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원주 출장이 있는 날이었다. 밤사이 눈이 새하얗게 덮인 산들을 배경 삼아 드라이브할 생각에 아침부터 마음이 설렜다. 오랜만에 춘천 톨게이트를 통과해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대룡산의 새하얀 설경이 눈에 들어왔고, 카오디오에서는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 곡 캐논 변주곡이 흘러나왔다. 눈과 귀가 즐거운 완벽한 출발이었다.
캐논 변주곡이 끝나갈 즈음 지금 내리는 눈인지, 아니면 바람에 날리는 어제 쌓인 눈인지 흩날리는 흰 가루가 깨끗했던 유리창을 가렸다. 쌩쌩 달리는 차들이 내 곁을 지날 때마다 밤사이 오가는 차들이 남겨 놓은 먼지들이 눈과 뒤섞여 유리창에 달라붙었다. 금세 앞유리 뒷유리 할 것 없이 뿌옇게 변했다. 추운 밖에서 따뜻한 방 안으로 들어왔을 때 안경에 김이 서리듯. 워셔액세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윙" 소리가 들리며 와이퍼가 분주하게 왼쪽 오른쪽으로 왔다 갔다 했는데 나와야 할 녀석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띵" 하는 소리와 함께 경고 메시지가 화면에 떴다.
"워셔액 부족"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 60km, 남은 시간은 약 1시간. 이런, 아직 갈 길이 먼데…. 큰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워셔액 샤워를 하지 못한 뒷유리는 완전히 가려졌다. 그나마 앞 유리는 사정이 좀 나았다. 앞 차가 달리면서 두고 간 먼지 얼음이 녹아 물방울이 맺힐 때 한 번씩 와이퍼를 움직여 뿌연 시야를 걷어냈다. 달리는 내내 끊임없이 흘러나오던 음악 소리도, 달리는 차 주위로 펼쳐진 설경도 나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앞만 보고 달렸다. 짐을 가득 싣고 캠핑장으로 떠나는 것처럼 위태롭게 차를 몰아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별 탈 없이 도착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출장지에서 듣는 연수가 귀에 쏙쏙 들어왔을 리가 없었다. 마음은 온통 워셔액에 가 있었다. 연수를 마치면 주유소에 들러 주유를 하고 워셔액을 하나 사서 넣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출발할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기다림은 실패로 끝을 맺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아까 올 때와 마찬가지로 뿌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위태로운 운전을 했다. 작은 워셔액 한 통을 미리 챙겨두지 못한 죄. 하루 종일 마음을 옥죄던 불안감은 결코 잊기 힘들 것 같다.
집에 돌아와 아이들을 재워 두고 마트로 향했다. 카트에 워셔액 두 통, 그리고 맥주를 담았다. 조금은 늦었지만 나와 아내의 안전 운전, 그리고 무사히 가족 품으로 돌아옴을 자축하기 위한 작은 선물이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에게, 내일 아침이 밝으면 차에 워셔액이 충분하게 있는지 확인해 보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워셔액을 채워 두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겨울철에는 트렁크에 워셔액 한 통쯤은 여유 있게 넣어 두시기를 바란다. 행복한 하루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