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무역회사는 북경 제2순환도로 안에 있는 건국문(建国门) 근처 어느 구식 호텔 안에 있었다. 중간 벽을 털어 낸 좀 큰 사무실 한 개와 사장실과 부사장실 각각 1개씩을 쓰고 있었고 나는 큰 사무실에서 업무를 봤다. 처음엔 주로 한국바이어나 파트너 회사와의 서신 왕래 같은 문서 업무를 담당했고, 어느 정도 업무를 숙지한 후에는 한국바이어를 모시고 상품 아웃소싱을 위해 중국 여기저기로 출장 다니기도 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북경회사는 무역회사라기보다는 컨설팅회사였다. 그때는 컨실팅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무역회사가 그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오만가지 정보가 많이 모여들었다. 한국사람들도 많이 찾아오고, 조선족이나 중국사람들도 많이 찾아왔다. 심지어 북한사람들도 찾아왔다. 이런 사람들은 저마다 "중요한" 정보들을 가지고 오는데 작게는 표고버섯 수입부터 크게는 목숨 걸고 해야 하는 우라늄 수출까지 별의별 정보를 다 날랐다.
어느 날, 주중북한대사관의 소개로 왔다면서 김정일위원장처럼 머리를 곱슬곱슬하게 파마하고 김정일위원장이 늘 차려입는 인민복 차림을 한 20대 후반의 청년이 수행인원으로 보이는 다른 청년과 함께 우리 회사를 찾아왔다. 북한업무를 담당하는 김 부장이 나랑 함께 그들을 맞았다. 북한 청년은 자신을 정찰총국 산하 모 무역회사 지배인이라고 소개했고 북한에서 생산하는 인삼 같은 특산품을 수출하려고 한다고 했다. 그 무렵, 중국을 드나드는 한국사람들이 북한산 인삼이나 청심환, 안궁환 같은 특산품을 잘 사가던 때인지라, 아마도 우리 회사를 통해 한국바이어를 찾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한국 출장을 자주 다녔던 김 부장이 북한산 인삼 공급가격을 물어보더니 그 가격으로는 거래가 어렵다고 말했다.
"지배인동무, 우리가 남조선 사람들한테 판매하는 가격은 지배인동무가 제시한 가격의 절반도 안되오."
"부장동무가 말한 가격은 아마 중국산 가짜일 겁니다. 진짜 우리 조국에서 생산한 인삼이라면 그 가격으로 팔았을 리가 없습네다. 우리 회사는 진짜를 공급할 수 있습니다." 곱슬머리 청년 지배인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우리는 조선 인삼이나 청심환 같은 물건을 남조선 사람들한테 많이 팔아서 잘 압니다. 가짜 아닙니다. 남조선사람들도 바보가 아닙니다. 조선 인삼이 싸니까 그나마 사가는 겁니다. 남조선에도 인삼이나 홍삼이 얼마나 많이 나는데요. 비싸서 그렇지..." 김 부장도 지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남조선 인삼을 가지고 우리 조국의 인삼과 비교한단 말입네까? 남조선 인삼이 우리 인삼보다 좋다는 말씀입네까?"" 곱슬머리가 조금 흥분했다.
"남조선 상품이야 원래 북한 상품보다 훨씬 좋죠." 김 부장은 아예 대놓고 북한이라 불렀다.
사무실에 있던 여직원들이 이쪽을 흘끔거렸다. 나는 북한사람들은 처음이라 어떻게 다룰지 잘 몰랐다.
김 부장이 피씩 웃더니 한마디 던졌다. "북한은 내 조국이 아니오. 내 고향은 경상도요. 굳이 조국을 따지자면 한국이 내 조국이죠."
그러자 곱슬머리는 너무 화가 나서 씩씩 거리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기 이상한 회사네. 대사관에서 하도 추천하길래 한번 와봤더니 정말 상종 못할 인간이네."라고 말하고는 부하직원을 데리고 씩씩 거리며 나가버렸다.
그들이 나가자 김 부장이 하하 웃으면서 말했다. "꼬라지가 아니꼬워서 일부러 약을 올렸어. 꼬라지 저게 뭐야? 김정일이야?"
