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부 한국은 중국 속국이였어. 20년전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였다.
17화. 한국은 중국 속국이였어...
2000년 1월, 나는 6년간의 북경생활을 접고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창저우시(常州)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국가하이테크공단에서 외자유치공무원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창저우시는 수저우, 우시와 더불어 중국의 3대 강남 산업도시로 불리고 있었고, 인구 350만 명(상주인구 500만 명)에 수 만개 기업이 밀집해 있는 상해경제권의 중요한 산업도시 었다. 내가 갔을 때 창저우에는 이미 글로벌 500대 기업 중 50여 개가 진출해 있었고 현대중공업 등 한국기업들도 상당히 많이 진출해 있어서 2000여 명의 교민사회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노동밀집형 3D 업종의 외국기업들도 많이 유치했는데 개발 가능한 공장부지가 점점 줄어드는 데다가 지역 산업구조 업그레이드도 절실한 상황에서 창저우시 포함 수저우, 우시 등 도시들은 노동밀집형, 환경오염, 3D 등 업종은 사절하고 기술집약, 자본집약형 외국기업유치 즉 외자유치 2.0 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중국의 각 지자체나 경제개발구들은 특히 한국기업의 유치에 아주 적극적이었는데 창저우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무렵 창저우시는 매년 서울에서 투자환경설명회를 개최하여 한국기업을 발굴했고, 당서기장이나 시장이 직접 대표단을 꾸려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2000년, 중국의 1인당 GDP가 1000달러도 되지 않았을 때, "수시창"이라 불리는 수저우, 우시, 창저우 이 3대 강남산업도시는 이미 1인당 GDP가 5000달러 정도로 중국의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여기에는 한국기업을 포함한 수많은 외자기업의 공헌이 컸다. 그러다 보니 한국기업 유치는 창저우시의 가장 중요한 외국기업 유치사업으로 부상하었니 창저우시 여러 경제개발구에서 하나의 한국기업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현대중공업이 그랬다. 나는 국가하이테크공단에 한국공단을 개설하자고 제안했으나 여러 원인으로 무산되었고 결국 그 자리에 현대중공업단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 무렵 공무원들은 자주 회식자리를 가졌는데 나는 신인인지라 술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궁금해했다. 한 번은 내 옆자리에 앉은 중년 간부가 나 보고 고향이 어디냐고 묻기에 나는 흑룡강성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는 "아, 동북사람이네"라고 했다.
그런데 한국어는 어떻게 아냐고 또 묻기에 "나는 조선족이고 어려서부터 한국어로 공부했다"고 설명했다. 그랬더니 그 중년간부는 "조선족은 처음이네" 하면서 무슨 신기한 동물을 보기라도 한 듯 나를 다시 한번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나한테 "오량액"(五粮液,중국명주) 술을 한잔 따라 주면서 또 질문했다. "조선족과 조선사람 그리고 한국사람은 무슨 관계가 있나?"
나는 그분이 알아듣기 쉽게 간단하게 조선족의 이주 역사를 설명했다. 청나라 말기에 조선반도에서 이주민들이 만주땅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동북에 약 200만 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북한이나 남한사람들과 같은 언어와 문자를 쓰고 생활습관이나 풍속도 같다고 하자, 중년간부는 "인구가 200만 명 밖에 안돼? 우리 창저우 절반 밖에 안되네."라고 했다. 중국사람들은 인구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우리 대화를 듣던 옆자리에 앉은 여성간부가 그것도 모르고 있었냐는 말투로 중년간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뭐야, 북한이고 남한이고 실은 다 동북이야. 옛날부터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일본한테 뺏겼다가 일본이 망하니까 그 틈을 타서 독립한 거야."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중국에 조공한 것은 맞으나 속국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남한이든 북한이든 동북에 있는 게 아니고 조선반도에 있습니다."
"조공했으면 속국인거지, 그리고 조선반도도 우리가 보기에는 그냥 동북이나 마찬가지야." 여자간부가 무식하게 계속 우겼다.
