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믿음이 머무는 동네로
믿음이 머무는 동네
<이번편은 조금 깁니다>
부모는 그날 미사에서 느꼈던 이상한 감정과 여운을 쉽사리 떨쳐낼 수 없었다. 성당 안에서 들었던 침묵, 낯설고도 아름다운 성가대의 노래, 그리고 신부님이 말했던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는 마음 깊은 곳에 작은 울림처럼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설명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던 두 사람은 며칠을 아무 말도 없이 지냈다. 그러나 아이들은 달랐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자연스럽게 매일 밤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자리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부모였지만, 어느 날 밤 우연히 마주한 그 장면은 쉽게 시선을 거둘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 늦은 저녁, 엄마는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이안의 방 문틈 사이로 작고 고요한 불빛을 발견했다. 다가가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보니, 두 아이가 삽자고상을 앞에 두고 촛불을 켠 채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형은 차분한 목소리로 기도를 이어가고 있었고, 동생은 그 말을 따라 조심스럽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안의 손끝에서 묵주알이 한 알 한 알 굴러가고 있는 모습이 엄마의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엄마는 그 광경을 몇 분이나 바라보다가, 문을 닫지 않고 조용히 돌아섰다. 그 장면이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잊고 지낸 어떤 풍경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일요일 아침이었다. 엄마는 주방 창가에 서서 조용히 두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늘 그렇듯 이안과 에린은 일찍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가방 하나 없이 문 앞에 서 있었다. 특별한 외출 준비도 아니었고,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모습도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진 약속에 나서는 사람들처럼 조용하고 당연한 표정으로 문을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엄마는 그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아니, 솔직히 두려웠다. 몇 주 전 몰래 따라갔던 그날 이후로 마음 한켠에서 무엇인가가 계속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에 남아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아이들이 신발을 신는 순간, 문득 멈춰 선 채 등을 보이며 물었다.
“…그게 그렇게… 좋은 거니?”
순간, 두 형제는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이안은 고개를 약간 돌려 엄마를 바라보았고, 에린은 신발을 신던 손을 멈춘 채 엄마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엄마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며 천천히 돌아섰다. 두 아이는 놀란 얼굴이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엄마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이들의 표정이 변했다. 이안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놀란 표정을 지었고, 에린은 작은 목소리로 조심 스럽게 물었다.
“우...우리 어디 가는 지 아...알아?”
엄마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에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럼 이제 우리 못 가게 하려고?”
“아니야. 그런 건 아니야.”
엄마는 손사래를 쳤다.
“그냥… 그게 뭐길래… 왜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지… 알고 싶어서.”
이안은 엄마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엄마, 아빠도… 그냥 같이 와봐.”
“뭐…?”
“같이 가자. 성당.”
그 말에 엄마는 당황했다.
“그게 그렇게… 좋은 거니?”
무심코 내뱉은 질문이었다. 그 순간, 에린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좋아! 진짜 좋아! 엄마, 아빠랑 같이 가고 싶어! 엄마, 우리랑 가자! 응? 제발! 응?”
아이는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리며 애타게 엄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안도 엄마 앞으로 다가서며 조용히 말했다.
“그냥… 한 번만 같이 가자. 응?”
“아니, 그게…”
“엄마, 부탁이야. 아빠!!”
이안은 애써 눈물을 참는 듯 입술을 떨며 속삭였다.
“우리랑… 같이 가….”
에린이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 아빠 우리랑 같이 가면 안 돼? 제발. 한 번만.”
엄마는 갈등했다. 그런 엄마의 손을 에린이 붙잡았다.
“엄마… 제발…”
아버지가 그때서야 주방으로 들어와 상황을 파악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에린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아버지를 향해 소리쳤다.
“아빠, 우리랑 같이 가자! 성당! 한 번만! 부탁이야!”
아버지는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아이들의 손을 꼭 쥐었다. 울음이 터지려는 이안의 떨리는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알았어. 갈게.”
아이들은 동시에 엄마를 껴안았다. 아버지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다가 이내 헛기침을 하며 작게 말했다.
“…같이 가자.”