또 한 번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사업한다는 북한 사람이 우리 회사 김 부장을 찾아왔다. 근처 5성급 호텔에 묵고 있었는데 김 부장과는 오랜 친구라 했다. 며칠 있다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나는데 김 부장이랑 술이나 한잔 하려고 찾아왔다고 했다. 김 부장은 그 자리에 나도 데리고 갔다. 백마강가라오케 었는데 그때 수준치고는 상당히 세련되고 호화스러운 유흥업소였다.
우리가 마담을 따라 룸에 들어가 자리 잡고 앉으니 잠시 후에 짧은 스커트 차림의 아가씨들이 열 명 넘게 들어와서 일렬로 우리 앞에 쭉 섰다. 이런 장면은 머리털이 나서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떨리기도 했다. 북한 사업가와 김 부장은 이런 자리가 익숙한지 마치 백화점 진열대에서 상품을 고르듯이 아가씨들 얼굴이며 몸매를 자세히 뜯어 보다가 이쁜 아가씨를 하나씩 고르고 나서 나도 빨리 고르라고 재촉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지만 세상물정 모르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그냥 제일 가까이에 있던 아가씨를 찍었다. 아가씨들이 딸깍딸깍 하이힐 소리 내면서 우리 옆에 와 앉았고, 자기 이름은 아무개라고 한국어로 소개했다. 셋 다 조선족 아가씨들이었다. 저쪽 둘은 연길에서 왔다고 했고 내 파트너는 선양에서 왔다고 하는데 진위는 알 수 없었다. 그녀들은 능수능란하게 과일접시와 술잔들을 손님들 앞으로 세팅하고는 양주와 맥주를 땄다. 북한 사업가가 김 부장과 나한테 양주를 한잔씩 따라주고는 아가씨들한테도 한잔씩 따라 주었다.
양주는 처음이었다. 영화 같은 데서 외국인들이 큰 술잔에 절반 정도 따르고 얼음이나 레몬 조각을 넣고는 조금씩 홀짝 거리는 장면들을 많이 봤었지만 솔직히 그런 술맛일 줄은 몰랐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한참 마시다가 북한사업가가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해서 파트너 아가씨가 노래책이랑 마이크를 가져다주었다. 북한사업가는 노래책은 보지도 않고 리모컨으로 노래를 예약했다. 뜻밖에 한국노래 "찔레꽃"이었다. 실력은 가수 뺨 칠 정도였고 엄청 진지하게 불렀다. 노래를 마치자 김 부장이 경상도 사투리로 "살아있네" 하면서 양주를 따라 주었다. 그날 북한사업가는 한국 노래를 열 곡 넘게 불렀다. 하지만 북한 노래는 단 한곡도 부르지 않았다.
술자리가 끝나고 마담이 정산하러 들어오자 북한 사업가가 재킷 안쪽 포켓에서 두툼한 누런 봉투 하나를 꺼내 그 속에서 빠릿빠릿한 달러 지폐 몇 장을 뽑아서 술값을 치르고 아가씨들에게도 한 장씩 팁을 주었다. 그러고 나서 북한 사업가와 김 부장은 아가씨들을 데리고 북한 사업가가 묵은 호텔로 갔다. 난 처음으로 낯선 아가씨와 꼭 붙어 앉아 술을 마신 탓에 많이 긴장해서 그런지 별로 취하지는 않았다. 그 아가씨도 나랑 함께 "2차"를 가고 싶어 하는 눈치길래 나는 집에 일이 있어서 들어가 봐야 한다고 하고는 줄행랑을 놨다.
나중에 김 부장한테서 들었는데 사실 그 북한 사업가라는 사람은 우즈베키스탄 주재 북한대사관 영사라고 했고 그때 도피 중이라고 했다.
