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oSAC Sep 04. 2020

자유와 소통

어떤 문 뒤에서 우리가 찾는 보물을 발견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존재, 이웃

당신은 태어나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사회를 벗어나 살아본 적이 있나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먹을 것을 해결하고 잠자리를 해결한 경험이 있나요? "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에서 혼자 살아보고 싶다" "무인도에서 생선이나 잡아먹으면서 살까 봐" 누구나 한 번쯤은 상상해 봤을 법 하지만 그런 삶을 실제로 경험해보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배고픔과 추위, 맹수의 위협, 외로움을 감당하는 것이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닐 것이며 낭만적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야생에서 살아갈 능력을 갖춘 사람일지라도, 몇 날, 몇 주, 길어야 몇 달 정도, 도시 생활의 번잡함과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언제든 원하면 다시 사회로 돌아갈 길을 마련한 상태에서 그런 모험을 감행할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에게 사회는 어쩔 수 없는 삶의 토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회에 대해 호의적 생각만을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타인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전혀 수긍할 수 없는 생각을 마치 세상의 진리이자 상식이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 때문에 일상의 평화가 깨지고 내가 하는 일에 크고 작은 지장이 생깁니다. 명백한 범죄를 저질렀거나 누구라도 지탄할만한 언행으로 무리를 일으킨 사람들은 차라리 나를 짜증 나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언젠가는 법의 심판을 받거나 여론의 뭇매를 맞아 사회로부터 격리될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악행을 저지르든 내가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닌 이상, 덤덤하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일부는 부나 명예나 권력을 갖고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 속에 끼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나처럼 평범하고 눈에 잘 뜨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으면서 지속적으로 내 삶을 교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다니는 직장에 있고, 내가 사는 동네 이웃이기도 하고, 거리를 걷거나 운전할 때 마주치는 사람들 속에 숨어 있거나 인터넷 게시판과 사회관계망 서비스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들이 내뱉는 말 때문에 내 눈살이 찌푸려지고, 그들이 하는 행동 때문에 미움의 감정이 일어납니다. 그들의 숫자는 너무나도 많아서, 부도덕하고 능력 없는 자격미달의 정치인을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도 하고, 그들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받아들여 정부는 내가 낸 세금을 축내는 엉터리 정책을 만들어 냅니다. 쓰레기 같은 음식이나 제품에 대해 그들이 준 별 다섯 개에 속아 내 주머니 돈이 축나기도 합니다. 그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멍청한 프로그램과 음악과 영화들이 방송 채널과 극장을 가득 채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콘텐츠가 거의 없습니다.



이웃 사랑의 의미

예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구분해서 어떤 이웃을 사랑하고 어떤 이웃은 사랑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고 그냥 이웃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예수는 자신의 말씀대로 구분 없는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백성들로부터 미움받는 세금공무원, 모든 사람들로부터 돌 맞는 창녀, 귀신 들린 사람, 평생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에게 특히 각별했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부자이든 가난뱅이든 치우치지 않고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심지어는 숨을 거두기 직전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이 스스로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를 뿐이라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합니다. 예수님에게 삶의 목적은 자신의 피로 모든 인간의 죄를 사면하는 것이었고, 사랑은 그러한 목적에 대한 동기이자 실현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교를 한마디로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기독교 교리의 중심이자 다른 종교와 차별되는 특징입니다.
민주주의를 공화제라는 정부 형태와 다수결이라는 의사결정 원리로써만 이해한다면,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와 근대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노예제 허용 유무나 참정권의 범위가 다르다고 한다면, 건국 때부터 근대 민주주의를 채택한 미국조차 상당 기간 노예제가 유지되었었고, 민주주의 선진국 대부분 여성에 대한 참정권이 20세기 중반 이후에나 받아들여진 사실을 무시한 것입니다. 근대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핵심 가치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고대 민주주의와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타인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울의 철학적 성찰을 통해 자유와 평등의 개념으로 발전하여 근대 민주주의를 탄생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인간으로 태어남으로써 인간은 신성을 가진 존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의 희생을 통해 인간은 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사실은, 타고난 신분과 상관없이 모두가 평등하다는 걸 의미합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중세 자연법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그리티아누스 교령집은 '자연법에 따라 사람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에게 해 주고 남이 하지 말았으면 싶은 것은 자기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자연법은 이후 모든 근대 민주주의 국가 헌법의 중심 개념이 됩니다.
근대 민주주의 이전 사회에서는, 전쟁에서 진 나라의 사람은 승전국 사람들의 노예가 되고, 왕이나 귀족은 정당한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모든 사람이 타고난 신분과 역할대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누구나 법에 의해 보호받고, 누구나 사유 재산을 가질 수 있으며, 유권자로서나 시민의 대표로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민주주의 국가 사이에는 전쟁이 사라져 평화가 정착되었으며, 식민지 시민도 본국의 시민과 같은 권리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이웃 사랑이 민주주의의 토대라는 점은, 우리가 민주주의를 포기할 생각이 아니라면, 썩 내키지는 않지만,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웃일지라도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즉,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나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존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보화 사회의 역설

