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병오년의 시작과 함께 시바 료타로의 거대한 문학 세계를 주파하겠다는 결심을 세웠다. 그 대장정의 첫머리로 『쿠카이의 풍경(空海の風景)』을 골랐다. 시바 료타로가 펼쳐 보이는 일본사라는 광활한 파노라마에서, 시대순으로 가장 앞에 놓인 헤이안(平安) 시대를 이해하는 일은 이후 전개될 무사들의 시대와 메이지 유신의 격동을 읽어내기 위한 기초 공사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 고승의 일대기를 정리한 전기가 아니라,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라는 일본사의 전환기를 ‘쿠카이(空海)’라는 천재적 지성의 시선으로 재구성한 하나의 지적 풍경화다.
쿠카이가 등장한 헤이안 시대는 나라 시대의 번잡한 율령 국가 체제가 한계를 드러내고, 새로운 정신적 질서가 요구되던 시기였다. 귀족 사회에는 형식만 남은 불교가 만연했고, 일본은 대륙의 선진 문명을 향해 목숨을 건 견당사선(遣唐使船)을 띄우고 있었다.
이 격동의 중심에 두 인물, 사이초(最澄)와 쿠카이(空海)가 있다. 시바 료타로는 이 둘을 날카롭게 대비시킨다. 사이초가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규범적 도덕주의자였다면, 쿠카이는 기존의 틀로는 규정하기 어려운 자유로운 지성이자 우주적 스케일의 사상가에 가깝다. 사이초가 불교를 국가와 민중을 위한 체계적인 학문으로 정립하려 했다면, 쿠카이는 인간의 내면과 우주의 근원을 하나로 잇는 밀교의 세계를 일본에 구현하려 했다. 두 사람의 대비를 통해 작가는 헤이안 시대 지성사의 열망과 긴장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이 책에서 특히 인상적인 지점은 기록의 공백을 메우는 시바 료타로 특유의 상상력이다. 쿠카이의 전반생, 특히 관직을 버리고 산야를 떠돌던 시기의 기록은 극히 제한적이다. 작가는 이 ‘기록되지 않은 시간’을 쿠카이의 내면이 형성되는 결정적 시기로 재구성한다.
시코쿠의 거친 해안선과 절벽, 특히 무로토 곶에서 하늘(空)과 바다(海)만을 마주하며 수행하던 청년이 왜 자신의 법명을 ‘쿠카이’라 선택했는지를 추적하는 대목은 이 책의 백미다. 이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지리적 환경과 종교적 배경에 대한 치밀한 고증 위에서 이루어진 서사적 복원이다. 독자는 천 년 전, 그의 곁에서 해풍을 맞고 있는 듯한 감각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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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카이의 동선을 따라가는 작가의 서술 또한 탁월하다. 시코쿠에서의 독학 시절, 위험천만한 견당사 항해, 그리고 세계의 중심이었던 장안(長安)에 이르기까지, 시바 료타로는 ‘길’ 위의 풍경을 놓치지 않는다. 특히 당나라 수도 장안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그의 필력은 놀라웠다. 다국적 문화가 뒤섞인 국제 도시의 활기, 푸른 눈의 승려들과 교류하며 밀교의 정수를 흡수하는 쿠카이의 모습은 한 편의 대하서사를 연상시킨다. 장소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사상이 형성되는 결정적 조건으로 기능한다.
상권 후반부에서 쿠카이는 밀교(密教)를 만나기 직전, 오히려 다양한 사상 앞에서 잠시 멈춰 선다. 그는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기독교의 교리를 접하며 각 세계관이 지닌 정합성과 동시에 분명한 한계를 감지한다. 선과 악의 이원론, 구원과 종말의 서사, 신과 인간 사이의 단절은 지적 자극을 주었지만, 쿠카이가 갈구하던 ‘우주와 인간의 완전한 합일’에는 이르지 못한다.
이 사상적 갈증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밀교의 대가 혜과(恵果, 에카)를 둘러싼 기묘한 거리 두기다. 병상에 누워 있는 혜과를 일부러 다섯 달 동안 찾아가지 않는 쿠카이의 태도는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스승을 선택하기 전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사유의 끝을 끝까지 확인하려는 치열한 지적 긴장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혜과가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혜초와 동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횡단하며 세계를 기록한 혜초와, 장안에서 우주의 구조를 사유하던 혜과가 같은 계보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이 불교적 네트워크가 동아시아를 넘어 유라시아 전체로 확장되는 감각이 생긴다. 시바 료타로는 이 침묵의 시간을 통해, 쿠카이가 밀교를 ‘배우게 되는 과정’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순간’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불교 철학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작가의 역량은 돋보인다. 자칫 난해해질 수 있는 교리와 밀교의 복잡한 체계를 시바 료타로는 단정하고 명료한 문체로 풀어낸다. 현교와 밀교의 차이, 만다라가 상징하는 우주관, 그리고 당시 일본 지식인들이 왜 쿠카이의 사상에 매혹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대목은 학술적 깊이와 가독성을 동시에 확보한다. ‘우주는 곧 나이며, 나는 곧 부처다’라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의 사상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을 통해 구체적인 사유로 자리 잡는다.
상권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남는 인상은 쿠카이라는 인물이 지닌 압도적인 확장성이다. 그는 단순한 승려가 아니라 토목 기술자였고, 서예가이자 언어학자였으며, 시인이자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였다. 시바 료타로는 상권에서 그 거대한 바다의 표면을 훑었을 뿐이다.
2026년의 첫 독서로 이 책은 옳은 선택이었다. 시바 료타로가 안내하는 헤이안의 풍경 속에서, 나는 낡은 관성을 태우고 다시 달릴 힘을 얻었다. 쿠카이가 자신의 몸이라는 도구를 통해 우주의 질서를 탐구했듯, 이 책은 삶을 다시 사유하게 만든다. 상권이 남긴 여운을 안고, 이제 쿠카이의 사상이 완결되는 하권의 숲으로 발을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