북경회사에서 근무하는 동안 여러 부류의 북한사람들을 만났고 북한의 "태양절"이니 "수교기념일"이니 등 행사에 초대받아 중국주재 북한대사괸에 가서 평양냉면을 얻어 먹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 당시 북한은 "고난의 행진"을 할 때라 경제가 상당히 어려웠고 모든 기회를 이용해서 외화벌이를 하려 했고 우리회사는 북한대사관에서 꽤나 "중시"하는 무역회사다 보니 북한사람들이 자주 찾아 왔었는데 위에서 언급한 곱슬머리 "리틀 김정일" 처럼 이상한 사람도 있었지만 나름 세련되고 사고방식이 "정상적인" 사람들도 꽤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무엇보다도 짧은 한복차림의 이쁜 북한아가씨들이 쟁반에 가득 날라다 주던 평양냉면 맛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15화. 왕사장 그리고 왕회장
1996년, 어느덧 우리는 북경생활 3년 차가 되었고 그해 10월 후이는 북경 어느 인민병원에서 나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 분만 전날부터 진통이 시작되었지만 후이가 자연분만을 너무 힘들어해서 결국은 다음날 새벽에 제왕절개로 분만했다. 순흥 안 씨 참판공파의 사용공파 29 세손이다. 처음 간호사로부터 아기를 받아 안았을 때, 양수에 젖은 그 작은 얼굴은 주름지고 파리파리했고 못생겼다. 하지만 오후쯤 되자 신기하게도 아기 얼굴은 환하게 펴지기 시작해서 하얀 피부의 이쁜 아기로 다시 태어났다. 간호사들이나 다른 산모 문안을 온 손님들도 모두 우리 아기를 들여다보더니 너무 이쁘다고 칭찬일색이었다.
그리고 나는 얼마 전에 부장으로 승진했다. 몇 달 전에 한국 출장 갔다가 아예 거기에 눌러앉아 돌아오지 않은 김 부장 대타로. 그리고 여동생은 한국사람이랑 결혼해서 한국으로 귀화했고 부모님도 초청을 받아 한국에 가 계셨다. 두 분 모두 한국국적을 회복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중국국적을 포기하는 순간 중국에서 이룬 모든 것이 사라지고 공무원 퇴직금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고 한국정부가 그 퇴직금을 대신 내줄리는 만무했다. 두 분 말씀으로는 지금 이대로가 제일 좋다고 하셨다. 우리 아이가 태어난 후 부모님은 육아에 보태라며 한국에서 5만 위안을 보내주셨다. 그때 내 월급이 1500 위안 었다.
후이는 그동안 북경 외곽 어느 상가 일용품가게에서 점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가게주인이 그녀와 동갑내기 여자라서 둘은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다. 후이가 그 가게에 출근한 지 달포쯤 되던 날 가게주인이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나는 거기서 가게주인 남편이랑 친구가 됐다. 남편은 왕씨었고 나보다 한 살 어렸는데 그때 자그마한 인테리어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속상해했다. 두 사람은 우리가 북경에서 생활하는 동안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해 겨울 어느 날, 왕사장이 갑자기 나를 찾아와서 횡설수설하다가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뒤 또 찾아와서 이러쿵저러쿵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잔뜩 늘어놓다가 돌아갔다. 나한테 무슨 용건이 있는 것 같았는데 왕사장은 끝내 털어놓지 않았다. 나도 회사생활에다 육아까지 신경 쓰느라 정신없어서 마음에 담지 않았다. 후이는 아이를 낳은 후 점포 일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했다.
그해도 다 지나가는 어느 겨울날, 왕사장이 또 나를 찾아와서 시간 좀 되냐고 물었다. 부장으로 승진한 후 나는 시간적 여유가 점점 많아졌고, 아주 중요한 사안만 빼고는 내 업무를 알아서 처리하면 되었다. 내가 시간 된다고 하자 왕사장이 잠깐 어디로 가보자고 해서 나는 무심코 따라나섰다. 왕사장이 운전하는 봉고트럭을 타고 북경 어느 교외에 있는 큰 물류창고에 도착했다. 주로 건축자재나 인테리어 자재들을 도매하는 물류창고 성격의 도매시장이었는데 그 규모가 축구장 열 개는 될 정도였다. 북경에 몇 년 살면서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왕사장은 그중 어느 마루 자재 도매창고에 나를 데리고 갔다. 창고 안에는 규격별로 포장된 수십 가지 컬러의 마루자재들이 열을 맞추어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북경이나 인근 도시에서 온 인테리어 업자들이나 소매상들이 찾아와서 물건을 떼가고 있었는데 광경을 보아하니 장사가 엄청 번창한 것 같았다. 왕사장은 여기저기 코너를 돌면서 가격이나 원산지를 물어보고 있었고 마루자재를 처음 본 나는 신기해서 샘플들을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두께는 1cm 내외 었고 앞면은 여러 컬러와 무늬로 반들반들했고 뒷면은 일반 합판 모양이었는데 패널 한쪽 면은 길게 홈이 파여 있었고 다른 한쪽면은 가운데 부분이 조금 튀어나왔다. 마루를 깔 때 이런 방식으로 결탁하나 보다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왕사장이 다가왔다.