그제야 두 아이는 흐느끼며 부모를 껴안았고, 네 사람은 현관 앞에서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꼭 붙잡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처음으로, 하나의 가족이 된 것처럼.
그다음 주일, 부모는 결국 아이들을 따라 다시 카르멘타운으로 향하게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기꺼운 발걸음은 아니었다. 아이들의 끈질긴 조름과 애원 끝에 마지못해 따라나선 길이었다. 성당으로 가는 길 동안에도 어머니는 내내 묵묵히 걸었고, 아버지는 이따금 아이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곤 했다.
성당 입구에 도착했을 때도 두 사람은 끝내 안으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듯 발을 멈췄지만, 이안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며 함께 들어가자고 했을 때 어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쉰 끝에 그 손을 붙잡았고, 아버지는 마치 도망칠 곳이 없다는 듯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네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부모는 신자들 틈에 섞이기를 두려워하듯 성당 구석, 눈에 띄지 않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처음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주위를 둘러보다가, 성가대의 노래가 시작되자 어머니는 살짝 움찔하며 손끝을 움켜쥐었고, 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천장 높은 곳에 걸린 십자가를 바라보며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그 공간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왠지 모를 긴장과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듯 보였다.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부모는 주변을 의식하듯 조심스럽게 앉아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성가대의 노래와 신부님의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집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있는 쪽을 힐끗거리며 눈치를 보던 어머니가, 차츰 강론이 깊어지자 고개를 숙이고 손끝을 어루만지며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가끔씩 강론 중에 신부님이 ‘사랑’이나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마다 아주 미세하게 숨을 고르는 모습이 보였다. 성가대가 마지막 곡을 부르던 순간,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녀는 자신이 왜 그런지 몰랐지만, 자꾸만 목이 메었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노랫말 하나하나가 자신을 향해 건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성가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고, 미사가 끝난 후에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날 부모는 자신도 모르게 강론을 기다리고 있었고, 성가대의 노래 한 구절 한 구절에 귀 기울이며, 그들이 그 공간 안에서 무언가에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마음 어딘가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미사가 끝나고 성당 문을 나선 뒤에도 부모는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성당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머니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예수님이… 우리도 기다리고 계셨던 걸까.”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그 말에 어머니는 당황한 듯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목소리는 아이들의 귀에도 분명히 들린 뒤였다.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성당 입구 앞 계단에 멈춰 섰고, 눈앞에 펼쳐진 성당 정면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왜 이렇게… 마음이 이상하지.”
그 한마디는 마치 오랫동안 닫아두었던 마음 안쪽에서 흘러나온 문장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표정은 혼란과 두려움,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따뜻함 사이 어딘가에서 맴돌고 있었고,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안과 에린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제 부모가 그들 곁에 와 있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말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날 이후, 가정 안에서도 변화는 조금씩 시작되었다. 이전까지는 각자의 자리에서 침묵 속에 식사를 하던 가족 식탁에서, 어머니가 먼저 아이들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일이 생겼다. 따뜻한 국을 국그릇에 덜어내던 어머니는 손을 멈추고 이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은… 어땠어?”
너무나도 평범한 그 질문이, 이안에게는 낯설게 들렸다. 그는 순간 젓가락을 멈추고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에린도 깜짝 놀란 듯 어머니를 바라보았고, 두 형제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웃었다.
그저 함께 밥을 먹으며 하루의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이, 처음으로 소중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어머니에게도,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버지에게도 천천히 전해졌다. 식탁 위에는 국물 냄새와 따뜻한 숨결, 그리고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대화의 기운이 조심스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늦은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도 가족들은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조용히 식탁에 앉아 있었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그 침묵은 이전의 무관심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침묵이었다. 서로의 기척을 느끼며 함께 머무는 데 익숙하지 않던 가족이었기에, 이 침묵이 어색하면서도 어느샌가 익숙해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식탁 위 식기들을 괜히 정돈하며 몇 번이나 손끝으로 포크를 옮겼고, 아버지는 팔짱을 낀 채 먼 곳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아이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용한 식탁 한가운데, 갑자기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그곳으로... 아예 가는 게 어때.”
