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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책 Check 16화

[서평]『원더풀 랜드』을 읽고

by KOSAKA

더글라스 케네디의 신작 『원더풀 랜드』(원제 Flyover)는 2036년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우리가 만나는 것은 먼 미래의 공상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이 길게 드리운 그림자다. 국가는 둘로 갈라졌다. 연방공화국은 권리와 평등을 말하면서도 기술적 감시를 제도화했고, 공화국연맹은 전통과 신앙을 내세우지만 개인의 선택을 범죄로 규정한다.


서로의 깃발은 다르지만, 극단으로 밀려난 이념이 어떻게 비슷한 방식으로 인간을 옥죄는지 소설은 집요하게 보여준다. 이 기본 전제가 작품 전체의 무대를 흔들림 없이 받치고, 독자는 자연스럽게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무엇을 잃게 되는가”라는 질문으로 끌려 들어간다.


이야기를 이끄는 인물은 연방공화국 정보요원 샘 스텐글이다. 그녀는 중립지대를 오가며 임무를 수행한다. 냉전의 베를린을 떠올리게 하는 이 공간은 표지판 하나만 넘어도 법과 언어, 감시 방식이 달라지는 경계다. 작전은 간결하지만 치명적이다. 샘은 공화국연맹 쪽 요원이 된 이복동생 케이틀린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피로 연결된 자매가 서로의 표적이 되는 순간, 독자는 장르적 긴장 위에 놓인 인간적 비극을 본다.


케네디는 총성과 추격만으로 긴장을 올리는 대신, 임무를 준비하는 침묵의 리듬, 정보가 일그러지는 지점, 거짓과 진실 사이의 미세한 균열을 세심하게 포착한다. 그래서 페이지를 넘기는 손은 빠른데, 마음은 자꾸 멈춰 선다.


장르적 완성도는 작중 세계의 정치학을 더 설득력 있게 만든다. 위장 신분, 내통 혐의, 이중 망명과 같은 도구가 등장하지만, 그것들은 줄거리의 가속 페달이자 사유의 촉매다. 케네디는 스파이 소설의 규칙을 잘 이해하고 있는 작가다.


‘다음 장면’의 유혹이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동안, 이 소설은 동시에 다른 층위를 켠다. 즉, 누가 더 옳은가가 아니라 ‘어떤 옳음이 어떤 비용을 요구하는가’로 논점을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사건이 달릴수록, 독자는 이상하게도 속도를 줄이고 장면 사이에 여백을 만들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샘과 케이틀린의 심리는 대칭과 비대칭의 교차로 그려진다. 둘은 같은 가정에서 같은 상처를 나눴지만, 각자의 체제에서 다른 언어를 배웠다. 샘에게 충성은 조직의 언어로, 케이틀린에게 신념은 신앙의 언어로 새겨진다. 둘 다 자신이 선하다고 믿는다. 중요한 것은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각자의 ‘옳음’이 상대를 어떻게 비인간화하는가다.


소설은 이 지점에서 가장 잔인해진다. 누군가를 악으로 규정하는 일이 얼마나 쉬운지, 그리고 그 쉬움이 어떻게 살의를 합리화하는지, 독자는 두 자매의 흔들림을 통해 목격한다. 케네디가 택한 잔혹함은 외부의 폭력이 아니라, “내가 옳다”는 확신이 내부에서 만들어내는 압력이다.


두 체제의 거울상 구조는 단순한 대비 이상의 효과를 낸다. 연방공화국은 권리를 보장한다며 생체 칩을 통해 일상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위험을 선제적으로 차단한다. 공화국연맹은 공동선을 위해 개인의 행위를 규율하고, 규범을 어기는 자를 배제한다.


감시의 언어와 규율의 언어는 다르지만, 목적을 위해 수단을 불문하는 태도는 닮았다. 이 닮음이 소설의 가장 큰 아이러니다. 이상을 지키려는 의지가 어떻게 이상을 파괴하는 기제가 되는지, 저자는 제도와 사람의 행위를 병치하여 보여준다. 그러므로 독자는 한쪽에 대한 분노로 다른 쪽을 면죄할 수 없다. 둘 다, 다른 방식으로, 위험하다.


현실과의 접점은 텍스트 밖에서 텍스트 안으로 스며든다. 독자는 최근의 뉴스들을 쉽게 떠올린다. 선거의 정당성, 법원의 판결, 권리와 전통을 둘러싼 진영의 언어가 어떻게 서로를 밀어내는지를 우리는 이미 보아 왔다. 소설이 하는 일은 예언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진행 중인 균열을 확대경으로 보여주는 데 가깝다.