"형, 이거 다 독일에서 수입한 거야. 요즘 북경에서 난리 났어. 가정집들에서 이걸 깔려고 몇 달씩 기다린다고, 물건이 없어서."
인조강화마루가 신기하긴 했지만 인테리어니 목수일이니 이런 데는 영 흥미가 없던 나는 왕사장 말에 그냥 "그래?" 하는 정도 었다.
내 표정이 심드렁했는지 왕사장은 조금 실망해하는 얼굴이었다.
"형, 이건 지금 없어서 못 팔아요. 1m²에 100위안씩 떼다가 깔아주면 200위안 300위안은 받아. 1가구당 최소 70,80 m²은 깐다고 치고, 그럼 한집에서만 1만 위안은 버는 셈이야." 왕사장이 신나서 설명했다. 1만 위안은 내 4개월치 월급이다.
"이걸 하려고?" 내가 물으니,
"음, 할 거야. 꼭 해야 해." 왕사장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왕사장은 자기 이름을 딴 새로운 인테리어회사 북경중해인테리어유한공사를 설립했다. 원래 회사는 개인사업자 었고 새로 설립한 회사는 법인사업자 었다. 개업식 날 우리도 초대받아 갔는데 별로 크지 않은 사무실은 2/3가 마루 샘플 진열대로 꽉 차 있었다. 그 후로 왕사장은 승승장구하여 몇 년 뒤에는 마루사업을 접고 플랜트 공정사업을 했다. 북경 연산지역은 중국 화북지역 최대의 정유단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우리가 북경을 떠난 후 10여 년 만에 만난 왕사장 내외는 북경에서도 알아주는 갑부가 되어 있었고, 왕사장 이름을 딴 회사는 중해그룹이 되어 산하에 여러 계열사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4성급 호텔도 3개나 있었다. 왕회장내외의 호의로 우리는 그중 제일 큰 호텔에 무료로 3일간 묵었다.
그날 저녁식사자리에서 왕회장은 10여 년 전 나를 데리고 마루 도매시장을 방문했던 일을 회상했다. 그때 중국은 아직 마루문화가 정착하기 전이었고 왕회장은 곧 큰 시장이 열릴 것을 직감했다고 했다. 하지만 몇 년간의 인테리어사업으로 자금회수가 어려워 자금난이 심각했던 왕회장은 마루사업을 시작할 초기자금이 없었다. 3만 위안, 그러니까 최소 도매물량을 떼갈 수 있는 자금만 있으면 바로 시작할 수 있었는데 그 돈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던 왕회장은 자기 와이프한테서 우리 부모님이 한국에서 육아비용으로 5만 위안을 보내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래서 나랑 동업하고 싶어서 여러 번이나 나를 찾아왔는데 결국 그 얘기를 끝내 꺼내지 못하고 자기 부모네 고향집을 판 돈으로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 말해주지 그랬어. 그랬다면 나도 지금 너처럼 갑부가 돼 있을 거자나."
다들 하하 하고 웃었지만 나는 기분이 씁쓸했다. 그때 북경 마루도매시장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더 진지하게 왕회장 그러니까 그때의 개인사업자 왕사장의 얘기를 경청했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하고 잠깐 생각했다.
16화. 왕징아파트 사지 않을래요?