나는 "오량액"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무슨 말을 더 한단 말인가.
나중에 지내보니 이 지역 사람들 대부분 북한 남한에 대해 잘 몰랐고 심지어 남한이 어디쯤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벽에 지도가 걸려 있으면 지도를 가지고 설명했고 지도가 없으면 대충 그림을 그려서 북한이 여기, 남한이 여기, 동북은 여기 이런 식으로 설명해주곤 했다.
얼마 후 나는 현대중공업단지 조성 프로젝트에 참가했고 현대중공업 측과의 토지 분양 관련 소통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 당시 현대중공업유한공사는 현대중공업 한국본사에서 파견한 이사님이 중국법인장을 맡고 계셨고 나는 사흘이 멀다 하게 그분을 찾아갔다. 결국 현대중공업단지는 40만 평(한국평수) 규모로 조성하게 되었고, 그중 10만 평은 50년간 무상임대 방식으로 현대중공업유한공사에 제공하기고 했고, 나머지 30만 평은 당시 토지가격의 절반 가격으로 현대중공업 협력업체들에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현대중공업은 한때 창저우 현대중공업단지에서 연간 1만 대에 가까운 굴삭기를 제조하는 창저우시 효자기업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중국 굴삭기 제조사들의 추격으로 생산량이 대폭 급감했다고 들었다. 안타깝지만 언젠가는 현대자동차처럼 중국에서 설자리를 잃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때 현대중공업은 40만 평 토지를 우리가 제시했던 헐값에 매입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로부터 20년 후 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지금 적어도 수십 배에 달하는 차익을 챙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상임대 방식이다 보니 부지는 매각도 불가능하고 설령 사업이 어려워지더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자리에서 계속 버틸 수밖에 없을 것이다.
18화. 20년 전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었다
2000년대 초반, 창저우시에서 외자유치공무원을 하던 나는 자주 구청장이나 상무국 국장 같은 공무원들을 모시고 한국출장을 다녀왔다. 처음 한국을 방문한 중국 공무원들은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내심 한국의 발전상에 감탄하고 있었다.
한 번은 내가 식사자리에서 물어보았다. 한국 첫 방문 인상이 어떠한지? 구청장이 말했다. "한국은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며칠이나 한국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 시골마을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한국은 도시화가 잘 된 나라인 것 같다."
"한국사람들 시민 수준이 아주 높은 것 같다. 예의 바르고 시간 약속 철저하고 친절하다." 상무국 국장도 뒤질세라 칭찬했다.
"그런데 물가가 좀 비싼 거 같아. 지금 먹는 이 갈치구이도 한 조각이 중국돈으로 100위안 넘어." 구청장이 말했다. 그러면서 갈치구이 좀 더 시키라고 했다. 그날 중국 공무원들은 1인당 갈치구이 3인분씩 먹었다.
식사를 끝내고 호텔로 걸어오는 길에 일방통행 도로가 있었고 거기에도 신호등이 있어서 한무리 한국사람들이 파란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공무원들은 신호등을 무시하고 그냥 건너려 했다. 어차피 일방통행 좁은 도로였고 지나가는 차량도 없었다. 중국이었으면 이런 도로에 신호등이 있을 리 만무했고 있다고 해도 지나가는 차량이 없으면 그냥 건너가는 게 “상식”이었으니 그분들도 별생각 없이 건너려고 했던 것 같았다. 나는 다급히 구청장을 불러 세웠다. 빨간불이니 기다려야 한다고.
이미 도로에 한 두 발 내디딘 구청장이 급히 보도로 다시 올라왔다. 그러면서 언짢은 표정으로 "이렇게 좁은 길에 왜 신호등을 설치했지?"라고 했다.