과거에 사람들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 화이트 컬러와 블루 컬러, 착한 사람, 나쁜 사람, 진보적인 사람, 보수적인 사람, 교회 다니는 사람, 미신을 믿는 사람이 모두 한 마을에 살았습니다. 이웃의 살림이 어떻고, 누가 성격이 괴팍하고, 누구를 조심해야 하는지 뻔하게 알고 있었고, 형편과 가치관과 사는 방식이 다르지만 적어도 한 마을 사람들끼리는 갈등을 피하려 하고, 설령 갈등이 생기더라도 누군가 나서서 중재하여 서로 화해함으로써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생각이 달라 언쟁이 있더라도 정말 심각한 싸움이 아니면 소통과 교류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게 서로의 생활 반경이 중첩되어 있었습니다.
도시가 커지면서 부자 동네, 가난한 동네가 나뉘어 형편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서, 계층 간 공유하는 생활 반경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가치관, 배경, 직업 등 여러 측면에서 비슷한 사람들끼리 소통과 교류는 증가한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 한 어울릴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던 중 인터넷이 만들어졌습니다. 인터넷은 서로 다른 사람끼리 만날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지구 반대편 사람들과도 손쉽게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습니다. 적당한 재능과 노력만 있으면 수백만 명과도 생각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인종, 성별, 나이를 초월하여 손쉽게 소통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 나와 다른 형편, 배경,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헛된 기대였습니다. 오히려 인터넷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소통은 폭발적으로 증가시키고, 생각이 다른 사람과는 소통하지 않는 현상을 초래했습니다. 오늘날 에코 챔버 현상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통된 현상입니다.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니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의 끈끈한 유대감이 형성됩니다.

과거에는 한 마을에 살면서 듣기 싫은 소리도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했지만, 지금은 굳이 듣기 싫은 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내가 원하는 말만 취사선택하여 들을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자기 생각이 옳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기에 더욱 확신에 차서 내 의견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에코 챔버는 확증 편향을 강화시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무지하거나 사악하거나 상종할 가치가 없는 사람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문제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무수히 많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고 바꾸려 해도 서로에 대한 적대감만 더 커질 뿐, 그들은 전혀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습니다. 적대적인 두 부족이 내부적으로는 상대 부족의 비겁함과 악행을 고발하고 상대 부족에게는 목청 높여 원색적인 비난과 위협의 말을 쏟아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선하고 적은 악하며, 우리는 신의 자식이고 적은 악마의 자식이며, 우리는 승리할 것이고 적은 신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차별과 전쟁이 상존했던 18세기의 사람들마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인간의 존엄성, 자유와 평등, 박애주의 사상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정보화는 물질문명의 비약적 발전을 가져왔지만 정신문명은 원시 부족사회 수준으로 후퇴시킨 것 같습니다.



