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공황장애 환자의 과거7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서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난한 사랑 노래-신경림
나는 한 번도 금전적으로 유복해 본 적이 없다. 나는 항상 가난했다. 때는 2014년이었다. 7살인 5촌 조카에게 무슨 과일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조카는 '세부에서 망고를 먹었는데 망고가 참 맛있었다. 나는 망고가 좋다.'라고 했다. 그 말은 들은 나는 집에서 울었다. 나는 망고를 먹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나에게 과일은 사치품이었고 기호식품이었다. 누군가는 누렸을 것을 나는 못 누린다는 사실이 너무나 슬퍼서 펑펑 울었다. 그러고 얼마 있다가 대형마트에서 상하기 일보직전인 망고를 한 알에 3천 원 정도를 주고 사서 먹어봤다. 정말 맛있어서 또 울었다. 이 맛있는 걸 나는 모르고 지냈기 때문이었다.
돈이 없다는 것은 막연하게 넓지 않은 집에서 사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가난은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누리지 못하게 하고, 사람의 세상을 좁게 만들고, 그 좁은 세상의 이치마저 돈에 맞춰지게 만든다. 세상에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가장 쉬운 문제라고 한다. 그런데 그 돈마저 없다면, 그 가장 쉬운 문제들마저 해결할 수 없다. 부자라고 무조건 행복한 건 아니지만, 가난하면 행복하기가 더 힘들다.
나는 중, 고등학생 때 기억이 잘 없다. 항상 학교에 갔다가 집에 왔다. 나는 버스 탈 돈이 없어서 왕복 7킬로 정도 되는 거리의 학교에 걸어서 가고, 걸어서 왔다. 다른 아이들은 학원에도 가고, 간식도 사 먹는데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친구가 없었다. 스타킹을 기워 신는 나를 사람들은 비웃었다. 그때부터 나는 사람들이 무서웠던 것 같다. 다들 나를 비웃는 것 같았고 나는 저들처럼 될 수 없음이 불행했다. 큰 걸 바라는 게 아니었다. 문제집 사는데 걱정이 없으면 좋겠다, 버스를 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거실이 아니라 내 방에서 내 책상에서 공부를 하고 싶었다.
고등학생 때, 나는 한창 유행했던 인터넷 강의를 듣고 싶었다. 1월에 등록하면 10 강의를 30만 원에 들을 수 있는 프로모션이 있었는데 그걸 듣고 싶었다. 그걸 듣고 싶다고 했는데, 우리 집에는 아무도 인터넷 결제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느린 컴퓨터를 붙잡고 이걸 어찌 하나 했더니 아빠가 기어코 화를 냈고, 하지 말라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하고 싶다고 했더니, 학생이 벼슬인 줄 안다는 말이 되돌아왔다. 이렇게 내 학창 시절은 돈 때문에 불행했던 날들만 가득하다.
대학에 들어오니 사정은 더 악화됐다. 전공 서적이 한 학기에 50만 원, 100만 원씩 들었다. 나는 6년간 책값과 학비를 내기 위해서 하루도 아르바이트를 걸러본 적이 없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충당했고, 생활비와 책값은 내가 직접 벌어 냈다. 엄마 아빠는 등록금은 고사하고 내 책값을 내줄 능력조차 없었다.
공부를 꽤 잘했었기 때문에, 나는 쟁쟁한 친구들과 같이 수업을 들었다. 대부분의 동기들은 학비 걱정 없이 책값 걱정 없이 생활비 걱정 없이 친구들은 학교를 다녔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구들도 대부분 자신의 용돈을 더 벌고 싶어서 하는 친구들이었다.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서 항상 속상했다. 다들 바다에서 놀고 있는데, 나만 개천에서 벗어나고 싶어 아등바등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졸업을 하고, 절반 이상의 친구들이 석, 박사 과정을 하는데 반해 바로 일을 하러 갔다. 돈을 벌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돈을 벌기 시작했더니, 이젠 돈을 내놓으라는 연락이 왔다. 본인들은 노후 준비가 하나도 안되어 있으므로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돈을 벌면 가난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35살까지 가난하면 그것은 본인 책임이라고 말하는 경영인이 있었다. 그 사람에게도 나 같은 족쇄가 채워져 있었을까? 나는 아무리 돈을 벌고 공부해도 35살까지 이 족쇄를 벗어던지지 못할 것 같다. 부모님이 죽고 나면 벗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래도 항상 부모님께 잘하려고 했다. 저들도 저렇게 살고 싶어서 살까 싶은 마음이었다. 살아야 할 날이 살아온 날보다 짧은, 인생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은 저들을 어여삐 여겼다. 이제 병들고 아플 일만 남았을 텐데, 그들도 그런 자신이 얼마나 안타깝겠느냐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 아빠는 나를 좋아한다. 내가 보고 싶다고 하시고 언제 오는지 항상 궁금해하신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돈줄을 찾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부모님은 나에게 돈을 빨리 벌어라고 했고, 많이 벌어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본인들 호강을 시켜줘야 한다고 했다. 나를 그렇게 키워 놓고는, 이제 우리가 키웠으니 그대로 내놓으라고 했다. 집에 갈 때마다 돈을 달라고 하고, 차를 달라고 하고, 집을 달라고 했다. 이젠 다 컸으니 유복한 사람과 만나라고 하는 것은 덤이다.
나는 가난이 싫다. 가난이 싫어서 열심히 공부했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 태어난 것에 대해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덧없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 정도 동기부여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그만큼 나는 가난한 게 싫다. 모든 선택권이 돈으로 결정지어지는 삶이 더 이상은 싫다.
하지만 가난의 굴레는 너무나 두껍고 무거워 내가 벗어던지고 싶어도 벗어던질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개천에서 난 용이 되고 싶었지만, 결국엔 개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난이라는 죄를 지은 죄인으로 살고 있다. 아마도 이 죄의 형은 무기징역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