너무나도 불쑥 나온 말이었다. 어머니는 순간 숨을 멈춘 채 남편을 바라보았다. 에린은 포크를 손에 든 채 멈춰버렸고, 이안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어머니가 겨우 입을 열었다.
“당신,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
그러나 아버지는 곧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매번 저길 오가는 것도 힘들고... 왠지 그 편이 더 나을 것 같아서.”
그 말이 끝나자 식탁 위로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전과는 달랐다. 이번엔,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 채 머물렀다.
어머니는 한동안 남편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포크를 내려놓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나도... 그래. 여긴 더 이상 우리 집 같지 않아.”
말을 마친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지난날의 피로와 체념,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편안한 어떤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 순간 이안과 에린은 숨을 삼키며 두 부모를 바라보았다.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 앉은 채 손을 꼭 쥐었고, 에린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으로 식탁 끝을 움켜쥔 채 부모의 말을 기다렸다. 아무 말 없는 침묵 끝에, 아버지가 아이들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말했다.
“카르멘타운으로... 이사하자.”
그 짧은 한마디가 집 안 공기 전체를 뒤흔들었다. 에린은 입술을 떨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
“정말? 진짜 가는 거야? 우리... 거기 가는 거야?”
이안은 차오르는 눈물을 억누르며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이미 촉촉히 젖어 있었다.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안은 에린의 손을 잡았고, 에린은 형의 손을 꼭 쥐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부모는 그 두 아이를 바라보며 묵묵히 앉아 있었고, 네 사람은 그렇게 작은 식탁 앞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긴 침묵 속에 머물렀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침묵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 속에서, 새로운 시작이 이미 조용히 결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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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삿짐을 싸는 날 아침, 집 안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평소 같으면 출근 준비로 분주하거나, 에린이 만화를 보며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을 거였다. 하지만 그날은 아니었다. 네 사람 모두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짐을 챙기고 있었다. 어머니는 열려 있는 옷장 앞에 서서, 낡은 옷걸이에 걸린 외투들을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야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끝이 옷자락에 닿고서야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차곡차곡 옷을 개어 가방에 넣으면서도, 어머니의 시선은 여전히 멍하게 한 점에 머물러 있었다.
반대편 방에서는 아버지가 오래된 공구함을 꺼내 낡은 책장을 해체하고 있었다. 나사가 오래되어 뻑뻑하게 돌아갔지만, 그는 묵묵히 드라이버를 돌렸다. 가구를 부수는 소리조차 그날 아침에는 묘하게 낮게 울렸다. 이안과 에린은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어색하게 부모를 바라보다가, 어느새 말없이 일어나 짐 싸는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이번엔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나섰다. 어른들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말로 설명할 수 없이 낯설고,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게 그 흐름에 발을 맞추고 싶었다. 이안은 무거운 책박스를 들고 어머니 쪽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 이건… 어떻게 할까?”
어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떼기까지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마침내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이 나왔다.
“필요한 것만 가져가자. 새로 시작하는 거니까.”
이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옆에서 들은 아버지가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그래… 새로 시작하자.”
그 말은 묘하게 방 안 공기를 다잡았다. 다들 같은 마음을 나눈 것 같았고, 그제야 짐을 싸는 손이 조금씩 더 빠르고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낡은 벽시계가 또각또각 울리는 소리, 박스가 채워지며 덜컥덜컥 내려앉는 소리, 그리고 간간이 들려오는 누군가의 짧은 한숨. 그 소리들이 서로 교차하며, 이삿날의 오전을 조용히 메워갔다.
짐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중, 에린은 조심스럽게 형 옆에 다가와 어깨를 툭 건드렸다. 이안이 고개를 돌리자, 에린은 작게 속삭이듯 물었다.
“형, 우리 진짜… 가는 거야?”
그 질문은 마치 마음속에 쌓여 있던 감정을 조심스레 꺼내는 듯한 말투였다. 에린은 며칠 전부터 이삿짐을 싸는 분위기 속에서도 어딘가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카르멘타운은 아직 어린 그에게는 잠깐 다녀온 특별한 동네일 뿐, ‘삶의 공간’이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먼 장소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처음 맛본 조용한 공기와 미사의 평온함은, 아직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작은 감정으로 남아 있었고, 오늘 이삿짐을 싼다는 사실은 그 감정을 현실로 바꾸고 있었다.
