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마당엔 감나무가 세 그루 있다. 키 작은 단감 한 그루와 나이 먹은 대봉시 두 그루. 단감은 삼 년째 그럴듯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 주변 큰 나무들에 가려서인지, 아직 때가 아닌 건지, 농부를 잘 못 만나서인지 잘 모르겠다.
대봉감이 주렁주렁 열렸다. 살도 토실토실하게 올랐다. 잘 익은 주홍빛 껍질에 단맛이 주르륵 흐른다. 한결같진 않아도 감빛을 혼동하긴 쉽지 않다. 고운 가을 단풍 든 듯 저물어 가는 석양빛이다. 한때는 푸르고 노란빛이 돌았지만 익어갈수록 선홍이 짙어져 주홍으로 바뀌어 간다. 노을이 물든다.
연륜이 있고 키가 큰 대봉감은 높이 올라가 햇볕을 넉넉히 받았다. 덕분에 쏟은 정성에 비해 감지덕지 과분할 만큼 열매를 달았다.이맘때면 졸부가 돈 세듯 자꾸 개수를 세게 된다. 얼추 나무 하나에 백 개가 훌쩍 넘는다.
가는 가지 끝에 매달린 모습이 아슬아슬하다. 묵직해 보이는 것이, 빨리 거두지 않으면 금세라도 땅으로 곤두박질할 듯 위태롭다. 하지만 막상 따보면 가지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어 웬만해선 떨어지지 않는다. 고지가위로 가지 채 잘라낸다.
뒷목과 어깨 근육이 깜짝 놀라 뻐근하다. '하늘을 이렇게 오랫동안 올려다본 적이 언제였냐'며 경고한다. 하지만 매혹적인 선홍빛, 고혹적인 자태로 손짓하는 열매에 그런 저항이 무슨 소용이랴. 별만 보며 걷다가 시궁창에 빠진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도 이랬을까?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달린 홍시는 유난히 맛난 색깔, 탄력 있는 피부로 빛나고 있다. “새도 맛을 봐야지”하며 대범한 듯 돌아서지만 진득한 아쉬움이 정수리 위에 계속 머문다. 까치밥은 무슨, 핑계일 뿐이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새소리를 들으며 감을 깎는다. 따스한 햇볕이 들어도 좋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도 좋다. 그런 계절이다. 이런 공기와 풍경 모두 만족스럽고 귀하게 느껴진다. 지금 이 순간, 자기 집에 감나무 하나 없는 사람은 왠지 사는 동안 조금 덜 행복할 것만 같다.
칼끝에 스치는 과육은 확연히 보드랍다. 잘 드는 칼을 가만히 대고 몸통을 돌리면 힘들이지 않고 껍질을 벗겨낼 수 있다. 끊기지 않는 껍질에 성취감이 솟는다. 즐거움이 칼끝에서 손끝으로, 다시 눈과 시상하부를 지나 입안의 미뢰에 다다르면, 얼마간 꼬들꼬들 해져있을 맛에 침을 모은다.
떨어져 깨지거나 상처 난 것, 크기가 작은 감은 깎아서 감고지(감말랭이)를 만든다. 껍질이 깨끗하고 빛깔이 짙으며 탐스런 것들은 채반에 담아 연시를 만든다. 크기는 좋지만 덜 익은 느낌의 단단한 것들은 껍질을 깎아 바람 좋은 처마에 매달고 곶감이 되길 기다린다.
연시든 곶감이든 고지든 죽 늘어놓고 보면 보람과 풍요로움이 가슴을 훅 치고 들어온다. 이제 맛볼 차례다. 미리 익혀 둔 연시를 갈라 숟가락으로 퍼먹는다. 달콤 촉촉한 속살이 금세 녹아 가느다란 섬유질만 입안에 남는다. 한 덩이 커다란 홍시가 어느새 사라지고 껍질 안쪽을 긁어대는 내 모습이 우습다.
곶감과 수정과, 호두를 넣은 곶감말이를 귀한 음식으로 치던 어린 시절 추억이 소환된다. 어디 그뿐인가? 불에 말린 것을 오시(烏柹)라 하는데 요즘엔 얼려서 셔벗으로 먹는다. 인류가 한반도에 출현하기 전부터 감나무가 자생했다니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위안을 주고 허기를 달래 주었을까?
남녘엔 때 아닌 폭우다. 이제 기온도 뚝 떨어진다는 예보다. 감나무가 아니었으면 가을이란 느낌도 없이 계절을 보내지 않았을까 싶다. 급격한 기후변화 때문에 제대로 된 열매를 내지 못해 많은 과수 농가가 힘들어하고 있다. 그 와중에 풍성한 결실을 맺은 뒤뜰 감나무가 대견하고 고맙다. 하지만 언제 내게도 닥칠지 모를 불행이다.
한편으론 주렁주렁 열린 감을 따는 것도 나이가 더 들면 힘에 부치겠구나 싶다. 감을 깎는 손가락도 삐걱거린다. 나무는 저 스스로 넓은 잎을 떨구어 거름을 만들고 겨울을 견딜 이불을 덮는다. 사람 늙는 것이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나무에게 겨울은 또 어떤 시련이 될지, 늙기도 전에 앞으로 어떤 수난을 겪게 될지 걱정스럽다.
이 좋은 날, 풍요와 행복 속 불안감이 똬리를 튼다. 이런 기쁨을 누리는 날은 과연 얼마나 남은 것인지? 당연한 자연은 이미 없어졌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