타인과의 대화

인류는 오랜 야만과 전쟁의 시기를 거치면서 이성에 의한 지배를 꿈꾸게 되었으며, 철학의 가장 큰 목표는 불완전한 인간의 주관이 아니라 모두에게 보편타당한 객관적인 기준을 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근대 과학의 눈부신 성취에 의해 고무된 철학자들은 절대 이성과 불변의 객관적 진리에 더욱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인류의 역사 발전마저 과학적 원리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마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 무렵 과학, 특히 양자론과 진화론은 절대 이성과 보편적 진리에 기반한 철학자들의 세계관을 한순간에 무너뜨립니다. 우주 자체를 포함하여 만물은 우연적 사건의 결과물이며, 그 어느 것도 절대적인 위치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무엇이 공동선이고 무엇이 정의인지의 기준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국민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민주주의는 각 개인의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의지를 뛰어넘는 일반의지가 과거 신이나 절대 군주의 권위를 대체함으로써 확립되었습니다. 민주주의 사상가들이 일반의지를 신봉하게 된 것은 일반의지라는 개념의 뿌리가 절대 이성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절대 이성이 없다면, 어떻게 일반의지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상대성의 우주에서 어떤 사물의 위치를 결정짓는 것은 다른 사물들인 것처럼, 내 생각의 옳고 그름은 오직 다른 사람의 생각과 비교를 통해 판단될 수 있습니다. 절대 좌표가 없어도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고 로켓을 쏘아 올릴 수 있는 것처럼, 절대 이성이 없어도 사회의 운영 원리를 정하고 사회가 발전할 수 있습니다.
물체의 운동이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에 의해 결정되듯이, 사회의 발전은 구성원들의 공감과 이해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 문제는 서로 공감하려 하지 않고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비롯됩니다. 과학과 철학의 영역에서 절대주의가 폐기되었지만, 일상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만이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틀렸다는 생각을 하며 여전히 절대주의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데서 옵니다. 외국인과 소수자를 배척하고 공격하는 극단적 운동조차 자유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자유가 절대화됨으로써 공동체에 위협이 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은 자유를 만끽하려 하고 다른 사람의 자유는 침해하려 하는 사상은 자유를 절대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오히려 자유를 상대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자유가 절대적이라는 의미를 존 스튜어트 밀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오직 한 사람 말고는 인류 모두가 똑같은 의견을 갖고 있다고 할 때 그 한 사람이 인류를 침묵하게 만들 권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는 만큼이나 인류가 그 한 사람을 침묵하게 만드는 것도 정당화될 수 없다.'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이며 모든 사람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누릴 수 있어야 하지만, 단 하나 지켜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몸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황금률과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에게 해 주고 남이 하지 말았으면 싶은 것은 자기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자연법이 자유에 대해 적용되어야 합니다.

나의 자유가 중요한 만큼, 타인의 자유도 중요합니다. 


오늘날, 자유로운 타인과의 대화가 더욱 절실해진 이유는 우리 앞에 당장 해결해야만 하는 중요하고 급박한 문제들이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복지 정책, 금융 정책, 보건 정책, 산업 정책, 일자리 정책, 교육 정책, 양극화 문제, 소외 문제, 차별 문제 등 한 나라 안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 사이에 대립하는 사안들, 영유권 분쟁, 기후변화, 난민 문제, 기아 문제 등 국제적 사안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특히 기후변화 문제는 당장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해결책을 찾지 않으면 인류의 생존마저 위태롭습니다.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고수하는 자세로는 이러한 문제들을 풀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 가져야 할 자세는, 그 누구의 의견도 사소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밀의 말처럼 내가 사소하게 여기는 그 누구의 의견 안에 '우리 모두가 귀 기울여야 하는 진리'가 숨어있을 수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감]유니콘 기업이 될 코삭에서 개발자를 채용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