이안은 동생의 눈을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에린의 손에 잡혀 있던 작은 장난감 하나를 가볍게 건드리며 대답했다.
“응. 이제 거기가… 우리 동네야.”
이안의 말은 단순한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분명했다. 더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결심,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조용한 열망. 그 말을 들은 에린은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래, 좋아’라고 작게 대답하고 있는 듯했다.
바로 옆에서 조용히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어머니는 어느 순간 손을 멈추고 짐을 싸던 상자를 바라보다가, 눈시울이 조용히 붉어졌다. 눈물이 당장 흐르지는 않았지만, 그 조용한 감정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조금씩 번져갔다. 아버지는 가구 해체를 멈추고 잠시 허리를 펴며 방 안을 둘러보다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숨결 속에 담긴 감정은 가족 모두에게 전해지는 듯했다. 짐을 싸고 있던 그들의 손끝이 조금 느려졌고, 방 안의 공기는 잠시 동안 더욱 따뜻해졌다.
그 순간 그들은 단지 짐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시기를 조용히 접어가는 중이었다. 낡은 물건 사이로 손을 넣고, 필요한 것과 버릴 것을 가려내며, 그들은 마음속에 오래 묵은 감정과 기억도 함께 꺼내어 접고 있었다.
이삿짐을 하나둘 정리해 트럭에 실을 준비를 하던 그때, 아파트 거실 한가운데에서 박스를 정리하던 아버지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한 손에는 오래된 커피포트가 들려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미처 닫지 못한 박스 가장자리를 붙잡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오래도록 벽시계 위의 빈 벽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예전부터 걸려 있던 풍경화가 있었지만, 오늘 아침 일찍 떼어내어 이미 박스에 넣어둔 상태였다. 그 자리는 텅 비어 있었고, 나사 구멍만이 작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빈공간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그는 고개를 돌려 아파트 현관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낡은 전등 아래로 햇살이 스며드는 그곳은, 아이들이 어릴 적 비 오는 날마다 웅크려 앉아 우산을 펼치던 장소였다. 그런 기억들이 잠시 떠올랐던 걸까. 아버지의 입가에 짧은 한숨이 흘렀다. 그때 어머니가 조용히 다가와 그의 어깨 옆에 섰다.
그녀는 남편의 시선을 따라 조용히 벽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아버지는 대답 없이 한참을 서 있다가, 조금 늦게 말을 꺼냈다.
“그냥… 조금 아쉽네.”
그 말은 단순한 감상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이 집에서 보낸 수많은 시간과 감정, 그리고 정들었던 공간을 떠나는 데 대한 솔직한 마음이었다. 어머니는 말없이 그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가볍고 짧은 그 접촉은 마치 ‘괜찮아, 우리 함께니까’라는 위로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는 그 따뜻한 온기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창밖에서는 이삿짐 트럭이 출발을 준비하며 시동을 걸었다. 굵은 엔진 소리 속에서도, 집 안은 조용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집 안을 둘러본 가족은 각자의 마음속에 ‘잘 있었어’라는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그들은 문을 닫았다.
트럭에 짐을 다 실은 뒤, 아버지가 뒷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운전석 쪽으로 향했다. 그는 손바닥으로 바지를 한 번 털고는 손잡이를 잡았다가, 잠시 멈춰섰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아파트 건물 위쪽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살던 14층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창 너머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흔들리는 낡은 레이스 커튼만이 바람결에 살짝 움직이고 있었다.
그 풍경을 아버지는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거기엔 기쁨도, 아픔도, 고단한 하루들이 남아 있었다. 퇴근 후 넥타이를 풀며 창문을 바라봤던 날들, 아이들이 방 안에서 싸우다 말고 창문 너머의 하늘을 가리키며 웃던 목소리, 어머니가 빨래를 널며 창문 쪽으로 내던지던 한숨까지. 그 모든 시간이 그 흔들리는 커튼 하나에 다 담겨 있는 듯했다.
