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로 '불안이 영혼을 잠식할 때'가 실현되는...
권여선 「사슴벌레식 문답」
“너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 / 나 어떻게든 그렇게 잔인해. /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아. /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 강철은 어떻게든 단련돼. / 너는 왜 연극이 하고 싶어? / 나는 왜든 연극이 하고 싶어. / 너는 어떤 소설을 쓸 거야? / 나는 어떤 소설이든 쓸 거야” (pp.20~21) 대학 신입생 시절 같은 하숙집에서 룸메이트를 하며 시간을 함께 하였던 네 명의 친구인 정원, 준희, 부영, 경애... 하지만 정원은 죽었고 부영과 경애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나는 여전히 술에 취해 있다. “...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하다가 문득 그럴 수도 있지, 한다. 인간의 자기 합리화는 타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경로로 끝없이 뻗어나가기 마련이므로, 결국 자기 합리화는 모순이다. 자기 합리화는 지기가 도저히 합리화될 수 없는 경우에만 작동하는 기제이니까.” (p.34) 별다른 모순 없이도 무엇이든 뚫고 나갈 수 있던 젊은 시절의 그들이었지만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그들의 ‘사슴벌레식 문답’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최진영 「썸머의 마술과학」
“아이들은 많은 것을 단숨에 외우고 자세하게 기억한다. 규칙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정말 열심히 한다. 소용없다는 이유로 어른들은 더는 하지 않는 일들을 아이들은 한다. 그레타 툰베리는 썸머와 비슷한 나이에 처음 의문을 품었다. 기후변화 문제가 심각하다는데 어째서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지? 그리고 나와 비슷한 낭에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분노를 쏟아내며 연설했다...” (p.83)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제목의 책을 기억한다. 유치원에서 배운 매우 상식적인 행동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세상은 훨씬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소설은 아직 어린 자매인 이봄과 썸머(이여름인데 썸머라고 불리우길 원하는)가 돌아가며 화자의 역할을 한다. 어른들이 사고를 치고 어른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 똑바로 살아가는 것은 썸머이다.
서유미 「토요일 아침의 로건」
로건은 외국계 회사에서 임원으로 있다. 그의 회사의 우두머리는 외국인인 스티브이고 그가 부임한 지 사 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로건은 토요일마다 스터디룸을 빌려 젤다와 영어 수업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영어 수업을 한 지도 사 년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로건은 젤다와의 수업을 그만 두려고 한다. 영어 공부를 그만두려고 한다.
최은미 「그곳」
말리산에 있는 말리산 공원 그리고 국민체육센터를 그곳으로 삼아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이다. 나는 그곳에서 눈썹 문신을 한 여자로부터 팥과 천일염을 받았고, 동네 친구인 수석 씨와 말리산 공원을 찾아갈 때가 있다. 여름이 되고 체육센터가 폭염대피소로 지정된 다음에도 예전처럼 그곳을 찾는데, 더위를 피해 그곳으로 온 이재민들의 질문에 답변을 해주고, 그러다가 자율 방재단 가입을 권유받는다. 그 사이 농가를 탈출한 곰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말리산으로 들어가고, 나는 여전히 말리산과 공원 그리고 다목적 체육센터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구병모 「있을 법한 모든 것」
C는 꿈을 꾸고 꿈 속의 남자는 호텔에 장기 투숙 중인데, 남자는 자신의 방을 청소해주는 하우스 키퍼와 쪽지를 주고 받는다. 사실 C는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위안을 주는 밝고 가벼운 로맨스 콘텐츠’라는 제안서를 받고 테마 단편소설 앤솔러지에 포함될 소설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 중이었다. 콘텐츠와 콘텐츠를 작성하는 사람과 꿈과 현실이 좌충우돌하는데, 읽기에 쉽지는 않다.
손보미 「끝없는 밤」
블륜이 넘실대는 소설이다. 소설의 소재에서 주변부로 물러난 불륜인데, 그 불륜이 거친 바다 위의 요트를 타고 넘실댄다. 젊은 시절 사주 보는 남자에게서 들었던 (엄청난) 부자와의 결혼은 실현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중산층에서는 상층부에 위치하는 정도이고, 그렇다보니 여기 요트에서의 만남에 초대를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왠지 그녀의 삶은 바닥에 잘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부유한다. 수의사와의 관계, 학교 때 선배인 그와의 관계는 그러한 부유의 결과물인지 모른다.
백수린 「빛이 다가올 때」
“... 큰이모는 시각을 잃은 후 얻게 된 예민한 다른 감각들을 활용해 큰이모가 느끼는 풍경을 언니에게 묘사해주었다. 바람이 어제보다 부드럽고 가볍구나. 눈 때문인지 사방에서 지난여름 우리가 쪼개 먹었던 수박 향이 나는구나. 까치 소리가 평소보다 가깝게 들리는구나...” (p.318) 큰이모의 딸 인주 언니는 어려서부터 엄마를 도왔다. 큰이모가 돌아가시고 나와 인주 언니는 뉴욕이라는 공간에서 잠시 생활권이 겹쳤다. 그리고 그 시절에 나와 인주 언니는 뉴욕의 여기저기를 다녔고, 나는 인주 언니의 생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권여선, 최진영, 서유미, 최은미, 구병모, 손보미, 백수린 / 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 문학동네 / 351쪽 /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