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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소금 Nov 02. 2021

물어봐선 안될 것을 묻는 사람들

아직도 무례함을 솔직함이라 착각하며 사는 너에게!


“언니,
언니는 그 오빠랑 OO오빠(나의 남편)랑
양다리 걸친거에요? 그 사람들이 언니 욕을 하길래 제가 대신 해명해주고 싶어서요~”




우리 결혼을 축하하는 동창들을 만난 자리였다. 다 같이 식사를 하려고 둘러앉은 반가운 테이블에서 누가 나에게 물었다. 그때의 나는 너무나 어렸었고 그런 질문에 센스 있고도 날카롭게 답해줄 대처능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말이 길어졌다. 좀 더 깔끔하게 대답을 할걸, 아니면 그냥 무시할걸. 지금 와서 후회를 한다.

해명? 내가 이 좋은 날 왜 너한테 이런 무례하고 쓸데없는 질문에 해명을 해야 하니? -라고 말해줄걸 쩜쩜쩜(...)



학교에서 남편을 만나기 전 몇 번의 짧은 데이트를 했던 선배였다. 나를 좋아했고 나도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라 착각하며 한 서너 번 만났다. 그 당시에 최고로 유행했지만 나는 싫어했던 드라마의 남주 대사를 따라 하고 나한테 그 말투를 따라 쓰곤 했다. 자기와 데이트 한걸 학교 사람들이 알게 되면 자기 후배들이 아마 난리가 날 거라고 했다. 내가 부러워서. 그 사람이 묻지도 않고 내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게 싫었다. 나는 점점 그 사람이 불편했다. 동기인 남편을 만나서는 한식집에서 공깃밥을 두 그릇씩 시켜 된장찌개에 비벼먹는 내가 그 사람을 만나면 배가 안고프다고 거짓말을 하게 됐다. 그 사람 앞에서는 수저를 떠서 입으로 욱여넣는 그 입벌림 조차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할 수가 있을까? 나는 내가 가장 솔직하게, 나답게, 자연스럽게 지낼 수 있는 편안한 남편을 사랑하게 됐다. 그 선배와 우리 남편을 두고 양다리 따위 걸친 적 없었다.



선배와의 관계가 완전히 정리된 후 남편을 만났지만 그 사람과의 끝은 역시나 안 좋았다.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는 내 말을 계속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결국은 나에게 “너 잘 먹고 잘살아라.” 했던 기억이 난다(그 축복을 받고 지금 잘 먹고 잘 사는 중).

나한테 그런 말을 던지면서 관계가 정리된 사람에 대해 묻는다. 이제 막 결혼해서 가장 행복한 신혼을 누리고 있는 나에게. 나보다 옆에 앉은 남편이 더 민망해하며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그 순간 행복한 우리 두 사람을 얼굴 빨개진 ‘민망한 사람들’로 만든 그 질문을, 모두가 다 어색해진 그 공기를 잊지 못한다.



정말 궁금했다면, 내가 모르는 그 어떤 자리에서 진정 내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면 나한테 먼저 개인적으로 물어봤을 거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나의 과거를 캐내는 질문을 하는 건 무언가라도 붙잡아 나를 끌어내리려는 의미 밖에는 남질 않았다.




“이거 새로 샀구나 이건 얼마야?
너희 남편은 한 달에 얼마나 벌어?”



나를 만나거나 우리 집에 놀러 오면 나의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며 안부를 묻기보다, 늘 오래되어 새로 바꾼 가전이나 나의 물건들, 내가 입은 새 옷에 관심이 더 많은 친구가 있었다. 이건 얼마야, 저건 얼마야 정말 피곤하게도 한 번도 빼놓지 않고 가격을 묻던 그 아이는 우리 부부 앞에서 결국 남편의 한 달 수입이 얼마인지까지 물었다. 그 순간 내가 왜 불쾌했을까 정확한 이유를 설명할 순 없겠는데 ‘이런 게 관계에 선을 넘는 거구나.’를 배웠다. 남편은 당황해서인지, 솔직하고 싶어서였는지 그 순간 짧은 침묵을 깨고 침착하게 “얼마를 번다.”라고 대답을 했다. (오... 주여 그걸 왜 말해줘?!라고 하고 싶었지만 몇 년도 더 지난 일이다.) 지금도 나는 타인에게 전혀 궁금하지 않은 것들이 왜 그들은 그토록 궁금했을까,



며칠 전에 “나의 솔직함을 약점 삼는 부류가 있었다. 솔직할지언정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비겁하지 않았던 나를...” 이라고 쓴 그 친구의 SNS를 봤다. 자기의 진실됐던 순간을 어필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는 아주 오래전 내가 받았던 그 질문이, 잊고 살았던 그 질문이 확 떠올라서 나도 글을 쓰고 있다.

‘아, 너는 아직도 그런 걸 너의 무기로 삼고 사는구나..’


20대 때는 그런 말을 들어도 그래,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사니까. 하면서 쿨내를 풀풀 풍기고자 노력했다. 확실히 지금보다 더 에너지가 남아돌았던 것 같다. 서른의 언덕을 넘어보니 그건 솔직함도 진실함도 아니다. 용기는 더더욱 아니다. 굳이 그게 용기어야 한다면 남에게 대놓고 상처를 줄 수 있는 용기는 맞을 것. 살다 보니 그런 종류의 솔직은 무례함이라는 결론이 난다.



나이가 들수록 은근히 남을 비하하며 즐거워하는 사람, 비꼬는 사람, 아직도 미성숙함과 무례함을 솔직함이라 착각하며 사는 사람들과 멀어진다. 멀어지고 싶다. 친절한 사람들, 한번 더 남을 배려하는 사람들, 관계에 있어서 아주 기본적인 ‘남 눈치’를 적당히는 볼 줄 아는 사람과 어울려 살고 싶다.



살다 보면  만나겠지. 물어봐서는 안될 것들을 가감 없이 물어보는 사람들, 그런 몇몇을  만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전과 달라진  있다면 나는 이제 관계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한 선을 긋고  선을 지키며 산다.  귀와  마음을 지켜내는 , 쓸데없이 나의 에너지를 탕진하고 고갈시키지 않으며   있는 엷은 막을 지키며 사람을 만난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는 것은 천박함이다.
당연히 할 수 있는 말도 참는 것은 성숙함이다.

서른이 되던 해에  메모장에 쓰인 말이다. - ‘어른다운 어른이라 제목 붙여주었다. 하지 말아야  말은 하지 않고 당연한 말도 때로는 참으면서 이렇게 어른답게   있다면 정말 좋겠다.


#인간관계 #무례함 #친절함 #어른의말 #불편한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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