그래도 다른 한국사람들이 조용히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으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일행이 호텔 로비에 들어와서 엘리베터를 타고 호텔방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상무국 왕 과장 핸드폰이 울렸다. 왕 과장이 핸드폰을 꺼내 큰 소리로 "와이! 와이!(여보세요 라는 뜻)" 하고 전화를 받자 함께 엘리베터를 타고 있던 한국 아주머니 두 분이 깜짝 놀라 뒤걸음질 쳤다. 나는 황급히 왕 과장에게 목소리 좀 낮춰라고 귀띔했다. 한국 아주머니 두 분이 서로 쳐다보면서 쿡쿡 웃었고, 나는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처음 한국 왔을 때 나는 예의와 매너가 몸에 밴 시민들의 높은 수준에 깜짝 놀랐었다. 중국과는 너무 차이가 나는 문화충격의 연속이었다. 그 당시 중국에서는 버스나 전철을 타면 간식을 먹는 사람 담배를 피우는 사람 고성으로 전화통화를 하는 사람들로 재래시장에 온 것처럼 시끌벅적했는데, 한국은 버스나 전철 심지어 커피숍 같은 데서조차 누구 하나 큰 소리도 대화하거나 통화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주의를 받거나 비난을 받을 것이었다. 중국인들이 원래 목소리 톤이 높아서 어딜 가나 시끌벅적했다지만 지금은 중국도 시민들 수준이 많이 향상되어 예전처럼 몰상식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그런데 20여 년 전의 한국은 이미 전 국민이 그런 시민 수준을 보여 주고 있었고, 내 눈에는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었다.
그럼에도 그때 만난 한국분들은 누구 하나 한국이 선진국이라고는 얘기하지 않았다. 항상 선진국들은 이러고 있는데 우리 한국은 아직 이러고 있다고 겸손하게 얘기했다. 그리고 요즘도 "자고 일어나니 선진국이 되어 있더라"라고 자조 섞인 표현을 하는 분들도 많다.
그랬던 한국이 언제부터인가 좀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하철에서도 큰 소리로 대화하거나 통화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고, 어른들이 바로 앞에 서 계시는데도 자리 양보하는 젊은 사람 보기 힘들고, 약술 드신 어르신들이 지하철에서 고성으로 다투기도 하고, 뉴스에는 심심찮게 지하철 폭력사태가 들리고, 20년 전에는 어르신 운전자에게 곧 잘 양보를 하더니 지금은 양보는커녕 위험한 보복운전까지 서슴지 않고... 나는 선진국 한국이 어쩌다 이 모습이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한국이 점점 낯설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물론 아직도 에스켈레터 탈 때는 한편으로 비켜주고 빌딩의 큰 문을 열 때는 뒤에 오는 분이 다칠까 봐 잡아주는 매너는 여전하지만 이런 것도 언젠가는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19화. 한국사람들 다 사기꾼이야!
한중수교 이후 불어닥친 코리안드림으로 중국동포사회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시골 처녀들이 하나 둘 한국으로 시집가기 시작했고 한국이 잘 사는 나라라고 소문이 번지더니, 너도 나도 국제결혼으로 한국으로 시집갔고 부모와 형제들도 초청해서 한국으로 돈 벌러 나갔다. 시집보낼 딸이 없어서 한국으로 갈 수 없었던 조선족들은 위장결혼이라는 편법까지 써서라도 한국으로 가려고 했다. 또 초청장을 만들어준다는 한국사람들에게 적게는 5만 위안, 많게는 10만 위안씩 주고도 초청장을 받지 못한 조선족들도 부지기수 었다. 5만 위안이면 그때 환율로 한화 500만 원인데, 한국에서는 일반 직장인 반년치 월급에 불과했지만 중국 농촌에서는 그 5만 위안을 모으려면 온 가족이 10년 혹은 20년을 농사지어야 가능한 금액이다. 그러니 5만 위안이 아니라 10만 위안 주고라도 한국에만 갈 수 있다면 그 리스크를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목숨 걸고 밀항을 해서라도 한국으로 건너갔다. 내 사촌매형이 그들 중 한 사람이다. 사촌매형은 거의 20년을 한국에서 불법체류자로 살다가 새로운 법안이 발효되면서 나이 60이 다 되어서야 F4 비자를 받게 되었다.