1997년 그해,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었고 나는 여전히 한국사람, 북한사람, 중국사람들 상대하느라 정신없었다. 한국의 인건비를 감당하지 못한 중소기업들 특히는 3D 업종의 중소기업 사장들이 중국에 진출하고 싶어 했다. 우리 회사에도 그런 분들이 많이 다녀갔다. 초기의 양말공장, 피혁가공공장, 봉제공장 등에서부터 그 후에는 전자부품회사, 플라스틱제품회사, 자동차부품회사 등 "하이테크" 기업들도 중국 어디로 가면 좋겠냐, 어떤 우대정책을 받을 수 있느냐, 돈을 벌면 한국으로 가져갈 수 있느냐 등등 많은 질문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왔다. 나는 그런 분들을 북경 근처나 허베이 성, 요녕성 등지 지자체나 경제개발구에 추천했고, 그런 질문에 대한 피드백을 전달하거나 직접 모시고 현지 방문을 하는 등 바쁘게 보냈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2,30개 넘는 한국기업들을 여기저기에 유치해 주었던 것 같았다. 그 경험들은 나중에 내가 창저우시국가공단 외자유치공무원으로 취직할 때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그날도 사무실을 방문한 한국손님들을 접대하고 있는데 "실례합니다" 하면서 젊은 여자랑 남자가 손에 전단지 같은 걸 들고 사무실에 들어왔다. 사무실 여직원이 무슨 일로 왔냐고 물으니, 자기들은 북경 모 부동산개발업체 영업사원이라고 소개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전단지 몇 장을 건넸다. 평소에도 그런 잡상인들이 자주 다녀간지라 우리 여직원은 알겠다고 하면서 돌려보냈다. 그들은 사무실을 나가면서도 정말 좋은 아파트니까 꼭 좀 잘 읽어봐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이튿날, 그 두 사람은 또 우리 사무실을 찾아왔다. 마침 손님도 없고 해서 내가 그들을 소파에 불러 앉히고 전단지를 받아 보았다.
"어느 동네에 짓는 아파트예요?"
"왕징이라고 수도국제공항 가는 길에 있어요. 거기 오라지 않아 제5순환도로가 깔리는데요 그러면 북경시내까지 15분이나 20분이면 갈 수 있어요." 여자분이 전단지에 그려있는 약도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아직은 주변에 옥수수밭 밖에 없어서 좀 편벽(偏僻, 외딴곳이라는 뜻) 해 보이지만, 여기 4차까지 완공되면 왕징단지는 1만 세대에 5만 명 이상 거주하는 대단지 아파트가 될 겁니다."
전단지에 그려 넣은 아파트단지 조감도를 보니 진짜 규모가 어마어마해 보었다. 하지만 내가 여기저기 출장 다니느라 수도국제공항을 오갈 때마다 지나쳤던 왕징(그때는 거기가 왕징이었는지도 몰랐다)은 그저 옥수수밭만 보이는 허허벌판이었다. 이거 또 부동산사기꾼들이네, 이번엔 아예 옥수수밭에다 아파트를 짓는다고 하는구먼, 하고 나는 의심부터 했다. 그때 북경은 제3순환도로까지만 있을 때었고, 제4순환도로를 한창 규획하고 있을 때었다. 그런데 제5순환도로를 깐다고? 웃기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하고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이거 지금 1평(1m² 를 말함)에 얼만가요?" 그래도 소파에 불러서 앉혔으니 "성의"라도 보여야 할 것 같아 그냥 한번 물어보았다.
"1평에 3980위안(그때 환율로 약 40만 원)입니다." 젊은 여자가 전단지 아파트 사진 위에 적혀 있는 가격을 가리켰다. "북경에는 지금 이런 가격의 아파트는 없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당연하지, 그런 외딴곳에 그것도 옥수수밭에다 짓는데 비싸면 누가 사겠냐? 진짜 짓기는 하고?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래요. 싸긴 싸네요. 한번 생각해 볼게요."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젊은 여자가 이번에는 혼자 우리 회사를 찾아왔다.
"어떻게 생각 좀 해보셨나요? 사실 의향 있으세요?"
"글쎄요. 아파트를 산다는 게 어디 그렇게 뚝딱하고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잖아요. 한두 푼도 아니고." 나는 그만 좀 귀찮아졌다.
