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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리아호빗 Nov 14. 2023

매번 참관 수업을 못 가서 미안해.

한부모 가정의 어쩔 수 없는 현실.

 오늘도 딸아이가 아침밥을 먹으며 물어본다. 참관수업에 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엄빠인 나는 참관수업을 한 번도 참여해 보지를 못했다. 외벌이로 살아야 하는 부모로서 현실적인 부분에서 제일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금전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아빠? 못 가는 거 알면서..”

“응...... 흠.... 알았어!”

잠시 서운한 듯 작은 한숨을 쉬다가 이내 기운차게 대답을 한다. 아마도 못 가는 이유를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대화가 오고 가는 아침 밥상은 분위기가 좋지 않다. 아들도 누나와 아빠의 눈치를 보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밥을 먹는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인다.   

   

 아들이 1학년, 딸아이가 3학년 때 아내가 떠난 이후로 아이들의 학교 생활에 대해 생각할 때면, 일 때문에 학교에서 하는 행사나, 참여 수업 등 한 번도 못해주어서 미안한 마음뿐이다. 이런 참여 학습등, 참관 수업에 못 오는 것에 대해 아이들이 처음 서운해서 울면서 이야기할 때가 기억이 난다. 그럴 때면 미안하지만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 

“전에 살던 그 조그만 아파트로 돌아가고 싶어?”

“아.. 니요...”

“그렇지? 지금 여기 넓은 아파트에서 살기 위해 돈이 얼마나 드는지 모르지?”

“얼마나 들어요?”

“우리가 숨만 쉬어도 xxx만원이 들어.”

“헉... 그래요?”

“그거 엄마랑 아빠가 같이 벌어서 유지하던 것인데, 이제는 아빠 혼자서 해결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학교 찾아갈 수 있는 시간이 없어. 알겠어?”

“..............”

아이들이 이런 것들에 대해 이해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몸으로 자신들도 느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은 30평대 넓은 아파트에서 태어났다. 아내와 둘이 원룸에서 시작한 우리는 직장도 옮기고, 아끼고 노력해서 딸아이의 출산하기 직전에 새로 분양한 아파트에 입주를 했다. 그래서 아이들의 유치원 생활은 화장실 2개가 기본인 아파트 생활이 당연한 줄 알고 자랐다. 그런데 짧게 말해 친인척 어른의 사기로 인해 큰 빛을 지게 되어 아주 작은 소형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었다. 그때 이사를 하면서 그 작은 아파트에 들어설 때 아이들의 울면서 하는 말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빠.. 다시 집으로 가자... 응?”

“얼른 다시 집에 가자..!”

두 아이의 울면서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도 울면서 꼭 다시 돌아간다.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때의 아내가 나에게 정말 큰 힘이 되었다. 다른 여자 같았다면 아마도 도망갔을 거라고 다독이던 친구들의 말들.. 그런 아내와 함께 우리는 2년마다 이사를 하면서 다시 열심히 살아왔다.      


 그리고 6년 만에 드디어 아내가 그렇게 원하던 곳의, 학군과 교통이 좋은 곳의 30평대 아파트를 연식이 좀 되었지만 구입하고 인테리어까지 공사를 하고 이사를 했다. 그런 모든 경험을 같이 겪은 아이들이기에... 아이들에게 제일 무서운 말은 바로...

“다시 그때 그 아파트로 돌아갈래?” 


 자신들도 같이 이사를 여러 번 다니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집에서의 생활을 겪어 보았고, 지금의 보금자리에서의 생활이 너무나 마음에 들기 때문에 이 말을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냉정하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렇게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이들이 그저 혹여 아빠가 참여 학습에 올 수 있을까 하고 형식상 질문을 할 뿐 서운해하거나 하지 않고, 엄빠의 상황을 이해해 주는 듯하다. 그래서 아이들이 기특하기도 하면서, 미안한 감정이 들어 버린다.   

   

 아무리 현실적인 금전적 부분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아이들의 기억 속에 돈만 벌어오는 아빠로 남을까 봐 걱정이 되기도 한다. 나름 주말에 함께 하려고 하지만, 점점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 텐데, 나는 아이들에게 무심했던 엄빠로 기억이 되지는 않을까...? 또 나는 불필요한 생각을 끊임없이 하는 것 같다.        

   

 나의 아이들을 만족시켰다는 만족감에 살아갈 것인가..? 아이들에게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에 괴로워할 것인가..? 그 기준은 또 어디 있는 것인가..? 모르겠다.      



 그저 지금은 날씨의 괴롭힘을 막아줄 수 있는 집과 밥을 굶지 않게 해주는 것. 학교를 보낼 수 있는 엄빠로서 살아갈 뿐이다. 너무 잘해주려는 욕심은 오히려 괴로움을 만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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