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주기용 독서가 뭐 어때서?
공영방송에 나온 소설가 황석영이 한 말이다. 과시적으로 책을 읽더라도 디올백을 드는 것보다 낫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이날 방송의 주제는 '텍스트힙'이었다. '텍스트힙'이란 '문자(Text)'와 '멋지다'라는 뜻의 '힙(Hip)하다'가 합쳐진 신조어이다.
나는 17년 차 국어 강사로서 6년간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블로그에 1300권 넘게 책 리뷰를 작성하며 독서 이력을 뽐내 왔고 책탑 사진을 공유하기를 좋아한다.
초등학생 때부터 도서관에 드나들었고 고등학생 때 책을 많이 읽어 교육감 표창도 받았다. 모 전자책 플랫폼에서 에디터와 북마스터로도 활동했다. 이만하면 책에 진심인데 북튜버나 북스타그래머로 활동은 못하고 있다. 시도를 안 해 본 건 아니다. 콘텐츠를 만들었지만 반응이 미미하여 중단했다. 어떡하면 북 인플루언서가 되는 걸까? 나보다 책도 많이 읽지 않은 사람이(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책 광고를 찍거나 조회수 높은 콘텐츠로 주목 받으면 배가 아프다. 대체 책에 얼마나 진심이어야 하는 걸까? 나는 언제까지 자기만족용 콘텐츠를 올려야 하는 걸까?
더는 안되겠다 싶어서 브런치에 글을 쓴다. 어떤 책부터 읽어야 하는지 모를 사람들을 위해 있어 보이는 책을 추천하고 정리해 주는 콘텐츠를 올릴 것이다. 과시적으로라도 책을 읽고 싶은 예비 독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텍스트힙 현상이 SNS 이용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SNS 플랫폼 게시글을 분석해 볼 것이다. 읽지도 않을 책을 샀다며 자랑하기 바쁜 사람들이나 별다방에서 책 표지만 열심히 찍고 다 읽은 척 포스팅하는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라는 옛말이 있듯이 남들이 다 보는 책 같아서 억지로라도 편 책이 당신의 인생을 바꿀지도 모를 일이다. 지하철에서 책을 펴 보는 사람들이 너무 없어서 어쩌다 책을 보는 사람을 만나면 동지를 만난 기쁨에 반가워하다가도 묘한 경쟁심리('당신만 책 읽는 거 아니야. 나도 책 좀 읽을 줄 안다구!')가 발동하여 책을 읽는 나로서는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지적 사치와 허영이 대한민국의 독서 문화를 바꾸길 바라는 마음이다.
사람들은 왜 책탑을 쌓을까?
1. 책으로 놀이를 하기 위하여
2. 책을 많이 샀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하여
3. 사람들에게 추천해 줄 책들을 한번에 보여 주기 위하여
4. 다 읽지 못할 것을 뻔히 알지만 알고 있는 책이 많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
5. 책을 쌓아놓으면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마침내 책을 펴게 될 것이라 믿어서
당신은 어떤 답을 골랐는가? '책탑'을 구글링해 보니 위의 결과가 모두 나왔다. 어느 지자체에서 어린이날 행사로 책탑을 쌓았고, 어떤 사람은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책을 서점에서 골랐다는 인증샷을 남겼다. 추천 도서 목록을 탑처럼 쌓아놓은 사진에는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 읽어야 할 책' 등의 후킹 문구가 달려 있다. 책탑을 보며 '읽고 싶지만 읽기 싫은'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에는 믿지 못했지만 마침내 쌓아놓은 책탑을 다 읽었다는 후일담을 전한 이도 있었다.
인스타그램 해시태그로 책탑을 검색하면 요즘 읽고 있는 책을 소개하는 사람들이 많다. 동시다발적으로 읽는 사람들도 있다. 이를 '병렬 독서'라고 한다. 책 한 권을 다 읽어야 다른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놀랄 노'자이다. 전자책을 읽다가 종이책을 번갈아 읽기도 하는 나로서는 병렬 독서가 오히려 독서의 깊이를 더한다고 생각한다. 분야가 다른 책을 읽으면 어떠랴.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엮는 움직임을 '통섭(統攝, Consilience)'이라고 한다. 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되는 게 통섭의 원리를 따르는 중이라고 생각하라. 이것저것 읽은 바람에 내용이 하나도 기억 안 날까봐 걱정하지 마라. 기록하면서 읽으면 된다. 책 읽기도 바쁜데 언제 글을 쓰냐고? 사진 찍어서 나만의 글로 저장해 두면 된다. 이것도 귀찮으면 어차피 한 권씩 읽어도 시간 지나면 내용이 잊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라. 까먹는 게 정상이라는 합리화를 해도 그만이다. 안 읽는 것보다는 백 배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