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와의 해외여행을 계획했다. 열심히 채찍질하면서 일한 우리를 위한 작은 선물이었다. 동남아 휴양지로 3박 5일의 일정을 두 달 전부터 계획했다.
그런데 나나 남자친구나 회사의 일이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바빠지기만 했다. 나는 여행 가기 2주일 전부터 잠들기 전에 꾸벅꾸벅 졸면서 호텔이며 현지 투어를 예약했다. 남자친구는 더 바빠서 주중에는 둘이서 안부 인사 외에는 대화를 하기가 힘들었다. 어느정도였느냐면,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면서도 남자친구는 한 달 새 살이 5kg가량 빠졌다.
나는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위약금을 조금 물면 괜찮으니, 너무 바쁘면 여행을 미뤄도 된다고 했다. 남자친구는 괜찮다고, 나중에도 바쁠 텐데 지금 가는 게 뭐 어떻겠느냐고 이야기했다. 여행을 가기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은 야근을 해야 했다. 푹 쉬고 싶고 즐기고 싶어서 비행기 티켓을 샀건만, 어째 더 큰 숙제로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몰아치는 일을 어느 정도 처리하고 사람들에게 공휴일을 끼워서 하루 휴가를 내고 놀러 다녀오겠다고 이야기했다. 놀러 가고 싶느냐고 한가하냐는 말이 돌아왔다. 기분은 나빴지만 뭐 내 논문에 진척이 없는 건 사실이니 별로 대꾸는 하지 않았다.
바빠서 휴양지에서 입을 예쁜 옷도 한 벌 쇼핑하지 못했다. 여름옷을 세탁해야 하는데 매일 10시, 11시에 집에 들어오니 아랫집에 눈치 보여 세탁기도 돌리지 못했다. 출발 당일 아침에 일어나 옷장에 넣어뒀던 여름옷을 손에 집히는 대로 세탁기에 넣어 쾌속코스로 돌린 뒤 건조기에 던져 넣었다. 점심시간에 집으로 와 건조기에서 옷을 꺼내 기내용 캐리어에 잔뜩 쑤셔 넣는 도중에 남자친구한테 카톡이 왔다.
나 내일 가도 돼? 알아서 갈게.
너무 놀라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일이 처리가 안된 게 있어서 못 갈 것 같다고 했다.
"다른 팀원들은? 많이 뭐라고 하셨어? 혼났어?"
하고 물어봤더니
"으응,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사무실이라서 금방 끊어야 할거 같아. 미안해."
"내가 몇 주 전부터 괜찮겠냐고 물어봤잖아. 내일은 진짜 올 수 있겠어? 비행기 표 바꿀 수 있는지 찾아볼게."
"응.."
라고 했다. 아무래도 처리가 안된 일을 내버려 두고 해외여행 간다고 하니 며칠 전부터 다른 팀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했었다. 그러다가 크게 불평불만을 들은 모양이었다. 잔뜩 주눅 든 강아지 같은 모습이 그려졌다.
비행기 표는 다행히도 차액과 수수료를 내고 변경이 가능했다. 저렴한 비행기표를 찾고 찾아서 예매했던 거라 변경하고 나니 25만 원가량이 더 나왔다. 남자친구의 비행기 편을 다음날로 변경하고 나는 공항으로 향했다.
놀랍게도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말이 수요일 저녁 출발 일요일 아침 도착이지, 체류하는 시간은 72시간 정도밖에 안 되는 짧은 여행인데, 48시간만 겨우 채워서 있겠다니, 쉬러 가는 건데 쉬지도 못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돈이 아깝기는 했지만, 본인이 제일 아쉽겠지 생각이 들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해서 수속을 다 끝마치고 나니 저녁 8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면세점에 들러서 인터넷으로 구입해 뒀던 카메라 필름과 같이 마시려고 했던 스파클링 와인 한 병, 물놀이 가서 신을 아쿠아슈즈를 받아왔다. 면세인도장에서 내려오니 편의점이 하나 보였다. 비행기에서 마실 물을 한 병 사려고 들어갔더니 한편에 컵라면이 잔뜩 쌓여있었다.
