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잼스 Jan 07. 2024

편지

나도 몰래 담요를 끌어당겼어. 시린 어깨를 덮다가 한기가 목덜미를 타고 올라오는 바람에 잠에서 깼네. 밖은 이미 훤히 밝았어. 창문게가 허연 걸 보면 아마도 눈이 밤새 온 모양이야. 터덜거리며 다가가 밤새 내려섰던 블라인드를 올려. 바람이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어. 너무 하얘 눈이 시려도 나는 잠시 그대로 서서 두꺼운 눈더미에 묻힌 마당을 바라보았지.     


지난 새벽엔 이웃집 창문에 노란 불빛이 쓸쓸하다 생각했어. 부인이 급성췌장암으로 중환자실에 들어간 후론 늘 저렇게 밤늦도록 등이 꺼지질 않아. 아내 얘길 하는 그분의 눈동자가 퀭했어. 축축했던 시간이 말라 모래시계처럼 할랑하게 빠져나가는 듯 느껴졌어.


쌓인 눈 때문에 주목의 가지가 위태로워 보였어. 눈의 무게를 못 이겨 부러질 듯 처진 가지가 비명이라도 지르는 듯해. 눈이 잔인하다고 느껴진 적 있어? 사뿐히 내려앉는 눈이지만 멈출 줄 모르고 내리면 그것도 테러야. 버텨야 하지만 같은 곳을 계속 공격하는 걸 어떻게 참아낼 수 있겠어? 비켜서는 수밖에. 그러면 나무 위 눈더미가 '툭'하고 떨어져. 자업자득이지.

     

물을 데우며 먼저 차 한잔 마시고 그치는 대로 눈을 치울 생각이었어. 벌써 몇 번째야. 폭설이 잦으니 이젠 이런 일도 귀찮아지네.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길을 굳이 치워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 외려 쌓인 채로 두는 게 덜 적적할 것 같기도 해. 왠지 “여기 누구 살아요.”하는 마음을 들키는 것 같잖아?   


젖은 눈인지 마른눈인지 궁금하긴 해. 아내가 있었으면 아마 눈사람을 만들자고 했을 거야. 그러려면 젖은 눈이어야겠지? 하지만 바람 속에 나풀거리는 것이 잘 뭉치진 않겠군. 밖에 나가지 않고 창가에 앉아하는 지레짐작이 점점 늘어가네. 추위 때문인지, 게으름 때문인지, 둘 다인지, 천성인지, 알 게 뭐야. 지금은 혼자인걸.    


차 한잔 마시고 그치는 대로  눈을 치울 생각이었어. 찻잔에 손이 데워지고 입술과 가슴이 따뜻해지니 멍하니 옛 생각이 붙잡네. 나는 얼마나 더 멀리 갈 수 있을까? 뒤로 또 앞으로 말이야. 어쩌다 보니 뒤로 가는 길이 더 멀어졌네? 더듬어 얼마나 더 갈 수 있을까? 어딜 보고 서있는 걸까? 그렇게 눈더미에 묻힌 마당을 바라보다 눈이 시려 눈가를 훔쳤어.  

작가의 이전글 텃밭 농부도 농부랍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