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아킴 트리에 감독 자신이 영화를 만들 때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밝혔지만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요아킴 트리에‘오슬로 3부작’의 마지막 영화다.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지던 장르 영화 <델마>(2017) 뒤에 내놓은 신작으로 장편 데뷔작이었던 <리프라이즈>(2006)와 차기작 <오슬로, 8월 31일>(2011) 이후 10년 만에 찍은 이 영화는첫 영화였던 <리프라이즈>를 지금의 배경으로 소환해 다시 써 내려간 이야기처럼도 느껴진다.
<리프라이즈>가 오슬로의 두 20대 초반작가 지망생 청년을 주인공으로 두 인물의 공통된 꿈과 도전까지의 망설임, 과정에서의 실패를 겪으며 가지게 되는 감정을 세밀하게 포착했던 영화라면,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비슷한 골조의 이야기에 29살로 조금 더 나이가 있고여성인 캐릭터 ‘율리에’를 주인공으로 둔다. 감각적인 연출부터 내레이션 식의 전개, 꿈을 찾는 주인공을 따라가는 방식은두 영화를 겹쳐 보이게 만든다.
꿈과 현실의 타협
이 영화를 보면서 궁금했던 건 초기작과 유사한 구조의 이야기를 다시금 이야기하는 이유였는데 영화의 결론에 다다를수록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감독은 다양한 관계를 겪는 친구들을 보며 사랑에 대해, 삶에 대한 환상과 현실 사이의 타협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고거기서 영화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이 영화의 방점은 바로 이 '타협'에 찍혀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이 점이 이 영화를 감독 초기작에 깔려있던 우울한 정서보다도 희망과 공감의 마음으로 보게 만드는 힘이 되지 않을까.
율리에는 20대를 얼마 남기지 않은 때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새로운 도전을 하고자 다짐한다. 시작할 때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작의 충동성만큼이나 한계에 부딪힐 때에도 쉽게 무너지고 갈등한다. 모든 걸 자신의 주관대로 바꿀 수 있다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건 사람 간의 관계도, 내게 주어진 시간도, 나 자신의 몸까지도 마찬가지다. 나를 위했던 선택은 나 자신을 최악이 되게 만들고, 누군가에게까지 나는 결국 최악이 되고야 만다. 누구나그렇게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통념이 옆구리를 쿡쿡 쑤시지만 일단은 나의 주관대로, 뜻대로 행동해본다.율리에의 충동과 갈등 사이의 감정을 연기하는 배우 레나테 라인스베를 보고 있자면 <프란시스 하>와 <매기스 플랜>에서의 그레타 거윅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타협 후에도 계속되는 삶
사실 이 영화는 율리에의 입장에 얼마나 공감 가능한 지에 따라 감상이 달라질 영화라할 수도 있다.율리에라는 인물이 누구에게나 공감을 얻을만한 인물이 아니라더욱 그렇다. 누군가에게는 율리에가 결국 끝까지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일 것이며, 유사한 경험을 겪었을 누군가는 공감할 것이다. 이런 점을 보완하는 게 이 영화의 구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는 12개의 챕터와 앞뒤의 프롤로그, 에필로그로 구성됐는데 이것이내레이션과 맞물려 마치 율리에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읽는 듯한 인상을 준다.
주인공에게 이입할 수 있게 만든다 하더라도 12개의 챕터는 결코 적지 않은 수이기 때문에 이 구성은 자칫 영화를 지루하게 만들 수 있기도 한데, 오히려 이 영화는 어떤 챕터는 몇 분도 안돼서 끝나버리는 반면, 어떤 챕터는 다른 챕터에 비해 다소길게 만들면서 고유의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순간의 감정을 녹여내는 요아킴 트리에 특유의 감각적인 연출까지 더해져 율리에 삶의 한 부분을 특별한 마법과도 같이 만든다.
한계의 벽에 부딪히고 타협하면서도 율리에의 여정은 멈추거나 끝나지 않는다. 율리에의 삶이 계속되는 한 한 챕터의 끝은 또 다른 챕터의 시작이다. 모두가 각자 삶의 챕터를 써 내려가고 있는 만큼, 그리고 꿈과 현실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타협의 시기를 생의 중간에서 언젠가는마주하게 되는 만큼 정도는 다를 지라도 이 영화를 보며 공감하고 위로받을 이가 적지 않을 것임을 확신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