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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시코기 Aug 18. 2020

욕망에 눈뜬 소녀들

<워터 릴리스> 2007, 셀린 시아마 감독





'마리'(폴린 아콰르)는 싱크로나이즈드 선수 '플로리안'(아델 에넬)을 본 순간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플로리안은 마리에게 관심이 없는 듯하다. 마리는 플로리안과 가까워지고 싶다. 한편, 마리의 친구 '안나'(루이즈 블라쉬르)는 수영부 남학생 '프랑수아'와 만나기 위해 노력한다.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리가 플로리안을 처음 보는 장소는 싱크로나이즈드 경기장이다. 경기를 관람하던 마리는 곧장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이하 '싱크로나이즈드')에 매료되고 팀의 주장 플로리안을 동경하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진다. 마리가 처음 접하는 플로리안의 모습은 사실 인위적으로 꾸며진 모습에 가깝다.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에 최적화된, 인위적인 미소를 띤 플로리안의 얼굴. 이것이 바로 둘의 첫 만남이다. 아니, 마리가 생각하는 플로리안과의 첫 만남이다. 감독은 많은 운동 중에서도 왜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을 선택한 걸까. 셀린 시아마 감독은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이 여성 젠더 그룹에게 가해지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압축한 주제로 보였기 때문에 소재로 택하게 됐다고 밝혔다. 선수는 매력적이고 우아해 보여야 하고, 두꺼운 화장으로 과장된 여성성을 표현해야 하며, 자신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심사위원과 관중을 위해 미소 지어야 한다.


특히나 마리가 목격하는 싱크로나이즈드 경기 씬들을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영화는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앞서 언급했듯 가장 처음의 싱크로나이즈드 장면은 우아하고 정제된, 경기 중의 선수들의 모습을 비춘다. 다음으로, 훈련에 참관하게 된 뒤 마리가 눈을 뜨고 잠수하며 보게 되는 것은 안무를 위해 물 아래에서 움직이는 선수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이다. 물 밖에서는 보이지 않아 알 수 없는 곳에서 노력하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우아하고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쉬지 않고 갈퀴질을 하는 백조의 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장 마지막의 싱크로나이즈드 장면은 아마도 경기 중인 것으로 추측되지만, 배경음악이 들리지 않는다. 음악이 없는 상태에서 각자의 구호에 맞춰 거친 숨을 내쉬며 동작을 취하는 선수들의 모습이 보인다. 마리의 시선을 따라 그들의 외양에서 기저까지 닿게 되는 구조 속에서, 이 일련의 모습들은 여성 젠더에 가해지는 사회적 폭력을 은유한다.




이는 마리-플로리안-안느로 이어지는 세 캐릭터가 겪게 되는 사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성인이 되어가는 시기에 놓인 청소년기의 소녀들이다. 이차성징이 일어나 신체적 변화가 어느 정도 나타난 상태이며, 성적인 관심 또한 높아지는, 모든 것에 감정적이고 열정적이게 되는 시기다. 무언가에 있어 앞서가는 것, 더 일찍 무언가를 해보는 것이 잘난 것으로 여겨지며,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된다. 동시에 더 잘난 사람은 또래들의 시기와 질투 대상이 된다. 마리와 안느는 또래 집단과는 다소 거리감 있는 모습을 보인다. 대부분 둘이서만 놀고, 다른 친구들과는 대화도 잘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마리는 플로리안을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지고, 안느는 우연히 자신의 비밀을 보이게 된 프랑수아에게 빠진다.


하지만 둘의 마음과는 다르게 상대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 자신도 이해불가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마리는 플로리안이 버린 쓰레기봉투를 들고 집으로 와 서랍에 그것들을 넣어두고, 심지만 남아 썩어가는 사과를 베어 물며 애써 구역질을 삼킨다. 그렇게라도 플로리안과 함께 있는 것만 같은 감정을 느끼기 위함이었으리라. 한편, 안느는 자신의 알몸을 본 프랑수아에게 관심을 보인다. 나름의 진심을 보이며 가까워지려 노력하던 안느는 플로리안이 프랑수아를 거절한 날이 되어서야 마음을 확인을 받는 듯하다. 이 날은 안느가 프랑수아의 집 앞으로 가 자신의 속옷을 묻고 온 날이다. 아마도 이 또한 마리가 사과를 베어 물던 이유와 같았으리라. 하지만 잔인하게도 안느는 프랑수아에게 철저히 이용당했고, 그에게 플로리안의 대용품 이상이 아니었다. "섹스는 나중에 해도 키스는 빨리 해보고 싶다"던 안느는 자신의 바람과 반대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




분명하게 나타나는 이들의 마음과 다르게 플로리안의 마음 행방은 불분명하다. 플로리안은 남자친구 프랑수아와 가깝게 지내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마리를 내치지는 않는다. 그리고 마리의 마음에 관심 없어하면서도 마리가 상처받아 돌아설 때면 당황하며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친다. 차갑게 굴다가도 순간순간 다정한 모습을 보이고야 마는, 다소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다. 추측해보건대 만약 두 사람이 서로 교감하는 장면 없이 플로리안에 대한 묘사가 마리가 동경하고 사랑에 빠지는 인물에 그쳤다면 플로리안은 철저히 영화적으로 이용당하는 존재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감독은 영화를 그런 식으로 만드는 대신, 플로리안에게도 캐릭터 고유의 서사를 더해 인물을 보다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플로리안은 선수단 중에서도 가장 키가 크고 발육의 정도가 높다. 싱크로나이즈드 또한 가장 잘 해 팀의 주장을 맡고 있으나, 선수단 사이에서 남자들과 자주 노는 헤픈 애로 인식되어 있다. 코치와 잔다는 소문이 무성하고, 대놓고 시비를 거는 친구들 또한 많다. 청소년기는 무리의 가치관에 휩쓸려 개개인의 생각이 지워지는, 다수의 생각이 정답으로 받아들여지는 폭력의 시기이기도 하다.


