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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Dec 16. 2024

데이빗 크로넨버그 <이스턴 프라미시스>

도발의 수위는 낮아졌으되, 인간을 향한 냉정한 시선은 여전...

  <비디오드롬> 시절부터 즐겨보던 감독인데, <크래쉬>와 <엑시스텐즈> 이후로는 그의 작품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당시와는 확연히 달라진 경향의 새로운 영화를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인간 내면의 숨겨진 폭력성을 향한 그의 시선은 여전하지만 그 도발의 수위는 한층 낮아지고 얌전해진 듯하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매체들을 도구로 사용하면서도 우리를 도발했던 감독은 그렇게 (이전과 비교한다면) 한없이 일상으로 돌아간 듯하다.

  하지만 감독에게 아직 인간은 폭력적이고, 그 폭력은 언제나 불평등하다. 육체적 그리고 사회적인 야만으로부터 비롯된 폭력은 그러나 그것이 자기 내부를 향하거나 자기 가족(혹은 유사 가족이랄 수 있는 조직)을 향하게 되는 경우에는 한없이 온순해진다. 물론 이러한 폭력의 모순은 다시금 자기의 영역 바깥을 향할 때 더욱 잔인한 폭발력을 가지고 표출될 수밖에 없으니, 이러한 폭력의 야만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소불위의 파괴력을 지니게 된다.

  영화는 이발소에서의 면도날 살인 장면으로 시작된다. (아, 다시 떠오르는 <스위니 토드>의 악몽...) 이발소 의자에 앉아 키득거리던 남자는 어린 청년에 의해 부지불식간 목이 그어져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화면이 바뀌어 이번에는 한 어린 소녀가 편의점에 들어오더니 하혈을 시작한다. 병원으로 옮겨진 소녀는 결국 숨지게 되고, 아이만이 덩그러니 남겨지게 된다.



  그렇게 전혀 접점을 찾기 힘든 두 사건으로 시작된 영화는 (그러니까 약간의 미스터리가 가미된...) 조직의 망나니 아들인 키릴을 보좌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운전사 니콜라이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님이시다...), 그리고 얼마전 유산을 한 경험을 한 탓인지 어린 소녀의 남겨진 아이를 무심코 보아넘기기 힘들어하는 조산원 안나를 통해, 동유럽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런던에 둥지를 틀고 있는 범죄 조직 ‘보리 V 자콘’으로 모여진다. 


  죽은 소녀가 남긴 일기장을 통하여 밝혀지는 조직의 치부, 한없이 온화한 표정으로 자신의 식구를 돌보지만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서는 비열한 짓도 서슴치 않는 조직의 보스, (보스의 과보호 탓인지) 비뚤어지고 약해빠졌지만 보스의 아들로써 나름 권위를 세우기 위해 안달하는 보스의 아들, 피폐해진 동유럽의 고향을 등지고 살아보겠다고 유럽의 대도시로 흘러들어와 범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소녀들, 이민 2세대로 자리를 잡았고 이들 소녀들을 향하여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조산원 안나와 안나에게 호감을 느끼며 조직의 와해(혹은 조직의 이전)를 목표로 삼고 있는 듯한 니콜라이...

  영화는 범죄 미스터리 스릴러물이라는 외양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빗 크로넨버그 판의 <무간도>라고 불러야 할 반전과 함께...) 색다른 질감을 선보인다. 서유럽 속의 동유럽 마피아라라는 색다른 대상을 통하여(몸에 새겨진 문신만 보고서도 범죄자의 히스토리를 알 수 있다는 그들 러시아 마피아의 생리도 흥미롭다) 감독이 보여주는 폭력의 양상들이, 음습한 화면 속의 현대 도시 사이사이에 촘촘히 배어 있는 느낌이다.

이스턴 프라미시스 (Estern Promises) /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 / 비고 모텐슨, 나오미 와츠, 아민 뮬러-스탈, 뱅상 카셀 출연 / 96분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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