이 확대경은 세부를 과장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애써 외면해 온 결을 또렷하게 만든다. 그래서 ‘미래’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어도,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자꾸 현재의 풍경으로 돌아온다. 불편함은 여기에서 생긴다. 허구의 안전거리가 사라지는 느낌, 문학적 상상력이 우리의 무감각을 찌르는 순간.


문체와 리듬 역시 주목할 만하다. 케네디는 사건을 과시하지 않는다. 그는 인물에게 시간을 건네고, 선택 앞에서 말을 아끼게 한다. 이것은 산만한 논쟁의 소음을 줄이고, 독자가 인물의 숨을 듣게 만드는 방식이다. 문장은 절제되어 있고, 전개는 명료하다.


덕분에 독자는 복잡한 정치적 배경을 억지로 이해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 서사는 인물의 심리와 함께 흐르고, 정보는 필요할 때만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경제성은 장르적 속도감과 사유의 심도를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


서평자로서 내가 특히 높이 보는 지점은, 이 소설이 ‘양쪽 모두 틀렸다’는 냉소로 도망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신 ‘양쪽 모두 위험하다’는 진단 위에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다. 민주주의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상대를 굴복시키는 언어가 아니라, 상호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임을 소설은 암묵적으로 제시한다.


경계에 선 사람들—샘 같은—이 어떻게 시스템의 총구와 인간의 얼굴 사이에서 버티는지를 보여주며, 제도와 양심 사이에 놓인 좁은 발판을 독자에게 가리킨다. 그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타인을 악으로 호명하지 않으려는 작은 자제, 증오의 속도를 늦추려는 사소한 망설임일지 모른다.


물론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 장면에서는 설명이 다소 친절하게 덧붙고, 몇몇 설정은 논쟁적 독자에게 표적이 될 여지를 남긴다. 그러나 그 친절함 덕분에 작품은 더 넓은 독자층과 만난다. 첩보 서사의 관습을 적절히 수용한 선택도 독서의 문턱을 낮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질문이 남는다는 점이다. 소설은 결말을 닫으면서도, 독자의 내부에서는 문을 연다. “나는 어떤 가치의 이름으로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이 물음은 책장을 덮은 뒤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원더풀 랜드』는 이렇게 네 겹의 울림을 남긴다. 잘 읽히는 스릴러로서의 에너지, 인물의 무의식을 비추는 심리의 깊이, 두 체제가 서로의 반사판이 되는 정치적 구조, 그리고 뉴스 바깥의 문학이 뉴스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현실적 경고까지. 이 겹침이 소설을 단순한 ‘경고문’에서 ‘사유의 장’으로 끌어올린다.


독자는 공포만이 아니라 감각을 가지고 돌아간다. 속도와 사유를 동시에 다루는 드문 소설, 그래서 더글라스 케네디라는 이름이 다시 한번 유효해진다.


우리가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해답이 아니라 태도일 것이다. 상대의 오류를 증명하는 논박의 기술이 아니라, 나의 확신을 의심하는 훈련. 제도와 기술, 신념과 전통이 모두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전제를 잊지 않으려는 반복. 누군가를 향해 손쉽게 ‘적’이라는 표지를 붙이고 싶어질 때, 그 표지가 내 얼굴에도 붙을 수 있음을 떠올리는 상상력. 문학의 일은 거기서 시작된다.


『원더풀 랜드』는 그 상상력을 환기하는 방식으로 우리 곁에 놓인다. 그리고 독자는 알게 된다. 이 작품은 미래의 공포를 팔지 않는다. 현재의 언어를 재정렬해, 내일의 선택을 준비시키는 책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한쪽의 승리가 아니라, 어느 쪽이든 승리가 절대가 되는 순간이다. 케네디의 문장은 그 순간을 향한 빨간 선을 조용히 긋고, 독자의 발걸음을 잠시 멈춰 세운다.


독자로서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은 이 소설의 ‘쓸모’다. 좋은 소설은 세상을 바꾸지 못해도 독자의 문장을 바꾼다. 우리는 현실의 논쟁에서 너무 빨리 결론을 요구받고, 너무 쉽게 편을 강요받는다. 『원더풀 랜드』는 그 속도를 늦춘다. 누가 옳은가를 다투기 전에 무엇이 인간적인가를 묻도록 만든다.


한국 독자에게도 이 질문은 멀지 않다. 우리 역시 정치와 종교, 젠더와 가족, 기술과 안전을 둘러싼 논쟁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경계의 언어를 배우는 일, 서로의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을 잃지 않는 일, 상대의 목소리를 내 안에서 복기해보는 훈련—이 책은 그런 감각과 훈련을 위한 훌륭한 연습장이다. 소설을 덮고 일상으로 돌아가더라도, 단 하나의 문장만 마음에 남겨두면 충분하다. “나는 오늘 어떤 확신을 의심해볼 것인가.” 그 질문을 반복하는 한, 디스토피아는 당분간 소설 속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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