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한 폭력, 그리고 무지한 한 여자의 이야기...
비슷한 제목의 책들이 있었다. 레몽 장의 『책 읽어주는 여자』, 카를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 그리고 같은 제목의 서하진의 소설집 『책 읽어주는 남자』까지... 뭐 이렇게 거론하는 것에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 책, 밑줄, 그리고 남자이거나 여자가 등장하는 소설들은 모두 그럴싸하다, 는 걸 말하고 싶다는 이야기...^^
결혼 1년차 즈음이던가, 아내는 잠자리에서 내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고는 했다. 아니 솔직해져야지, 실은 그 반대였다. 나는 새벽 학원 때문에 일찍 자야하는 아내를 옆에 놓고 소설을 큰 소리로 읽고는 했다. “그냥 속으로 읽으면 안돼?” “당연히 안 되지... 너처럼 책 안 읽는 아내에게는 이 수밖에는 없는 거지. 안 그러면 넌 로맨스 소설과 일본 남자 동성애 소설밖에 모르는 비뚤어진 아내가 될 수도 있으니까.” 사실 먼저 잠자리에 드는 아내에게 귀여운 심술 정도를 부리는 거였지만 난 그렇게 아내를 괴롭히고는 했다. 아, 이게 아닌데...
그러니까 소설 속 열다섯 살 소년 미하엘은(그는 어느날 황달에 걸려 길에서 구토를 했고, 그런 그를 한나가 집에 데려다 씻겨 주었다) 서른 여섯 살의 여인 한나에게 책을 읽어준다. 물론 미하엘이 한나를 괴롭히기 위해 읽는 것은 아니다. 혈기왕성한 미하엘은 당장이라도 한나를 품고 싶지만 한나는 한사코 책을 먼저 읽어달라고 말한다.
“그 전에 먼저 내게 책을 읽어줘야 해.”
한나는 덤벼드는 미하엘을 다독이며 언제나 그렇게 말하고는 한다. 미하엘과 한나는 책을 읽어주는 행위를 시발점으로 그들 사이의 관계를 차곡차곡 질서정연하게 진행시킨다.
“내가 그녀의 집에 올 때 함께 가져온 욕망은 책을 읽어주다 보면 사라지고 말았다. 여러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어느 정도 뚜렷이 드러나고 또 그들에게서 생동감이 느껴지도록 작품을 읽으려면 집중력이 꽤 필요했기 때문이다. 샤워를 하면서 욕망은 다시 살아났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 - 이것이 우리의 만남의 의식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가 순탄하기만 할리는 없다. 비밀에 쌓인 듯한 그녀의 시간들, 서로를 향한 오해와 다툼, 새롭게 만난 나의 친구들과 나의 시간들까지, 모든 것은 두 사람을 단어와 단어 사이처럼 띄엄띄엄 멀어지게 만들고 결국 한나는 친구들과 있는 나를 먼발치서 한 번 일갈하고(나는 그녀에게 달려가지 않고) 사라져버린다.
책은 모두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까지가 1부의 줄거리다. 1부만 놓고보자면 열다섯 소년과 서른 여섯 여인의 나이의 차이를 뛰어넘은 로맨스 소설인가, 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실은 소설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법대에 진학한 나는 어느 날 유태인 수용소에서 벌어진 사건의 재판을 스터디하는 그룹에서 활동하다 법정에서, 그것도 피고인석에 앉은 한나를 발견하게 된다. 처음 만났을 때도 이미 늙어 있었을, 하지만 이제는 더 늙어버린 한나를 보는 순간 나는 과거의 죄책감이 고스란히 살아나고, 복잡한 심경에 빠지게 된다. 다른 피고인들과는 달리 자신의 죄를 스스럼없이 인정해버리는 한나에게서 나는 이제 그 비밀을 알게 된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읽고 쓸 수 없음을 숨기기 위해 모든 죄값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받아들여버리고 있다. 나는 이러한 그녀의 비밀을 폭로하고 그녀를 구할 수 있지만 결국 그녀의 비밀을 감추고 그녀가 원하는대로 그녀 스스로 죄값을 받을 수 있도록 방치한다. (음, 아무래도 스포일러다)
그리고 소설의 3부에서 나는 결혼과 이혼을 거친 후 감옥에 있는 그녀에게 책을 녹음한 테이프를 보낸다. 아무런 편지도 보내지 않고, 나의 테이프에 대한 감사의 편지를 그녀가 보냄에도 불구하고 답장을 쓰지 않으며 꾸준히 녹음 테이프만을 보낸다. 드디어 그녀의 갇힌 몸이 세상을 향해 나오는 날, 그런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감옥을 향해 내가 출발하던 날... 모든 상황은 다시 한번 역전 혹은 새롭게 종료된다.
사실 소설의 처음 부분에서는 흠칫 흠칫 하고는 했다. 붉은 겉표지에 가슴이 노출된 여자만으로도 부담스러운데 그 내용도 부담스러웠던 탓이다. 게다가 이십여년의 차이를 둔 로맨스라는 게 시체말로 ‘쿨’하기보다는 너무도 ‘핫’하기에 책 읽는 남자로서 고개를 끄덕끄덕 수긍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즈음에서 소설 읽기를 포기하면 그야말로 낭패가 된다. 2부, 그리고 3부로 이어지며 소설은 인류 역사의 오점인 홀로코스트, 그리고 그 거대한 폭력의 한 가운데, 무지하기 그지없었던 폭력의 한 가운데에 있었던 무지한 한 사람으로 존재했던 한 여자와 그 여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전생애를 살펴야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독일인 특유의 묵직하고 철학적인 사유의 뿌리깊음이 부담 속에서도 굳건하니 꽤 읽을만한 소설이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 김재혁 역 / 책 읽어주는 남자 (Der Vorleser) / 이레 / 269쪽 / 2004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