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전통주 이야기 옮겨오기-146
몇 년 전부터 전통주(민속주+지역특산주) 양조장의 창업이 많아지고 있다. 정확한 통계가 없기에 연도별 양조장 증가수를 알 수는 없지만 업계에서는 1년에 약 50개의 양조장들이 새로 생겨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2022년 우리나라의 전체 양조장수는 1389개(12월 31일 식약처 기준)이다. 여기에는 희석식 소주나 맥주를 포함한 모든 술을 만드는 양조장을 이야기한다. 나라의 크기에 비해서는 적은 수의 양조장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과거 우리나라의 양조장의 수를 알기에 현재의 양조장의 수가 그렇게 많게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조선에서 술은 가정에서 빚어서 먹던 음식의 범주에 속했다. 김치, 된장과 같은 발효 음식이었고 조상께 올리는 제주(祭酒)나 절기마다 빚던 술들이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가양주(家釀酒) 문화였다. 그러기에 술을 빚는 것은 가정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집에서 술을 만들 수는 없었기에 술을 만들어 파는 곳도 있었다.
한양 어디를 가든 술집이...
가장 먼저 조선에서는 양조장과 관련된 전국적인 통계가 없기에 양조장수를 유추할 수 있는 문헌 속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성호사설>(1760)에서 한양 큰 거리의 상점 가운데 절반이 술집임을 지적하였으며 술집은 한양 어디를 가든 마주치게 되는 풍경의 하나였다고 했다.
비슷하게 정조대 후반에 형조 판서 등을 역임한 이면승(李勉昇, 1766~1835) 역시 술 제조의 금지에 관한 글인 <금양의(禁釀議)>에서 한양성 전체 인구의 10~20%가 술집에 종사하거나 연관되어 있다고 했다. 18세기 한양인구를 30만 정도로 추정하기에 약 3-6만 명이 술과 관련된 일을 한 것이다. 이처럼 많은 문헌에서 한양의 양조장이 많다는 이야기 한 것을 보면 전국적인 양조에 대한 산업적 위상도 추측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1904년 8월 제1차 한일 협약에 따라 10월 일본은 우리나라에 일본양조시험소 초대소장 출신 인물(目賀田種太郞, 메카타 다네타로)을 재정 고문으로 파견한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고 통치에 부족한 재원을 조달할 목적으로 주세를 부과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기존에 없던 술에 세금을 부여하려 한 것이다.
이에 1905년부터 1908년까지 우리나라의 주류 실태를 조사하고 이를 토대로 1909년 2월 주세법을 제정·공포한다. 이때부터 주류 통계가 만들어지면서 신문에 조선총독부에서 정리한 양조장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 기사가 나오기 시작한다.
근현대 통계(조선주조사)를 보면 1910년 주류 제조장은 무려 15만 5805개였고 주류 제조자는 전국 총가구의 약 7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또한, 1918년 통계에 따르면 주류제조장은 9만 951개로 줄었지만 집에서 술을 만드는 자가용주 제조면허자 수가 37만 5757명에 이를 정도로 많은 수가 양조를 집에서 한 것이다. 대한매일신보 1915년 05월 29일자 제목을 보면 '조선의 양조주'라는 대제목 밑에 '탁주 빚는 자가 삼십만'이라는 소제목이 나온다. 조금 더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총독부에서 최근에 조사한 「주세표」를 보면 작년(1914년) 11월 양주 면허 인원수는 388,395명이나 되고 술 만드는 쌀 수는 1,421,500석(1석=180리터)이라 하며 이에 증수되는 세금은 40,073,566원..(중략).그중에서 양조 쌀 수라던지 면허인이라던지 제일 많은 것은 탁주라 319,620인이 1,228,464석을 양조한다. (생략)
위의 신문 기사를 바탕으로 당시 1914년 일제강점기 인구를 1699만 2천 명이라고 가정하면(식민지 시기(1910년-1945년) 조선의 인구 동태와 구조, 박경술 저술 참고) 인구의 약 2.3% 주류 제조에 참여했으며 탁주는 32만 명 약 1.9%가 주류 제조에 참여 한 것이다. 총 인구는 나이와 상관이 없는 통계이기에 실제 성인을 기준으로 한다면 술을 만드는데 관여한 사람의 퍼센트는 더 높아진다 할 수 있다.
이후 주세법은 1916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주세령(酒稅令)으로 이름을 고치고 생산량의 최저한도를 정해서 소규모 양조장을 자연스럽게 정리하고자 했다. 자연스럽게 집이나 주막에서 소량 만들던 소규모 주조업자는 강제로 정리되고 대형 양조장은 살아남게 되었다. 결국 주세령이 시행되면서 30만 명이 넘던 자가용 주조 면허는 급격히 줄어 1931년이 되면 1명만이 남게 된다.
이때 전국의 주류제조장수도 4670개로 정리되면서 대형 양조장 위주로 완전히 제편이 된다. 결국 1934년 주세령 개정을 통해 자가용주 면허는 완전히 폐지된다. 해방이 된 후에도 당시의 주세법을 그래도 이어받아 근대의 주세법에서도 자가양조를 금지했기에 밀주(密酒)가 아니면 집에서 만들 수가 없었다. 1995년에 자가양조(가양주)를 허용하면서 현재처럼 집에서 술을 만들어 마실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더 많은 사람이 전통주 시장에 들어오면
현재 전체 주류시장 8조 8345억 원(21년 기준) 중 전통주(민속주+지역특산주)은 941억 원으로 전체 시장의 1%를 만을 차지하고 있다. 기존 주류 시장에서의 점유율을 조금만 높여도 전통주의 발전 가능성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양조장의 증가는 전통주 관심이 불면서 더 가파르게 상승을 하고 있다.
양조장의 증가는 자칫하면 과다 경쟁으로 인한 문제로 이어질 수가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구한말의 제조면허자 수인 38만 명을 본다면 우리의 전통주의 발전은 아직 더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제조방법과 기술을 가지고 우리 전통주 시장에 들어와서 전통주의 활성화를 이끌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동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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