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솔직하고 진심 어린 답변
*이 글은 어제 새벽 한 독자이자, 강의도 참석하셨던 분의 이메일을 받고 써 내려간
저의 두서없는 글입니다.
난 아주 어려서부터 꿈이 있었다. 그건, 동시통역사가 되는 거였다.
어린 시절 그게 뭐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했지만, 늘 내게 '영어를 참 잘한다'고 말하던 사람들은 모두 내가 동시통역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고, 막연히 나는 그걸 꿈꾸게 되었다.
그렇게 온순하고 순응하는 삶을 살던 내가 뒤늦은 사춘기를 맞이하고 심각하게 인생에 대해, '내 인생'에 대해 고민하던 어느 날, 나는 남이 정해놓은 길(동시통역사가 되는 것을 포함하는)을 따라 살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곤, 오래지 않아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 고2 때 문과와 이과를 정해야 하는 순간에, 집에서 엄마와는 문과로 가겠다고 해 놓고선, 학교에서 그 결정을 제출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과로 냈던 거였다. 물론, 나중에 이과 수업을 조금 듣고서는 내가 큰 실수를 했다는 걸 알았지만, 물리과목담당이자 나를 너무 예뻐하여 다른 반에서 다른 아이와 바꾸기까지 하며 자신의 반에 데리고 온 나를, 담임은 절대! 문과로 보내주지 않았고, 그때부터 내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다.
적어도 그때는 왜 내게 그런 일련의 일들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게 다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고 세상과 삶을 저주하고 냉소했으며, 자조적을 넘어 자포자기 하기도 했다. (이제서야 내 힘든 과거의 많은 일들이 다만 유명한 점쟁이의 예언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만들기 위한 필연의 과정이었겠구나 하고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어쩌다 영어를 전공하게 되었고, 어서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었던 나는 대입이 끝난 순간부터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무런 학위도 경력도 없던 나는 제일 처음 입시학원에서, 그러다 관광영어, 호텔영어를 가르쳤고, 대학교 3학년인가 4학년 중반이 되었을 땐 신문의 전면에 크게 났던 광고를 보곤 겁도 없이, 스웨덴 학원의 한국 지점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그곳은 무려 5개 국어를 가르치는, 동네 학원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맥킨토시가 20대 정도 있었으며, 원어민 강사만 10여 명에 이르렀고, 한국인 강사들도 모두 테솔과 언어학 석박사 소지자들이었다. 그런 엄청난 곳에 나는 당당하게, 아니 오히려 당돌하게가 맞겠다, 들어가 원장을 찾았고, 겨우 가진 것이라곤 토익 점수와 보잘것없이 짧은 경력밖에 없었지만, 믿져도 적어도 경험은 남는다는 옹골찬 생각으로 "실망시키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믿고 기회를 한 번만 주십시오...."라고 했고, 그런 내 패기를 좋게 본 원장님은 자리가 벌써 다 찼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채용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렇게 토플의 ㅌ자 만큼도 공부해본 적 없던 내가, 스카이 대학의 동갑내기, 언니, 오빠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딱 3일! 앞서 공부를 해 가면서 말이다. 내 자신만만함과는 거리가 멀게 3개월 후 그 수업은 폐강이 되었고, 자비로우신 원장님은 내게 다시 토익을 맡기셨다. 토익을 시작으로 나는 회화, 문법, 발음, 스크린 영어, 타임지 등 닥치는 대로 가르치게 되었고 나름 인기 있는 대표 강사 중 한 명이 되었다.
내 당돌하고 무식하게 용감했던 젊은 날 이야기 더 자세히 읽기
그때의 학생들 중에는 아직도 내게 연락하는 학생들이 몇 있다. 그들은 나를 정말 진정한 멘토로 생각하기도 하고, 훌륭한 선생님으로 기억하기도 한다. 하지만, 난 그들에게 너무 죄송하다, 그때의 나는 그다지 훌륭한 선생이 아니었으므로. 내게 그 일은 그냥 쉬운 돈벌이에 지나지 않았고, 그 일에 내 평생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졸업 얼마 후, 나는 내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되었고, 창밖에 비도 쓸쓸히 내리던 어느 날, (중요한 날의 기억은 항상 이런 식이다. 물론, 내 결정을 더욱 드라매틱하게 각인하기 위해 내 기억이 만들어낸 허상일지는 알 길이 없다.) 커피를 마시다 (이것도 실은 차였는지 물이었는지 기억이 없지만, 항상 커피라고 말하다 보니 이젠 진짜 커피 향이 느껴지는 듯도 하다.) 불현듯 이 일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다음날 (이것도 실제로는 그 담주였는지, 월말이었는지 모른다. 그냥 나는 늘 그 바로 다음 날이라고 한다. 그래야 기억 속의 내가 더 멋지게 살아나니까.) 나는 실제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물론, 그건 무기한 휴가로 변경 처리되긴 했지만.