뒤늦게 다가온 어머니가 아버지 옆에 섰다. 그녀도 조용히 시선을 따라 창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왜 그래?”
아버지는 짧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냥… 마지막으로 한 번 보려고.”
그 대답에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어머니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괜찮아. 우린 잘 가고 있어.”
그 말에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아내의 손을 잡았다. 익숙했던 집과의 이별이 마냥 쉽지는 않았지만, 이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간다면, 그 모든 것이 다시 새로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트럭 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이안은 아버지를 향해 웃으며 물었다.
“아빠, 어디 앉아?”
아버지는 대답 대신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
“내 옆에 앉아라.”
이안은 대답 대신 활짝 웃으며 올라탔고, 에린은 어머니 손을 꼭 잡은 채 뒷자리에 올랐다. 그렇게 트럭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출발한 그 순간, 가족은 비로소 한 차 안에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모여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삶으로, 같은 방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가 도심을 벗어나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하나둘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안은 조수석에 앉아 시선을 창밖에 고정한 채 말을 아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복잡한 감정들로 일렁이고 있었다. 에린은 뒷좌석에서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형! 형! 저기 봐봐. 저기 강이지? 진짜 강이야?”
에린이 손가락으로 멀리 보이는 좁은 하천을 가리키며 외쳤다. 이안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마도. 작은 강 같아.”
에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옆자리에 앉은 어머니가 조용히 웃으며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끝엔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여유가 묻어 있었다. 아버지는 운전대를 부드럽게 잡은 채 앞만 보았지만, 어쩐지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이제 우리가 그 동네 사람 되는 거야,”
어머니가 말하자, 에린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정말? 진짜 우리도 이제 거기 살아?”
“응, 진짜로.”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신 대답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차 안은 적막하지 않았고, 오히려 따뜻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다 이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거기 가면… 다 달라.”
아버지가 그 말에 눈썹을 찌푸리며 흘긋 아들을 바라보았다.
“뭐가?”
이안은 여전히 창밖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공기가… 다르더라. 조용하고… 따뜻해.”
그 말에 어머니가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조용하고… 따뜻한 공기.”
그 말은 마치 기도 같았다. 창문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 사이사이로 스며들며, 가족의 마음을 조금씩 적셔갔다. 아버지는 운전대를 다시 한번 단단히 쥐며, 무겁지 않게 말했다.
“좋네. 그런 동네라면… 잘 왔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차 안에 앉아 있던 네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그 짧은 시선의 교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들은 지금,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따뜻했다.
트럭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낡은 건물들과 빨랫줄,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그 골목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이상하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바퀴가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덜컹거리며 멈춰섰을 때, 가족 네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아담한 크기의 단층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담장은 낮았고, 담 너머로 보이는 작은 정원엔 키 낮은 식물이 몇 포기 심어져 있었으며, 지붕 위로는 햇빛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집 앞의 초인종 옆에는 조그맣게 손글씨로 적힌 문패가 걸려 있었다. 문패 아래엔 이끼가 조금씩 자라고 있었고, 그 모습이 이상하게 정겨웠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에린이 입술을 앙 다문 채 물었다. 긴 시간 차 안에서 쏟아지던 에너지와는 달리, 이번엔 아주 조용한 목소리였다. 경외감인지, 낯설음인지 분간되지 않는 눈빛으로 에린은 그 집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한참을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 이제 여기가 우리 집이다.”
그 말은 선언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되뇌는 믿음의 고백 같았다. 뒤에서 그 말을 듣던 어머니는 조용히 손잡이를 열고 차에서 내려 서 있었다. 그녀는 마치 오래 전부터 이곳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낯설지 않은 표정으로 천천히 집 앞으로 걸어갔다. 이안은 조용히 동생의 손을 잡았다.
“같이 가자,” 하고 말하며 차에서 내렸다.
에린은 형의 손을 꼭 쥔 채, 한 발 한 발을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그들의 발소리가 골목 안에 작게 울렸다. 가족 네 사람은 그렇게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한 발걸음으로 새집 앞으로 다가갔다.
