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석조전을 둘러보기전에 덕수궁의 배치를 설명할 때 동도서기, 구본신참이라는 말을 언급한다. 그러면서 일본은 동도서기에 집중했고 조선은 구본신참에 집중했다라는 말도 들었었다. 하지만 두 단어를 찾아보면 유사한 의미이자 확장하고 어느 부분에 방점을 둘지 보여주는 용어이다. 중요한 것은 기존 동양사상의 사상과 생각을 더 중요시 한다라는 점이다. 사상적 바탕을 두고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것이 핵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석조전을 방문하여 해설을 들으며 둘러보았다. 화려함보다 단아함이 보이는 석조전이다.
동도서기(東道西器)는 동양의 도덕, 윤리, 지배질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서양의 발달한 기술, 기계를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한다는 사상이다.
구본신참[ 舊本新參 ]1897년 대한제국이 출범하면서 나타난 서양문명의 수용논리로, 이전에 전개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동도서기론은 김윤식(金允植)이 1880년(고종 17) 주창한 이론으로, 전통문화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이론이다.
석조전은 덕수궁내에 있지만 별도 예약을 해야만 입장할 수 있는 장소이다. 중화전을 거쳐 정면에 보이는 곳은 석조전시관이고 중화전 뒤편 고즈넉하게 서있는 건물이 석조전이다. 중화전을 중심으로 '동도서기'의 생각을 표현한 곳으로 오른쪽이나 동편에는 전통건축으로 건물을 두고, 서쪽에 식신 건물을 지었다. 고종이 서양의 사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짓기 시작했지만 완공된 것은 1910년에 완공되었다. 이 시기는 대한제국이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던 시기였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사용되기 보다 귀빈접대 또는 만찬장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실제로 석조전에 전시된 사진을 보면 고종보다 의친왕과 친일파의 인물들이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것이 많다. 그 사이 영친왕이나 고종 가족의 모습은 편하게 집에서 가족사진 찍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1918년 석조전 로비에 모인 황실 가족.
1918년 촬영한 사진. 가운데 모자 벗은 사람이 고종, 왼쪽이 의민태자(영친왕), 오른쪽이 순종, 순종 옆이 의친왕 ->
석조전은 서양의 신문물을 받아들인 건물이다 보니 전통적인 전각의 구조와는 다르다. 전통 궁궐의 전각은 하나의 건물에 하나의 기능을 담당한다. 업무실 또는 침실, 연회장 등 기능이 구분되어 있고, 회랑으로 공간을 분할하여 독립적인 형태로 존재해 왔다. 하지만 움직이는 동선이 멀기도하고 불편할 수 있다. 반대로 서양의 건축인 석조전은 하나의 건물에 여러 개의 기능이 모여있는 구조이다. 1층은 연회실과 접견실이라면 2층은 황실가족이 머무는 공간이다. 공간이 모여있기 때문에 이동이 편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순기능적인 형태를 가져와 세운것이 석조전이다. 그렇다고 서양의 기술을 우선시하고 전통적인 것은 배격하지 않았다. 균형있게 배치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석조전은 이왕가박물관으로 사용하였다가 다시 왼편에 미술관을 건립하면서 이왕가미술관의 기능도 옮겨갔다. 덕수궁을 공원화하면서 분수대가 생기고 개방되면서 건립 당시의 이념은 사라지고 서양식 기술만 남은 공간이 되었다.
이후 여러 기능으로 사용되다가 근대에 들어서 '덕수궁 석조전 동관'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재로 등록이 되었다. 이후에 여러 논의를 거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그래서 실내의 모습은 완벽하게 고증한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다. 건물의 구조가 바뀌어 실제 기능을 다 하지는 못하지만 예전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석조전의 건물 내부는 화려하다. 그렇다고 외국의 왕궁 건물에 비하면 검소한 편이다. 벽의 색상이나 커텐, 침구, 조명 등이 과하지 않고 적당히 배치하고 조화롭게 꾸며져 있다. 색감도 튀지않지만 고급스럽게 보였다. 오히려 서재의 건물이나 식탁의 의자만 보면 어느 고급 주택의 가구와 다를바 없다. 서구식 세면실과 욕조가 있는 것이 오히려 신기하였지만 규모는 크지 않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석조전이 고종이 예산을 마구잡이로 투여해 지은 건물이라고 했다. 대부분 이러한 독재자가 지은 건물은 무척이나 화려하다. 그에 비하면 석조전은 그렇게 화려하고 금칠한 궁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또한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잘못해석한 것이 아닌가 싶은것이 개인적이 의견이다.
석조전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협소하다. 하지만 시간을 뛰어넘은 공간과 난간은 그대로 남아있어 시간을 거슬러 간듯한 기분마저 들게 한다. 찬찬히 둘러보고 싶지만 해설이 끝나면 바로 옮겨가야 한다. 사진찍을 시간도 별로 없다. 예약인원을 충분히 늘려도 좋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충분히 공간을 바라보고 문양과 배치, 디자인한 옛 모습을 찬찬히 음미하듯 보고 싶지만 그럴만한 여유를 주지 않는다. 오로지 해설사가 있어야만 다닐 수 있다. 복원하였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옛 모습을 보여주기위한 목적이 있을텐데 일부사람들이 독점하여 해설한다는 것이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석조전을 보존하고 보호하기위해 제한을 두었다고 말하겠지만, 관리자를 곳곳에 배치하여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조치한 청와대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것도 해설사 집단의 독점이라면 문제가 된다고 본다. 석조전을 둘러보는 것이 해설사 설명이 있을때만 볼 수 있다. 해설사가 움직이면 다같이 이동해야 한다. 누가 주체인지 헷갈린다. 그렇지만 석조전 자체는 볼만한 건물이다. 그저 그대로 모습으로 유지된것이 아니라 여러 시대적 상황으로 변하여 상처입고 망가지고 한것을 찬찬히 보다듬어 상처를 치료하는 것처럼 과정을 밟아왔다는 점이 가슴 시리게 했다.
그리고 사진 속 고종과 그의 식구들의 밝고 웃는 모습으로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강제로 끌여나와 억지로 찍어야 했던 피로한 모습의 표정이 너무가 갑갑해 보이기도 했다. 자기 집을 빼앗기고 난 후에 여기와서 사진찍자고 하면 누가 좋다고 할까...
석조전은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개방되었으면 하는 것이 둘러보고 난 후의 솔직한 심정이다. 일부의 사람들이 독점해야 할 전각이 아닌 옛것을 본보기로하고 새것을 더하는 마음으로 지은 석조전의 사상을 많이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문물이 들어오던 시기에 일본이 택한것은 서양의 문물과 문화의 우선이다. 그리고 기존 일본의 문화와 체계는 철저히 무너뜨렸다. 기술적인 발전은 있었지만 정신은 무너졌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근본이 되는 정신은 이어쟈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한국적인 생각과 가치관, 문화가 남아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던 균형과 조화가 중요하다. 덕수궁 중심에 있는 건물은 중화전(中和殿)이다. 조화롭게 이루어 중도를 지켜 간다라는 의미이다.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아닌 조화로운 것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석조전이 있고 함녕전, 덕흥전이 대칭되어 있는것도 이러한 건축적인 발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