"만약 사장님님께서 사신다고 하면 제가 가격을 좀 더 네고해 드릴게요. 어차피 제 보너스에서 깎는 거니까요." 그 여자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제가 지금 결정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입니다. 정말 살 의향이 있다면 돌아가서 매니저님께 여쭤 볼게요. 아마 좀 더 할인 가능할 겁니다."
"그래요. 얼마나 할인해 줄지 보고 결정할게요."라고 했지만 사실 난 왕징아파트 살 마음이 꼬물만치도 없었다.
그날 오후 늦은 시간에 그 여자분이 전화로 나를 찾았다. 매니저랑 의논해 보았는데 1평에 최대 300위안 할인해 주겠다고 한다. 대신 금주 안으로 계약서를 쓰는 조건이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 하루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하겠다,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나는 지난번에 찾아왔던 한국무역회사 우사장 일행을 모시고 허난성(河南省) 난양시(南阳)로 표고버섯 구매하러 출장을 갔다. 난양시 표고버섯은 수량이 얼마 안 돼서 우린 다시 상해로 갔다가 거기서 비행기로 푸젠성(福建省) 푸저우시(福州)로 향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마음에 드는 표고버섯을 만나지 못해서 우린 다시 광시자치구(广西) 류저우시(柳州)로 떠났다. 다행히 거기서 원하는 수준의 충분한 표고버섯을 확보했고 구매계약서까지 체결한 우리는 일단 류저우시 관광에 나서기로 했다.
류저우시는 "천하제일경"이라는 계림에서 그리 멀지 않았는데 계림처럼 카스트 지형에 속해서 여기저기 불쑥불쑥 솟아있는 산봉우리들 경관이 멋있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류저우지질공원으로 구경 갔는데 손가락처럼 여기저기 솟아 있는 산봉우리들이 엄청 많았다. 내 고향 대오사구를 겹겹이 감싸고 있는 완달산맥은 산과 산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형태라면, 여기 류저우의 산들은 하나하나 제각기 산봉우리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런 풍경은 처음이라 다들 신기해했다. 아마 훗날 영화 "아바타" 감독이 여길 먼저 답사했더라면 장가계는 찾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남자 셋이서 지질공원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젊은 아가씨 셋이 걸어오고 있었다. 키도 호리호리 하고 얼굴도 나름 괜찮았는데 우사장이 그녀들을 보더니 나더러 같이 구경하자고 제안해 보라고 했다. 내가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우리랑 같이 놀지 않겠냐고 물어봤더니 키 큰 아가씨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내가 한국사람들이라고 했더니, 자기들끼리 낮은 소리로 쑥떡쑥떡 의논하더니 "그래, 좋아요. 같이 놀아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솔직히 별 기대를 안 하고 있었는지라 그녀들이 당돌하게 나오자 깜짝 놀랐다.
그렇게 우리는 돌발 헌팅으로 젊은 아가씨 셋이랑 짝을 맞춰서 지질공원을 구경했다. 다행히 여자 셋은 영어가 좀 되어서 내가 한 명 한 명씩 통역을 안 해줘도 되었다. 알고 보니 이들은 베트남에서 귀국한 화교들인데 류저우 어느 직업기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졸업하면 류저우 현지 기업에서 일하게 된다고 했다. 70년대 말 중국-베트남 전쟁으로 양국관계가 악화되어 베트남에 거주했던 많은 화교들이 베트남정부의 탄압을 받아 강제로 중국에 추방되었는데 중국정부가 이들에게 거처도 마련해 주고 교육도 시키고 일자리도 제공했던 것이다.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고 했더니 아가씨들은 기꺼이 응했다. 호텔 근처 근사한 식당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고 나서, 우사장이 아쉬운지 호텔 바에서 한잔 더 하자고 하니 아가씨들은 또 순순히 따라왔다. 호텔바가 10시에 영업종료 할 때까지 맥주를 마시고도 우사장은 이 아가씨들을 돌려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호텔방에 한국면세점에서 사 온 양주가 있는데 한잔씩 더 하겠냐고 물으니, 아가씨들은 지들끼리 쿡쿡 웃으며 눈빛을 교환하더니 오케이, 했다.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여자를 꼬시는 게 원래 이렇게 쉬운 것이었나?