그 누구도 말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고요 속에 네 사람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집 앞, 아직 열지 않은 문을 바라보며 그들은 느꼈다. 이것이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선 가족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버지는 문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 동작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짧았지만, 가족 모두가 그 움직임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새로운 시작 앞에서 느끼는 조용한 망설임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곧 조용히 숨을 들이쉰 뒤, 다시 손을 올려 문을 천천히 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는 오래된 경첩 소리와 함께 어둡고 조용한 실내로 이어졌다. 아직 가구 하나 들어오지 않은 방들은 먼지 냄새와 함께 묘한 적막함을 품고 있었지만, 그 적막은 차가운 공포가 아닌, 누군가를 기다리는 공기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좀 썰렁하네.” 아버지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말 끝에 묻어난 긴장과 설렘이 묘하게 뒤섞인 말투였다.
“아직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이안이 대답하며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에린도 뒤따라 들어오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근데… 이상하게 안 무서워.”
아이의 목소리에는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어머니는 문을 닫고 난 뒤 조용히 말했다.
“이 집… 조용하다. 그런데… 살아 있는 것 같네.”
그녀는 손끝으로 벽지를 가만히 쓸며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 안 차가워.”
그 말에 모두가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비어 있는 집이 주는 기묘한 온기, 그것은 마치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처럼, 설명할 수 없지만 마음이 놓이는 느낌이었다. 네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이사라는 사건 너머에 그들이 정말 ‘도착’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짐을 풀기 시작한 건 오후 햇살이 거실을 비스듬히 채울 무렵이었다. 이안은 먼저 작은 박스를 열어 책들을 꺼내 책장에 가지런히 꽂기 시작했다. 익숙했던 책들이 새로운 공간 안에서 낯선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안은 그 낯섦을 오히려 반가워했다. 에린은 옷을 하나하나 접어 서랍에 넣었고, 어머니는 부엌에 들어가 식기를 정리했다. 아버지는 거실 벽에 삽자고상을 놓을 자리를 살피며 벽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여기 어때요?”
이안이 아버지를 불렀다. 거실 한쪽, 햇빛이 잘 드는 공간이었다. 아버지는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여기면 매일 기도할 때도 따뜻하겠다.”
이안과 에린은 함께 삽자고상을 조심스럽게 그 자리에 옮겼다. 손에 잡힌 나무 틀의 촉감이 괜히 뭉클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초를 올리고, 묵주를 그 앞에 올려두었다. 이안은 작게 중얼였다.
“여기가 이제 우리 기도 자리야.”
어머니는 식기 정리를 멈추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다가왔다. “참 이상하지…” 그녀는 삽자고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 집인데, 여긴 벌써 마음이 채워지는 것 같아.”
그 말에 에린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있어서 그런가 봐요. 여긴 우리가 사는 집이니까.”
아버지는 먼지를 털어낸 손으로 아이들의 머리를 차례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이제 진짜 시작이다.”
그 순간, 무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가족을 감싸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정돈되지 않은 새집이었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이미 정돈된 평화를 느끼고 있었다. 서로의 손끝과 눈빛, 조용히 전해지는 숨결 속에, 그들은 마침내 ‘가족’이라는 이름의 집에 도착한 듯했다.
그날 저녁, 네 사람은 처음으로 새집의 식탁에 둘러앉았다. 간단한 찬과 밥, 그리고 어머니가 부엌에서 급하게 끓인 국이 전부였지만, 누구도 음식의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다. 이전 집에서는 각자 식사를 따로 하거나, TV를 보며 무심히 숟가락을 들었던 기억이 많았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달랐다. 좁고 낡았지만 한 테이블에 둘러앉은 식사는 어딘지 모르게 따뜻했다.
“이거… 네가 좋아하던 습인데,”
어머니가 이안에게 건넸다. 이안은 고개를 숙여 국을 한 숟갈 떴다.
“응. 맛있어.”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멋쩍게 웃으며, 자신도 국을 한 숟갈 들었다. 에린은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으며 말했다.
“우리, 여기 오니까 말이 더 많아진 것 같아.”
“그러게 말이다,”
아버지가 조용히 응수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느렸지만, 그 안에 담긴 정은 분명했다.
