍다 말고 일어서서 돌아다보니, 그 중국여자가 나한테로 걸어오면서 물었다.

"네가 동훈이냐? 난 니 누나야." 예쁜 얼굴이었다.

우리는 초등학교에서 한어를 배운다. 마치 영어나 일본어 같은 외국어를 배우는 것처럼, <한어>라는 과목이 있다. 그래서 초등학교 3학년쯤 되면 한어를 조금은 알아듣지만 대화를 할 수준은 못된다.

    예쁜 누나는 손짓으로 어서 물에서 나오라고 했다.

"빨리 집에 가자. 이모 집에 계시지?"

난 시냇물에 손을 씻고, 물에서 나와 말없이 앞장서서 걸었다. 대화를 못하니 뭐라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애들이 뒤에서 수군거렸다. "저 떼놈 누구야? 동훈이 친척인가?"

    여름방학이라 마침 어머니가 집에 계셨다. 두 여자는 서로 얼싸안고 중국어로 뭐라고 빠르게 얘기하는데 난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아마도 서로 가족들 안부를 물어보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어머니는 나에게 그 여자를 소개해 주었다.

    "니 사촌누나다. 밀산 큰 이모네 큰 딸 려화야. 여름방학이라서 놀러 왔단다."

    사촌누나가 뭐라고 말하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집을 나와서 다시 시냇가로 달려갔다.

    "누구야? 그 떼놈 여자?"

    "너네 친척이야?"

    "어디서 왔대?"

    애들이 궁금해했다.

    "사촌 누나래, 밀산에서 왔대."

    나는 애들이 계속 놀려 댈까 봐 짐짓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통발 속에서 큼지막한 버들치를 꺼내서 주둥이에 버드나무 가지를 끼워 넣었다.  


    내 어머니는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에서 태어났는데, 일본 패망 3년 전에 외할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이민 갔다. 어머니보다 5살 이상인 큰 이모도 옥천군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막내 이모는 일본 항복 그 해에 만주 목단강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삼자매 중 둘째이고, 큰 이모는 군인인 중국남자(한족남자)에게 시집갔는데, 큰 이모부가 제대한 후 농장 당서기장으로 부임한 5811농장 소재지인 밀산 흥개호 부근에 정착하고 살았다. 흥개호는 중국과 러시아에 걸쳐 있는 중국 북부 지역 최대의 함수호(바닷물)다. 그 호수 주변으로 중국 최대의 양곡생산기지 북대황(北大荒)이 펼쳐 저 있는데,  5811농장은 그 북대황 허허벌판에 산재한 수 십 개 대형 농장의 하나이다. 한 개의 농장은 인구가 10만 명이 넘고 수천만 평에 달하는 논밭을 기계화방식으로 경작하며, 수십 개 양계장과 양돈장, 그리고 젖소 양식장을 운영하며, 그 당시 중국 최대의 신선우유와 분유 공장을 가지고 있었다. 내 고향 대오사구같은 시골동네가 아니라, 농사도 기계화로, 농산물 가공, 우유 가공 등 그 당시 중국 최고의 시설들을 운영하는 현대화 농장이었다. 큰 이모는 이 농장에서 운영하는 대형 유치원의 원장이었다. 출세한 셈이다. 조선족 입장에서 보면, 중국남자한테 시집간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우리는 그때 한족들을 "떼놈"이라 불렀으니까.


    잡은 물고기를 한 꼬챙이씩 나눠 갖고, 나는 서둘러 집에 돌아갔다. "떼놈"이지만, 대오사구에서는 흔하게 볼 수 없는 예쁜 누나가 놀러 와 있었고, 무엇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우유사탕도 선물로 가져왔을 것이다.  5811농장에서는 "완달산"이라는 브랜드의 우유사탕도 만들고 있었는데 큰 이모는 자주 우리 집에 사촌형이나 누나가 입던 옷들을 우유사탕이랑 분유랑 함께 보내 주셨다. "완달산" 브랜드는 그때도 지금도 중국에서는 알아주는 신선우유, 분유와 우유사탕 브랜드다.

    아니나 다를까, 주방 밥상에는 우유사탕이며 분유며 그리고 대오사구 시골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과자봉투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사촌누나는 어머니랑 함께 텃밭에서 오이며 토마토를 따고 있었다. 나는 잽싸게 우유사탕 봉지를 풀고 사탕 한 줌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집을 나왔다. 애들이랑 나눠 먹어야지. 사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때 우유사탕은 꽤 귀한 간식이었다.

    그해 여름방학, 나는 처음 만난 사촌누나랑 제법 많이 어울려서 놀았다. 산에도 데려가고 국경강에도 데리고 가 구경시켜주었다. 그리고 중국어도 제법 늘어서 간단한 대화도 할 수 있었다. 사촌누나가 우리 집에서 보름 정도 놀다가 밀산으로 돌아간 후, 나는 그 빈자리가 너무 커서 한동안 우울하고 서글펐다. 동네 형이랑 누나들이 틈만 나면 나한테 "떼놈" 누나랑 같이 사니 어떠냐, "떼놈" 누나 냄새나지 않아? 하며 놀렸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촌누나한테 정이 많이 들었는지, 난 한동안 그 "떼놈" 누나를 많이 그리워했다.