우사장의 "치밀"한 계획대로 그날 우리는 아가씨들과 밤을 함께 보냈다. 우사장은 함께 온 허사장과 한방을 쓰고 있었고 나는 혼자 더블베드 룸을 썼다. 내 파트너는 양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해서 우리는 먼저 내방으로 들어왔다. 샤오 양이라고 부르는 이 아가씨는 자기가 먼저 씻어도 되냐고 물었다. 나는 솔직히 그때까지 갈등하고 있었다. 술에 좀 취했어도 이성은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머릿속엔 온통 집에서 아기와 함께 잠들어 있을 아내 얼굴이 떠올라서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샤워를 마친 샤오 양이 하얀 호텔 가운을 걸치고 침대로 올라오자 나는 그만 이성을 잃고야 말았다. 팔다리가 유난히 가늘고 허리가 가냘픈 그녀는 능수능란하게 나를 다뤘다. 이런 경험은 처음인지라 나는 극도로 흥분했고 그녀의 몸을 미친 듯이 탐닉했다. 호텔방 희미한 불빛 속에서 나는 그녀의 왼쪽 가슴에 한자로 문신한 작은 글자를 보았다. 겨울 "冬" 자었다.
다음 날 아침, 호텔에서 조식까지 마친 아가씨들은 박사장한테서 100달러씩 팁을 받고 돌아갔다. 다음에 류저우에 오면 또 연락하라면서 B.P번호도 남겨 주었다. 나는 그 후 이 "일탈"로 아내 보기가 너무 미안해서 한동안 자책감에 시달렸다.
며칠 후 출장에서 돌아온 나는 사무실 여직원에게 그동안 왕징아파트 영업사원이 찾아오지 않았냐고 물어보았다. 여직원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전화라도 한번 해볼까 하다가 어차피 사지도 않을 걸 일부러 긁어서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잊기로 했다.
2000년 1월, 나는 아내와 세 살배기 아들과 함께 북경을 떠나 아내 고향집으로 가서 구정을 쉬고 창저우시국가공단 외자유치공무원으로 취직했다. 그리고 북경과 왕징아파트를 새카맣게 잊고 살던 2012년의 어느 날, 내가 창업해서 만든 "한국통" 플랫폼의 광고유치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가 북경투자자를 만나러 인천국제공항에서 바로 북경수도국제공항으로 날아갔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북경시내로 들어가던 중, 공항에서 불과 30분 거리에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아파트단지를 지나게 되었다. 갑자기 왕징아파트 생각이 나서 택시기사에게 물어보았다. 여기가 어디냐고?
택시기사 왈 "왕징아파트 잖아요. 왕징코리안타운, 여기 처음이세요?"
순간 나는 멘탈이 헤까닥 하고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진짜 옥수수밭에 아파트를 지었다고? 그것도 이렇게 크게? 또 뭐 코리안타운이라고?
나는 조심스럽게 여기 시세를 물어보았다.
기사님 왈, "요즘 아마 평당(여기서는 1m² 를 말함) 5만 6만(위안화) 할걸요. 여기 집 한 채 갖고 있으면 부자죠."
나는 이번엔 멘탈이 쨍그랑하고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젠장! 그때 3980위안, 아니 3680위안에 주겠다 할 때 샀으면 지금 얼마 버는 거야? 젠장!
코로나전에 한국 대부도에서 소집된 고등학교동창 모임에서 어느 여자동창생을 만났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동창생이 얼마 전에 왕징아파트를 처분하고 서울에다 아파트를 샀다는 얘기를 했다.
"너도 왕징아파트 샀어?" 내가 깜짝 놀라서 묻자,
"음, 10년 전쯤 샀었어. 그때도 꽤 비쌌는데 그냥 질렀지 뭐야. 평당 4만 위안인가 할 때. 얼마 전에 평당 10만(한화 1800만 원) 위안받고 팔았어. 120평(1m² 를 말함) 정도니까 700만 위안(13억 원) 정도 번 셈이지..." 여자동창생이 맥주를 마시면서 담담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