“전에는… 이렇게 마주 보고 밥 먹은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네.”
식탁 위로 잠시 조용한 공기가 흐르고, 이안이 입을 열었다. “여기 오길 잘한 것 같아. 진짜로.”
어머니가 조용히 이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괜찮은 거니? 이 동네, 이 집, 이 변화가.”
그 말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조용하고, 다정하고… 우리랑 잘 어울려.”
에린도 씩 웃으며 따라 말했다.
“여기선 하느님이 우리랑 같이 밥 먹는 것 같아.”
그 말에 모두가 잠시 웃었다.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식탁 위에 고요하고 따뜻한 여운을 남겼다. 작은 밥상 위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가족’이라는 이름을 되새기고 있었다. 기도 없이도 기도처럼, 침묵 없이도 기도만큼 따뜻한 저녁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에린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이안의 팔을 잡았다.
“형, 오늘도 기도할 거지?”
이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리고 물었다.
“그… 너희, 매일 그렇게 기도했었니?”
이안이 어머니 쪽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응. 우리 방에서 매일 밤 했어. 그냥… 어느 날부터 그렇게 됐어.”
에린이 웃으며 거들었다.
“처음엔 형이 혼자 했는데, 나도 옆에서 구경하다가 같이 하고 싶어졌어. 묵주도 따로 받았고!”
그 말에 아버지가 조용히 웃으며 물었다.
“그럼 오늘도, 그 기도… 할 거냐?”
“응,” 이안이 대답했다.
“오늘은 새집에서 처음 드리는 기도니까… 더 잘하고 싶어.”
어머니는 잠시 침묵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도 옆에서 봐도 돼?”
뜻밖의 제안에 이안과 에린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고, 아버지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네 사람은 집 안 가장 조용한 방으로 옮겨갔다. 불을 끄고 작은 스탠드 하나를 켜니, 방 안에 부드러운 노란빛이 퍼졌다. 이안이 조용히 촛불 하나를 켜고, 에린이 자기 묵주를 꺼내 형에게 건넸다.
“이건 내가 처음 받았던 거야. 오늘은 형이 이거로 해.”
이안은 동생의 마음이 담긴 묵주를 조심스레 받아 들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옆에 나란히 앉은 에린도 묵주를 들고, 그 곁에 어머니가 조용히 앉았다. 아버지는 잠시 문가에 서 있다가, 이내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누구 하나 말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온 가족이 같은 리듬 안에 있었다. 이안은 천천히 주님의 기도를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에린이 나직하게 뒤따랐고, 어머니는 따라 말하지는 않았지만,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아버지는 눈을 감고, 입술을 꼭 다물었다.
기도의 소리는 아주 작고 느렸지만, 그 안에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작은 묵주알이 손끝에서 굴러가는 소리, 그리고 형제의 중얼거림, 어머니의 숨결, 아버지의 긴장된 숨소리. 모두가 그 방 안을 채웠다.
그날 밤, 카르멘타운의 그 작은 새집에는 오래된 기도보다 더 깊고 진한 ‘처음의 기도’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도, 의무에서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서로의 곁에 함께 있고자 했던 마음들이, 한밤의 침묵 속에서 가장 따뜻한 소리로 피어난 것이었다.
일요일 아침, 카르멘타운의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투명한 하늘 아래, 골목길을 따라 네 식구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어머니는 작은 가방을 어깨에 둘렀고, 아버지는 손에 성경책을 들고 있었다. 그 사이, 이안은 오른손으로 아버지의 소매를 잡고 있었고, 왼손으론 에린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네 사람 사이에는 묵직하면서도 따뜻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가족이 함께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아침은 처음이었다. 그 길이 성당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안의 가슴을 더 조용히 뛰게 했다.
성당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마에 성호를 긋고 나서 숨을 들이쉬었다. 아버지도 뒤따라 조용히 성호를 그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이안은 부모의 그 모습을 보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성당 안은 이미 많은 신자들로 가득했다. 성가대석 앞에는 환한 촛불이 줄지어 켜져 있었고, 제대 위에는 하얀 제의(祭衣)를 입은 신부님이 천천히 등장하고 있었다.
