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수목원에서 발견한 자연의 잠재력
가끔 우물 밖으로 나가야 한다. 잔디밭과 꽃밭, 텃밭을 매일 오가다 보면 마당이 우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맴돌다 보면 시야가 좁아진다. 호기심도 줄고 변화에 둔감해진다. 그럴 땐 더 넓은 우물을 찾아간다. 아는 식물을 만나면 친한 척하기도 하고, 새롭고 낯선 식물에 눈이 커지기도 한다.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자라는지 바라보는 것은 해석이 필요 없는 공부다.
가까운 곳에 무궁화수목원이 있다. 산을 깎아 만든 곳이다. 수목원을 만들기 위해 수목을 제거해야 한다는 사실은 기괴한 아이러니다. 관람과 관리를 위한 건축물, 널따란 시멘트 탐방로는 얼마나 번듯한지. 심지어 시멘트 기둥 위에 스카이워크 전망대까지 놓였다. 산림청 공모사업으로 국비와 지방비 108억 원이 들어갔다. 대다수 국공립수목원이 이처럼 ‘개발사업’으로 만들어진다. 사업은 자연을 갈아엎고 시작한다.
지난 9월엔 멀리 순천만 국가정원에 갔다. 조성된 지 불과 10년,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애초에 나무라곤 없던 28만 평의 논밭에 터를 닦아 수목을 기증받거나 새로 심어 만들어졌다고 한다.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농지에 정원을 만든 것이다.
내가 찾았을 땐 꽤 많은 종사자들이 국화와 포인세티아 화분을 옮겨 심고 있었다. 철 지난 꽃들을 제거하고 계절 꽃을 심는 것이다. 얼핏 보아도 화훼농가를 살리고, 일자리도 창출하며, 관광 수익까지 올리는 매우 성공적인 사업이다. 게다가 이 정원이 순천만을 보전하는 개발저지선이 된다니 생태도시로서의 명분도 확고하다.
온수에 에어컨 빵빵한 글램핑 시설에서 하룻밤 묵는 내내 낮에 본 꽃 화분이 맘에 걸렸다. 일회용 컵처럼 계절마다 쓰고 버려지는 꽃이라 생각하니 불편한 감정이 일었다. 보트와 스카이 큐브가 씽씽 휘젓고, 너른 잔디마당이 주인공인 이곳은 공원이나 유원지 느낌이 물씬했다. 국립수목원이 그렇듯 국가정원이라 불리는 것은 정부 예산 즉 세금이 투입된다는 것이니 돈으로 조성된 돈의 위력을 관람하는 셈이다.
며칠 전엔 천리포수목원에 다녀왔다. 초행이 아닌 이곳에 새로운 궁금증이 돋은 건 <나무야 미안해 : 천리포수목원을 일군 민병갈의 자연사랑>이란 책을 읽고 나서다. 아예 하루를 묵으며 천천히 둘러보기로 했는데 그 결정이 행운을 불러왔다. 숙박객을 위한 특별 혜택, ‘아침 산책’ 프로그램이 바로 그것이다.
1970년부터 천리포수목원 조성을 시작한 故민병갈(Carl Ferris Miller) 원장은 늦은 나이에 독학으로 식물학 분야에서 세계적 석학 수준의 경지에 올랐고, 1989년 영국 왕립원예학회로부터 국제원예계에서 가장 큰 명예로 여기는 베치 메달(Veitch Medal)을 받았다. 2000년에는 국제수목학회에서 세계 12번째,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증을 받아 국제적 수목원으로 키워냈다.
사실 내 관심은 ‘천리포수목원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나무’라는 글귀였다. 오래전 기억으론 바다를 끼고 있다는 것 외에 다른 수목원과 크게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오해는 미개방 지역, 이른바 비밀정원을 걸으며 가드너의 설명을 듣는 ‘아침 산책’으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나무들이 자라난 모습에서 구애 없는 자연스러움이 느껴졌다. 사람을 위한 길은 극도로 자제하고 나중에 자라날 나무를 위해 넉넉한 공간을 배려해 심었다. 그러니 성장하면 각기 식물의 타고난 모양이 어떤 것인지 비로소 알게 된다. 비밀정원을 포함, 민병갈 원장 사후에 개방된 수목원도 전체 면적 중 극히 일부(약 18만 평 중 2만 평)에 불과하다니 주인이 누군지가 확실하다.
16,347 분류군을 지닌 국내 최다 식물 보유 수목원(당연히 국립수목원이나 국가정원일 거라 생각했지만)으로 특히 호랑가시, 목련, 동백, 무궁화, 단풍은 독보적이다. 팜파스 글라스, 핑크뮬리, 노루오줌, 키위 등을 국내 최초로 들여와 보급했을 뿐만 아니라 후학 양성의 산실로 천리포수목원을 거친 인재들이 국내외 수많은 수목원에 활약하고 있다고 한다.
바닷가 논밭과 민둥산 불모지에 조성된 수십만 평의 정원이란 점에서 순천만국가정원과 천리포수목원의 출발은 비슷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결과는 극명하게 다르다. 전자는 인위적 꾸밈이 많아 손이 많이 가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 반면 천리포수목원 비공개지역 식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숲 속엔 강한 식물들이 자리를 잡아서 잡초가 자라지 못해 사람의 손길이 그리 필요치 않다.
두 시간 반 동안의 ‘아침 산책’ 뒤 진한 여운이 남았다. 무엇보다 감명 깊은 것은 자연을 대하는 故人의 자세와 그 사랑을 지속했던 끈기다. 수목원에서 그와 잠시 교류하며 다시금 확인하게 됐다. 늦은 나이란 없다는 것, 늦은 나이에 가장 좋은 일이 풀과 나무를 가꾸는 것이란 걸 말이다.
문득 보통의 정원은 오래된 학교와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래되어 굳어버린 규율과 지나친 보호가 담쟁이넝쿨처럼 뒤덮고 있는 학교 말이다. 타고난 모습대로 사는 게 아니라 통념에 맞춰 길러지는 것은 식물이나 아이나 마찬가지다. 정해진 모양으로 다듬고 쳐대며, 선택받지 못하면 뽑거나 약을 치고, 보고 싶고 예쁜 꽃만 알아본다. 제때 물을 주지 않아 말라죽는 풀이 있는가 하면 양분 과잉으로 힘들어하는 초목도 있다.
가꾼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공들여 가꾸어야 꽃을 피우는 식물이 있다. 오랜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꽃과 열매를 볼 수 있다. 그 시간과 정성을 다른 풀과 나무에 들이면 더 풍성하게 가꿀 수 있다. 키우기 쉽지 않은 꽃을 피워낸 기쁨과 가치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일까?
어쨌든 마당은 사람의 손길을 전제로 한다. 어떤 책에선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 하였으나 숲이 아닌 정원은 태생이 인위적이다. 그렇다 해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이 깃든 곳이니 내 의도대로 되리란 기대도 터무니없다. 그러므로 완성된 정원이란 없다.
우물 밖을 구경하고 나니 뜰을 가꾸는 지향점이 조금은 선명해진다. 나만을 위한 뜰이 아니라는 것. 살아있는 것들에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 서로에게 힘든 존재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클 수 있도록 돕되 자연의 잠재력을 믿고, 학교라는 오래된 틀 속에 발 들이지 않도록 경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