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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 2.0

데이터 너머, 존재의 서사

by KOSAKA

남원테르미누스(Namwon-Terminus)에 도착한 것은 이몽룡이 열여덟이 되던 해였다.

수도 본성계에서 십이광년 떨어진 K형 항성계 외곽의 최전선 식민지. 행성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지구를 본따 설계된 남원테르미누스는, 지구에서 멸절된 동아시아 고전 문명을 유전자, 건축, 언어, 의복, 심지어 정서 패턴까지 복원한 ‘표본 문화행성’이었다.

남원테르미누스는 실험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실험이라는 차가운 단어가 함축한 개념을 넘어, 그곳에는 누군가의 향수와 기억이 깃들어 있었고, 이몽룡은 그것에 이끌렸다.


남원테르미누스 궤도에 진입한 세종 3호 왕족선. 이몽룡은 본성계 왕위 계승을 위한 감정 훈련의 일환으로 문화 감응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관찰자 신분이었지만, 사실상 정서 감응 테스트의 실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항상 정서 모니터링 AI 방자가 있었다.

방자는 남원테르미누스 내의 미묘한 감정 신호 변화를 실시간으로 감지하며 이몽룡의 안전과 임무 성공을 돕고 있었다.


처음 광한정계의 수목 회랑에서 춘향과 마주쳤을 때, 방자는 그녀의 존재가 시스템 내 공식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되지 않았음을 즉각 탐지했다.

향단이라는 보조 AI는 과거 남원테르미누스 문화 복원 기록과 교차검증을 시도하며 그녀가 전례 없는 자율 정서체임을 확인했다.


광한정계의 수목 회랑, 춘향은 중력 제어장치가 부착된 인공 그네에 몸을 맡긴 채 천천히 공중을 미끄러지듯 흔들리고 있었다.

무중력 상태에서도 안정된 움직임을 유지하는 그네는 고전적 놀이의 감성을 담아내면서도 첨단 기술로 재구성된 예술품 같았다.

그녀는 잔잔한 목소리로 고전 시어를 읊조렸고, 그 소리는 정서 필터를 넘어 이몽룡의 신경 인터페이스에 선명하게 전해졌다.


춘향은 등록되지 않은 시민이었다. 그녀에 대한 데이터는 시스템에 존재하지 않았고, 인공정서 필터는 그녀를 감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몽룡은 그녀를 즉시 감지했다. 그녀는 어떤 존재보다도 선명했다.


춘향은 남원테르미누스 중부지역 비인가 문화지구에서 거주하는 자율 정서체로, 본래 외부 관측이 금지된 영역에서 출현했다.

그녀는 누군가가 설계하거나 배치한 존재가 아니었다. 남원테르미누스의 문화보존 알고리즘 내부에서 자율적으로 생성된 현상적 존재, 즉 시스템의 예외값이자 자기조직화된 감정의 집합이었다.


월매는 춘향을 발견한 수호관리자였다. 그녀는 과거 문화재 복원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고위급 시민으로, 인간 형태의 감정 자율체가 생겨났다는 보고를 받고 직접 현장에 나섰다.

그곳에서 발견한 춘향은 스스로 이름을 말했고, 학습하지 않은 언어로 고전적 시어를 구사하며 감정 곡선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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