    그 후 내가 좀 크자, 어머니는 나와 동생들을 데리고 여러 번 밀산 이모네 집에 놀러 갔었고 대학입시를 치른 후 나 혼자서도 한번 놀러 갔었다. 처음 5811농장에 놀러 갔을 때, 나는 그 "어마어마"한 스케일에 입이 떡 벌어졌다. 이모네 집은 농장단지 외곽에 있는 직원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그 아파트 옥상에서는 탁 트인 농장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먼 지평선 끝머리에 어슴프레 보이는 산자락까지 검푸른 색깔의 콩밭과 옥수수밭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고 바람이 불어오면 마치 바다처럼 “파도”가 술렁거렸다. 한쪽의 넓은 목장에는 수백 수천 마리 젖소들이 유유히 거닐며 풀을 뜯거나 엎드려 쉬고 있었다.

    중학교 여름방학에 밀산 이모집으로 놀러 갔을 때, 난 흥개호에 너무 가보고 싶었다. 중학교 때 어느 잡지에서 흥개호에 대한 짤막한 소개를 본 적이 있었다. 호수가 짠 바닷물이라고 소개한 점이 너무 신기했다. 분명 내륙호수인데 어떻게 호수물이 소금물일 수 있는지 믿기지 않았다. 내가 너무 졸라대니, 사촌누나가 사귄 지 얼마 안 남자친구를 불러서 셋이서 자전거를 타고 2시간 가까이 달려서 흥개호로 놀러 갔었다.

    러시아가 더 많이 차지하고 있는 흥개호는 바다 구경을 못한 나에게는 그냥 바다 그 자체 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밑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 파란 호수 위로 잔잔한 파도가 일고 있었고, 낮은 언덕을 뒤로 하고 좁고 하얀 백사장이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펼쳐져 있었고 파도가 찰싹찰싹 발등을 때렸다. 오지마을 대오사구에서 나고 나란 나에겐 평생 잊을 수 없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손으로 호숫물을 한웅큼 떠다가 마셔보니 전혀 짠맛이 없었다. 한번 더 떠서 마셔봐도 마찬가지였다. 

     “너 목이 마르냐? 이 호숫물은 그냥 마시면 안돼. 수질이 그리 깨끗하지 않거든. 이거 마셔.” 누나가 핀잔하면서 푸른색 군용 수통을 내밀었다. 

    “어느 잡지에서 흥개호가 짠 바닷물이라고 해서요. 마셔보니 하나도 짜지 않는데요?” 내가 어리둥절해서 물으니 누나와 남자친구는 배꼽 잡고 웃어댔다.

     “니가 다른 호수로 잘못 봤겠지. 흥개호는 담수호야...”

     나중에 알고보니 흥개호는 중국에서 두번째 세계에서 네번째로 큰 담수호였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눈을 감고 그 풍경을 떠올리면 따뜻한 바람에 날려오는 약간 비릿한 호수 내음과 길다랗게 펼쳐진 하얀 백사장, 그리고 나를 붙잡아 호숫물에 던져 넣던 예쁜 사촌누나와 잘 생긴 매형의 웃음소리가 귀가에 들려오는 것 같다. 그땐 난 이미 "떼놈"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다.


    내가 대학에 간지 얼마 안돼서 사촌누나는 사귀던 남자친구와 결혼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아들을 낳았다. 그 무렵, 5811 농장은 국영제도를 폐지하고 젖소 양식장, 우유공장, 사탕공장 등을 민영화하기 시작했고, 국영기업 직원으로 일하던 사촌누나와 매형은 함께 공장을 사직하고 장사를 시작했다. 그동안 사촌누나는 예쁜 아가씨에서 아기 엄마로, 그리고 아줌마로 신분 세탁을 했고, 한동안 잘 되던 가게는 끝내 폐점되었고, 매형은 그 사이 다른 여자랑 바람 나서 가출했다가 20년이나 지나서 아들이 결혼하게 되면서 다시 사촌누나랑 재혼했다. 40킬로 날씬한 아가씨에서 80킬로 체급의 육중한 아줌마가 된 사촌누나는 그동안 여러 직장들을 전전하다가, 10여년 전에 추나 마사지 치료사 자격증을 따서 지금은 베이징에서 자그마한 마사지샵을 운영하고 있다. 나는 내 인생 열심히 사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벌써 15년 넘게 사촌누나를 만나보지 못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내가 한족들을 "떼놈"이라 부르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거기서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름방학에 우리 집에 놀러 온 예쁘고 상냥한 "떼놈" 사촌누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