온 가족은 빈자리를 찾아 조용히 나란히 앉았다. 성가대의 첫 찬송이 울려 퍼졌다. 하모니처럼 어우러지는 목소리들이 높은 천장을 타고 퍼지며 성당 전체를 감싸 안았다. 이안은 처음으로 부모가 옆에 앉아 있는 상태로 찬송을 듣고 있다는 사실에 이상할 정도로 편안함을 느꼈다. 에린은 두 손을 모아 눈을 감고 있었고, 어머니는 입을 조금 벌린 채 성가에 따라 흥얼거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똑바로 앞을 바라보며, 어쩐지 평소보다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미사의 중반쯤, 신부님이 제대 앞으로 나서며 설교를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천천히, 하지만 단호하게 울려 퍼졌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 오늘 이 가정에게 축복을 주셨습니다. 기도하는 가정은, 이미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찬송하며, 함께 미사에 참여하는 그 순간, 그 가정은 하느님의 품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머니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고, 아버지는 입술을 다물고 눈을 감았다. 이안은 옆에 앉은 동생을 바라보며 손을 꼭 쥐었다. 에린도 형의 손을 꼭 잡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사가 끝날 무렵, 신부님의 마지막 축복이 성당 안에 울려 퍼졌다.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신자들이 “또한 사제와 함께.”라고 대답하며 일어섰다.
그 순간, 가족 네 사람은 조용히 일어섰고, 서로의 손을 다시 잡았다. 성당 문을 나서는 그들의 손은 처음보다 더 단단히 맞잡혀 있었다.
성당 앞마당에 섰을 때, 종탑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맑고 둥근 종소리는 하늘을 가르며 울려 퍼졌고, 파란 하늘은 그 소리를 가득 담아냈다. 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종탑을 바라보았고, 어머니는 눈을 가늘게 뜨며 햇살 속에서 미소 지었다.
그 순간, 이안은 옆에 있는 가족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이건 그냥 성당에서의 미사가 아니라, 함께하는 ‘믿음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오늘부터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조용히 싹터오고 있었음을 이안은 느낄 수 있었다.
미사가 끝난 뒤, 가족은 성당 앞에서 따뜻한 인사를 나누었다. 어머니는 신부님에게 고개 숙여 감사를 전했고, 아버지는 처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성당 신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이들은 예전처럼 앞장서지 않고, 부모와 보조를 맞추며 천천히 걸었다. 이안은 마당 끝자락에서 뒤를 돌아 성당을 한 번 바라보았다. 하얀 십자가 위로 빛이 내리쬐고 있었고, 그 아래 서 있는 가족의 모습은 마치 오랜 시간 함께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날 오후, 이안은 마을 끝에 있는 제일 높은 언덕으로 향했다. 카르멘타운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위, 그는 단단한 돌이 깔린 좁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발밑에서는 작은 자갈이 사그락거렸고, 위로는 바람이 잔잔하게 불어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언덕 위에 도착했을 때, 그는 숨을 고르며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았다.
멀리, 저편에 루멘시티가 보였다. 희뿌연 하늘 아래 빽빽하게 들어선 회색 건물들, 붉고 푸른 광고판들, 미동도 없는 유리창들.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을 그 도시가, 이안의 눈에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게 느껴졌다. 그는 잠시 숨을 멈춘 채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기 있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말은 바람에 섞여 날아갔지만, 마음엔 또렷하게 남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묵주를 꺼내 손에 쥐었다. 바람에 날리는 묵주의 십자가는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안은 고개를 들었다. 카르멘타운의 하늘은 여전히 맑았고, 발밑엔 따뜻한 흙이 있었다. 그 언덕 위에서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이제는 자신만의 신앙이 생겼고, 함께 기도할 가족이 있었으며, 자신이 품은 바람까지도 하느님께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 순간, 마을 어딘가에서 성당의 종소리가 울렸다. 멀리서 들리는 그 맑은 소리는 언덕 위까지 닿았고, 이안의 얼굴엔 천천히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언덕 아래로 향했다.
그의 걸음 뒤로는 바람이 지나가고, 하늘은 조용히 기도를 닮은 빛으로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