그리곤 홀로 배낭여행을 한동안 다녔고, 몇 년 뒤 어쩌다 보니 절대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던 호주에 갑작스레 가서, 오랫동안 살게 되었다. (참으로, 인생이란 맘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
그곳에서 다시 구직을 하게 되었을 때, 정말이지 나는 또다시 '선생님'은 안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짧은 내 직업 평생 영어선생밖에 한 게 없었던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게 언어를 가르치는 일 말고는 없었다. 나름 충격이었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라에선 내가 '평범'에도 못 미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은. 하지만, 꿋꿋이 여러 군데 공무원 직에 이력서를 냈고 보기 좋게 (아니다, 보기가 너무 나빴다, 실은 보기만 나쁜 게 아니었다. 마음도 많이 아팠다.) 족족 다 떨어졌다. 경력이 부족함, 시민권이 없음, 이미 공무원인 사람을 원함, 일 순위 대기로 올라감... 별별 이유로 나는 다 떨어졌고, 결국엔 '어쩔 수 없이' 언어를 가르치는 곳에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곳도, 영어를 가르치는 곳도. 그리고 신기하리만치 단방에 다 붙었다. 결국 나는 생계를 위해 다시 영어와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지만, 그런 매일매일이 그렇게 보람되거나 즐겁지 않았다.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어쩔 수 없이 다시 하고 있는 나도 너무 싫었고...
그렇게 대학의 유학생/이민자 과정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내 삶의 일부로 자연스러워진 어느 날, 내가 하는 일을 정말 진지하게, 다시 돌아볼 계기가 생겼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과 반년 간의 수업을 마치고, 인터뷰를 하고 마지막 인사 등을 하는 날이었다. 태국의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고, 꿈이 MBA를 마친 후 사업을 하고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것이라고 했던 한 20대의 학생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단 한 번도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꾼 적이 없다. 그리고 근래까지도 그랬다. 솔직히 선생님이 그렇게 대단한 직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당신을 만나고 한 사람의 선생이 또 다른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내가 이제 MBA를 포기하겠다는 말은 아니지만, 선생님이 되는 것도 정말 멋진 일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덕분에 태국에 돌아가 선생님이 되는 것도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있다. 정말 당신을 만난 것이 행운이고 감사하다...'
그날 나는 울었다. 그날을 상기하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며 기억을 쓰고 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선생님이란 나의 직업을 더 이상 싫어했던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훌륭한 선생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없다. 항상 노력은 했으나 역량이 부족하다 느꼈고, 그래서 더 노력해야 했고, 어떨 땐 그렇게 채워도 채워도 비어있는 내가 너무 싫었다.
몇 년 전 한국에 다시 돌아온 후로, 나는 기성세대로서의 책임감 같은 걸 느끼기 시작했다. 병들어 아프고 뒤틀린 사회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에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다 돈 몇 푼 기부하기 시작하면서 그걸로 위안을 삼았다. 나는 사회로부터 완전히 등 돌리고 못 본 척하고 있지는 않다고, 사회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하지만, 내 양심이 소리쳤다. 바른대로 말하라고... 실은 '니'가 하고 있는 게 뭐냐고, 진정 '니'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느냐고... 그러다, 어느 책에서 읽은 글귀가 나를 후려쳤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적어도 중립은 지킨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건 '조용히' 동조하는 것이다.' 그건 여태껏 줄곧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괴롭히기도 하고, 지탱해주기도 하며, 이끌기도 한다.