그 당시, 이런 수요를 노리고 북경이나 선양, 연길, 위해 등 도시에서 조선족들을 상대로 사기 치는 한국인들도 많았다. 내가 소주공장을 그만두고 웨이하이 친구집에서 한동안 빈둥거리고 있을 때 산동 현지에서 조화공장 공장장으로 있던 60대 후반의 한국인 할아버지가 친구네 옆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같이 살고 있는 20대 후반의 조선족 아가씨를 자주 보았다. 작은 키에 얼굴이 좀 반반하게 생긴 여자 었는데 친구 놈 말이, 이 여자는 고향에 남편이 있는데 한국에 가고 싶어 환장해서 초청장을 만들어 준다는 소리에 그 한국인 "할아버지"한테 빌붙고 있다고 했다. 바로 옆집이라 밤중이면 엷은 벽 너머로 그 "할아버지"와 조선족 아가씨가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때로는 애정행각을 벌이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그럴 때면 친구 놈은 또 지랄이네, 영감탱이 고추 세우지도 못하면서, 하고 욕하면서 나를 끌고 밖에 나가 술을 마셨다. 그 아가씨가 그 "할아버지"한테서 초청장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후에도 북경이나 웨이하이 등지에서 이런 사람들을 많이 봤다.
내 사촌매부를 또 소환해야겠다. 사촌매부가 목숨 걸고 밀항을 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남들은 딸이니 여동생이니 심지어 위장결혼을 한 누나 언니들 덕분에 친척방문으로 한국을 잘만 가는데 사촌매부한테는 그런 기회가 없었다. 그때 연변에서 어떤 조선족 사업가가 사증을 만들어 준다는 한국사업가를 데리고 우리 동네로 왔었는데 급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사촌매형은 사증을 만들어 준다는 소리에 넘어가 여기저기서 빌린 돈 5만 위안을 그 한국사업가한테 전달했다고 한다. 사촌매형처럼 그렇게 "전재산"(실은 전재산의 몇 배 였다)을 넘긴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는데 두 달이 가고 반년이 가고 일 년이 다 돼 가도 사증은 소식도 없고 그 연변사업가도 전화 연락이 두절되었다. 사기당한 걸 알고 땅을 쳤지만 너무 늦었고 빚쟁이들이 하루가 멀다 하게 찾아오자, 사촌매형은 최후의 수단을 동원했다. 바로 밀항이다. 밀항이라고 비용이 싼 것도 아니다. 사촌매형은 이판사판이라 생각하고 8만 위안을 주고 작은 어선에 올랐다고 한다. 사기당해서 땡전 한 푼 없는 사촌매형이 8만 위안이나 하는 밀항비용은 어떻게 해결했냐고? 그 돈은 중국에서 주는 게 아니라 한국 땅을 무사히 밟은 후에 한국에서 지불하기로 했고, 사촌매형은 일이 년 전에 한국에 들어와 정착한 친구나 친척들한테서 꽤 높은 이자를 주고 8만 위안을 빌리기로 한 것이었다. 그렇게 밀항으로 한국에 간 사촌매형은 20년 가까이 한국에서 불법체류자로 살았고, 아직도 나를 보면 이렇게 말한다. "한국 놈들 다 사기꾼이야. 너도 조심해!"
내가 만난 사기꾼은 스케일이 달랐다. 그 사람은 내가 유치한 한국기업의 회장이었는데 간도 크게 중국에서 부동산 불법 매매로 크게 한몫을 챙기고 야반도주했다. 사연은 이랬다.
나는 끈질긴 설득과 노력 끝에 경남 소재의 건설기계 업체를 창저우시에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이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우리 공단의 가장 노른자위 공장부지를 그때 시가의 15% 가격으로 4만4천 평(한국평수)이나 분양했고, 기업소득세 3년 면제, 2년 절반 면제 등 우대정책은 덤이었다.