 플로리안은 모든 시비에 퉁명스럽고 당당하게 대처하지만 계속해서 상처를 받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그의 앞에 마리가 나타난 것이다. 플로리안은 더 이상은 부탁을 들어주지 않겠다 화를 내며 집을 뛰쳐나간 마리를 붙잡고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는다. 아마도 이때의 다급함은 마리 이전에 자신에게 진심인 사람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불쑥 튀어나온 것일 테다. 플로리안은 마리의 손목을 낚아채며 자신은 사실 아무하고도 잔 적이 없으며, 지금까지 자신을 둘러싼 안 좋은 소문에 대한 객기로 행동했던 것이라는 자신의 진심을 말한다. 그렇게 마음을 공유한 두 사람이 계단 위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미소를 짓는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따뜻하게 느껴지는 장면이며, 또한 영화를 보고 있을 관객의 공감대를 최대치로 끌어내는 장면이다. 나중의 플로리안이 직접 뱉기도 하는 대사 "우리 닮았어"와 같이 똑 닮은 두 사람을 캐스팅해 대칭적으로,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연출한 이 장면에서 "누구나 겪는 일 아니냐"라며 그렇지 않은 마리를 플로리안이 부러워하는 장면은 그러한 청소년기를 경험했을 이들의 공감대를 자연스레 이끌어낸다.




이 점은 셀린 시아마 감독 영화의 큰 특징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과 관계는 사실적이고 현실적이게, 무엇보다 보편적이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것은 비슷한 경험을 했을 이들, 구체적으로 여성들의 공감대와 연결된다. 아마도 감독의 영화에 언제나 시간을 나타내는 오브제가 의도적으로 생략되다시피 하는 것 또한 이것과 연결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경우 의상까지 시대와 유행을 타지 않는 무늬와 디자인으로 구성되기도 했다. 그의 영화에서는 구체적으로 설정되지 않은 시공간적 배경 속에서, 영화 속 인물의 경험과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경험이 공유되고 일치되며 상호작용한다. 그런데 이 영화의 경우, 그의 다른 영화들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거친 질감이 존재한다. 어쩌면 이 영화가 그의 데뷔작이라는 점을 실감하게 만드는 인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음 작품인 <톰보이>의 유하면서도 역동적이던 연출에 비하면 <워터 릴리스>의 연출과 편집은 다소 뚝뚝 끊기는 감이 있고, 일관되어야 할 몰입감을 방해하는 순간 또한 더러 있다. 또한 이 영화는 그의 다른 영화들과 구별지어질 수 있는 차이점이 있는데, 특히나 다음 작품 <톰보이>와 비교되는 지점은, 다정하게 아이들을 돌보던 <톰보이>의 미카엘(로레)-리사의 부모와는 다르게, <워터 릴리스>의 마리-플로리안-안느의 부모는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플로리안의 부모의 경우 엄한 이들이라는 추측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이들 또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점은 어른들의 부재를 표현한 장면처럼 보인다. 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게 어른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지만, 청소년기를 보내는 아이들은 그것을 쉽게 잊어버리고는 한다. 어른들 또한 그들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상관하는 경우가 있다. 어른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보다 든든한 기둥과 같은,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지도 모른다. 마리와 플로리안, 안느 세 소녀의 방황은 어쩌면 그들을 지지해주고 믿어줬어야 할 어른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어른과 아이의 교감을 그리는 영화가 아니다. <워터 릴리스>는 아이들이 스스로 성장하는 과정에 대해서, 각자의 욕망에 눈 뜨고 깨어나는 과정에 대해서 그리는 영화다. 마리와 안느는 영화의 시작부터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거침없이, 솔직하게 따라간다. 이들의 감정은 때로는 질투심이, 때로는 사랑이, 또 때로는 집착이 되기도 한다. 둘은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방으로 자신의 팔다리를 뻗어보지만, 감정과 충족은 철저히 별개가 되고야 만다. 마리는 플로리안의 마음을 얻지 못했고, 안느는 프랑수아에게 자신의 의사 표현을 분명히 하며 이용당하던 관계를 스스로 끊어낸다. 마지막 씬에서 마리는 플로리안과 헤어진 뒤 수영장으로 간다. 수영장 바닥 저편까지 가라앉았다가 물 밖으로 나온 마리에게 안느가 다가온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수면에 떠 서로의 팔다리를 펼쳐 보인다. 두 사람의 몸이 하나가 되고, 한 마리 문어(Pieuvre)이자 한 송이 수련(Water Lilies)이 탄생하며 영화는 끝난다. 결국 마리와 안느는 각자가원하던 걸 얻지 못했지만 아픔을 딛고 일어나며 새로이 성장한다. 가장 마지막에 마리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며 천장을 바라본다. 마리는, 안느는 더 이상 플로리안 때문에, 프랑수아 때문에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어긋나는 마음의 행방에 달콤하면서도 씁쓸했던 짝사랑을 뒤로 하고 두 사람은 앞으로, 자신의 길을 만들며 나아가려 한다. 의지에 차 반짝이는 마리의 눈동자는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리저리 휘둘리던 연약한 소녀들은 사라졌다. 그곳에는 욕망에 눈 떠 팔다리를 사방으로 쭉 뻗고 있는 문어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 글은 아래 링크의 글과 동일합니다.


https://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7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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