그래서, 이것저것 해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가 하고 싶었던 내 속에 있었던 얘기부터, 그러다 점점 막연히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이야기를, 그러다가는 좀 더 구체적인 타깃에게 글로 강의로 전달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은 모르거나 어려워하는 내가 가진 지식과 생각을.
그런 나는 여전히 거의 매일을 유혹에 시달린다.
'왜 쉽게 돈 벌 수 있는 방법을 거부하느냐?', '그런다고 사회가 바뀌냐?', '돈을 먼저 벌어놓고 그 돈으로 사회에 좋은 일하면 된다.', '너가 돈을 많이 벌면 너 덕분에 주위 사람들도 훨씬 편해질 수 있다.', '돈에 덜 고파봐서 그것에 대한 절실함이 부족하다', '정말 바보 같다, 왜 그렇게 사는지', '너가 생각하는 만큼 사람들은 니 말을 별로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 그렇게 착하게만 사냐, 제 실속도 차려야지.'라는 말들과 동시에 꽤 큰 돈을 벌 수 있는 많은 제의를 끊임없이 받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내 소신을 어느 정도는 버텨낼 수 있는 이유는 내 결정을 절대적으로 지지해주는 남편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항상 그는 '너를 믿는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 물론, 지금보다 우리가 더 윤택해질 수도 있겠지만 진짜 광택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나는 것이다.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너의 마음이 정말 풍족해지는 일을 해라...'
내가 매일 스스로에게 되뇌는 챈트 같은 게 있다.
'나는 반드시 대한민국 국민이 영어 발음으로, 불필요하게 스트레스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노력하는 나지만, 요즘은 조금은 타협하기로 했다:
돈이 많은 사람이나 단체로부터는 돈을 많이 받자.
그러나, 돈이 없어서 못하는 사람에게서는 최소한, 혹은 아예 받지 말자.
동시에, 돈이 충분히 있으나 나를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에게는 절대 이용 당하지도 말자.
이렇게 요즘 나는 적절히 세상과, 또 나의 이상과 타협을 하며 언젠간 크게 흔들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부여잡은 양손이 자꾸 미끄러지려고 하는 것도 같았다.
그러던 내가, 또 한 번 눈물을 쏟게 해 준 고마운 글이 있다.
바로, 지난 토요일 강의를 마친 후, 어제 저녁에 날아든 따끈한 이메일이다.
미리 상의도 하지 않았지만,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리라 간절히 바라며, 그 메일의 일부를 내 마음대로 공개한다.
........
저에게 그 수업은 막막한 영어공부의 출발점이 어디인지, 아니 앎의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시간이었어요.
......저는 요즘 이민을 고려하면서 마음에 바람이 열두 방향으로 부는 기분이예요, 하지만 선생님과 삶의 즐거움을 만들어가는 분들을 뵙고 나니 이민과 앞으로의 삶을 고민할게 아니라, 제가 원하는 삶이 뭐였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건 세상에서 제일 따뜻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걸 보여주셨어요.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대가 없이 진심을 담아 눈을 마주쳐가며 가르쳐주시고, 시간을 할애해 들어주시고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나는 돌아온 한국에서의, 짧다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나의 앎을 나누고 싶어하긴 했지만, 다시 '선생님'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정말로!
그런데, 오늘 밤 잠이 오지 않아 열어본 메일함에서 이 글을 읽고, 나는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어 밤을 꼬박 새웠다.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도 없었다. 얼마나 내가 감사하는지, 이 글이 내게 어떤 의미로 남을 것인지 꼭 알려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줄줄이 두서없이 쓰긴 했지만, 이건 내가 그분께 드리는 일종의 답장이기도 하고 나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하다.
'나는 앞으로 평생 선생님이길 멈추지 않을 것이며, 선생님인 것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며, 기성세대로서의 책임을 회피하지도 않을 것이며, 유혹에 조금은 더 강해지고, 반드시 한국인이 영어 발음때문에 너무 많이 힘들어하지 않아도 될 수 있기를 위해 꾸준히 노력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님 (이름을 쓰고 싶지만 허락 없이 올리는 글이라...), 정말 진심이 제 안에서 크게 울려 퍼지는 소중한 글 평생 간직하며 때때로 꺼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연이 항상 동그라미재단에서 있는 이유와 후기 읽으러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