해당 기업 회장은 곧바로 직원들을 파견하여 창저우시에 상주시켰고, 초기 투자금 400만 달러도 즉시 지정계좌로 입금했다. 이제 말뚝 박고 공장을 만들어 수준 높은 현대화 건설장비를 제조 판매하면 된다. 그때 중국은 전국구에서 건설붐이 대규모로 일어나고 있을 때라 시장은 충분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국으로 파견되어 한국기업 발굴에 전념했다.
그로부터 달포쯤 지나 공단 직속상사가 갑자기 나한테 연락을 해서 급히 귀국하라고 지시했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부랴부랴 귀국해서 직속상사를 만나보니 이미 사태가 터진 뛰었다. 내가 유치한 한국건설장비업체에서 파견된 직원들이 하룻밤 사이에 모두 사라졌고, 계좌에 입금되었던 400만 달러도 모두 철수해 갔다고 했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원가의 15% 가격에 제공한 4만4천 평 부지를 자전거를 생산하는 로컬 대기업에 100% 정가를 받고 모두 넘겼다는 것이다. 현지 자전거회사는 그 부지에다 공장 건설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투자유치 계약서에는 그 토지는 20년 안에 양도나 매매가 절대 불가한 성격이라고 규정하고 있었고, 절차상 한국기업 자체 역량으로는 그런 일을 단독으로 벌일 가능성이 전무했다.
암튼, 파견해 온 한국직원들도 모두 사라졌고, 그 회사 회장은 연락도 안되고 있는지라 한국에 있는 나를 급히 불러서 자초지종을 알아보려고 한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 사건에 개입된 건 아닌지도 조사 중에 있었는데 여러 번 조사 끝에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게 확실해지자, 나에게 그 한국회사 회장을 찾는 새로운 임무를 맡겼다.
혼란한 머리를 붙들고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서 그 건설장비업체를 찾아가 보니, 회장은 이미 이 회사를 다른 기업에 팔고 깨끗이 털고 나간 뒤었고 오너가 바뀐 회사는 이번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다고 했다. 그건 전직 회장이 벌인 일이고 자기들은 그 사태를 모르는 상황에서 이 회사를 인수했기에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다. 나는 이 내용을 공단에 보고했고 그 후 공단 측은 한국에서 여러 변호사들을 선임해서 전직회장을 상대로 몇 번이나 소송을 걸었지만 모두 패소하고 말았다. 결국 공단 측은 2200만 위안 약 40억 정도의 손해를 보고 말았다. 이는 창저우시 외자유치 역사에서 하나의 큰 오점으로 남았다. 그리고 나는 부실감독 책임을 지고 옷을 벗어야 했다. 2004년 가을의 일이다.
그 전직회장은 그 후 정계로 진출하여 어느 군의 군수로 선거되어 2년 반 정도 공직에 있다가 횡령죄에 걸려 감옥에서 몇 년을 살다가 나왔다. 내가 지인을 통해 만나보려 했지만 끝내 만나지 못했다. 나중에 직속상사를 통해 사태 전말에 대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그 회장을 꼬드겨서 불법 토지매매 계약을 추진한 세력은 따로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국가공단 소속 공무원들이었다.
한국이든 중국이든 사람 사는 세상이면 어디든 나쁜 사람 좋은 사람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되도록이면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은 해왔지만 그렇지 못했다. 사업을 하면서 친구한테 빌린 돈 다 날린 적도 있었고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준 적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내한테는 "죄인"이었다. 그렇다고 나는 내가 용서 받지 못할 정도로 나쁜 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기꾼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중국사람이나 조선족 동포를 혹은 모든 한국사람을 경계하고 의심하고 무시하는 건 옳지 않다고 본다. 한중수교 30년 동안 나는 수백 수천 명의 한국사람들을 상대해 왔지만 대부분 한국사람들은 정직하고 친절하고 신뢰할 수 있는 좋은 분들이었고 내가 알고 지낸 중국동포들도 대부분이 선량하고 착한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