나는 컵라면을 딱히 찾아서 먹지 않는 편이다. 컵라면 특유의 과자 같은 느낌이 항상 낯설다. 면은 면다워야 한다는 나름의 철학인데, 남자친구는 컵라면을 참 좋아해서 컵라면 먹는걸 옆에서 몇 번씩 지켜보곤 했다. 음식점을 찾아보던 도중에 다양한 음식을 즐기는 관광지는 아닌 것 같다고, 둘 다 음식 때문에 힘들 수 있으니 컵라면을 몇 개 챙겨가자는 말에 남자친구는 현지 음식을 꼭 먹어야겠다고 본인은 챙기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가지고 가면 분명 좋아할 것 같아 편의점에서 컵라면 세 개와 물을 한 병 샀다.
밤 10시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에 겨우 퇴근한 남자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말 미안하다는 말만 연신 해댔다. 내일 일정을 망쳐서 미안하다고, 혼자 이 밤에 해외로 가게 해서 미안하다고, 일을 제때 끝내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
"여보세요?"
"..."
수화기 너머로 남자친구는 음소거를 한채 한참을 우는 듯했다. 남자친구를 만난 지 1,400일 만에 보는 눈물이었다. 내가 내 삶에는 쓸모가 없다고, 더 이상 삶을 겪고 싶지 않다며 목숨을 내던지려고 했을 때도 눈물을 보이진 않았었던 남자친구가 수화기 너머 울고 있었다.
나도 눈물이 핑 돌았지만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다. 나는 혼자가도 괜찮아. 내일은 어차피 새벽에 도착하는 일정이었어서 별다른 거 예약해 둔 거 없어. 혼자서 조심히 잘 다닐게. 비행기에 사람 많아서 괜찮을 거야. 먼저 도착해서 지형지물을 잘 파악하고 있을게 하고 대답 없는 수화기 너머로 재잘재잘 이야기했다.
필리핀에 도착하니 한국 시각은 새벽 3시였다. 남자친구는 그 시간까지 나를 기다렸다. 리조트에 짐을 한가득 풀고 문을 잘 걸어 잠그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남자친구는 잠이 들었다.
우습게도 새벽에 배가 너무 고파서 김치찌개 라면을 하나 뜯어서 먹었다. 야밤에 나가기엔 나도 간이 작아 가지고 있는 게 라면뿐이었다. 정말 맛있었다. 둘이서 넓고 좋은 데서 지내려고 좋은 객실을 예약해 뒀는데, 라면 후루룩 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 노트북을 켜고 만화영화를 틀었다. 자려고 침대에 누우니 라지킹 사이즈 침대가 또 너무 커 빈 공간이 많아한 켠에 만화영화를 틀어놓고 잠들었다. 습기를 먹어서 살짝 눅눅한 침구가 낯설어서 한참 뒤척였다.
남자친구는 금요일 새벽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창문이 없는 3륜 오토바이를 타고 온 남자친구를 안아줬다. 그새 허리가 좀 더 얇아진 것 같았다. 우리는 함께 있었던 48시간 동안 많은 것을 봤다. 바다거북이도 보고, 멋진 산호초도 보고, 예쁜 물고기도 보고, 느긋한 강아지도 봤다. 달콤한 망고도 먹고, 커다란 새우도 먹었지만,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수화기 너머의 침묵과 새벽녘에 감싸 안은 얇은 허리였다.
일요일 아침, 우리는 ‘괜찮아. 다음에 놀러갈 땐 더 재밌게 놀수 있을거야!’ 하고 손을 마주잡고 돌아왔다. 지금의 고난과 역경이, 우리에게 좋은 밑거름이 되어 더욱 현명하게 잘 지낼 수 있는 원천이 되어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