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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광 《낙서문학사》

늘어난 비유가 입담을 대신할 때...

by 우주에부는바람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와 능청스러운 시골 이야기로 젊은 작가답지 않은 넉살을 보여주었던 김종광의 네 번째 소설집... 작가는 언젠가부터 애초 자신이 특기로 삼았던 소재들인 (항상 무언가 부족해서 도시인들에 비하여 약삭빠르지 못하다고 여겨지던) 시골 사람들의 낙관과 지혜로움으로부터 벗어나서 보다 전방위적인 소설 쓰기를 하고 있다.


「율려 탐방기」.

홍길동이 건설했다는 상상 속의 나라 율려국으로 떠나는 혼주지리나라 학원생과 선생님들의 여행기... 부모의 혜택을 입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학원생 아롱이에게는 꼼짝도 하지 못하지만, 섹스를 자신들 나라의 주수입원으로 삼는 율려국에서 나름대로 접대를 받는 학원 선생님들... 여행에 참가한 구성원들의 입을 빌려 까발려지는 어디를 가도 변함없는 위선 가득한 세상에 대한 일침...


「낙서문학사 창시자편」.

“녀석은 첫 작품부터 자신이 낙서를 쓴다는 것을 분명히 했어요. 지금은 그런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없지만, 녀석의 살아생전에는, 녀석의 낙서를, 시나 수필이나 소설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죠. 심지어는 희곡이나 시나리오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기존의 모든 문학과 비슷하지만 어쨌든 전혀 다른 낙서 문학을 표방한 유사풀의 일대기를, 유사풀의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풀어헤친다. “시는 시화호처럼 썩었고, 소설은 폭격 맞은 산처럼 황폐해졌고, 수필은 문학이기를 포기했고, 희곡은 연극의 노예가 되었고, 평론은 출판사의 애인이 되었습니다.” 기존의 모든 장르들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유사풀이 창조한 낙서문학... 기존의 문학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면서 다음 소설인 발흥자 편으로 이어진다.


「낙서문학사 발흥자편」.

창시자편이 기존의 문학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면 이번 소설에서는 아예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허와 실, 혹은 문학 권력의 현실을, 성철호라는 낙서문학을 이용하려 했던 인물을 통해 적나라하게 해부한다. 이번 소설 또한 성철호라는 인물은 작품 속에 전혀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바로 그 성철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낭만 삼겹살」.

“... 첨엔 이승에서 60년 이상을 살아본 적이 없는 그 귀신들이 하염없이 무서웠는데, 몇 해 겪다 보니 차차로 익숙해졌고, 어느 결엔가 자연스럽게 말도 섞게 되었다. 마누라, 자식에게도 할 수 없는 말들을 귀신들은 잘 들어주었고, 적절히 위로해줄 줄도 알았던 거다. 해서 일부러 귀신들을 불러내어 떠들어대는 경우도 많았다.” 귀신과 대화를 나누는 김씨에게 올해는 특히 싱숭생숭 하다. 키우던 송아지 세 마리가 연거푸 어처구니 없게 죽어버린 것이다. 왕년에 탄광촌으로 호사를 누렸던 시골 동네를 중심으로 특유의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애틋한 시골의 인심을 드러내는 소설... “내가 뭐는 먹을 수 있간.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많이 먹어. 난 말여, 자네 때문에 참 맘이 편혀. 자네가 책임지고 내 초상은 낭만적으로 치러줄 것 같아서 아무 걱정이 없단 말여.”


「김씨네 푸닥거리 약사」.

김씨네가 약국이라도 하는 것인가 했는데, 이 약사가 실은 略史이다. “잘 다듬어서 책에 실리는 소설로 만들어봐라. 그렇게 할 수 있잖냐? 내가 소설 하나를 준 겨. 그리서 너를 주인공으로 한겨. 너 고치기 편하라고.” 평생에 걸쳐 오서산의 바위신령에게 (혹은 소교 아줌마에게) 빌고 풀어낸, 아내이자 엄마인 여인의 이야기가 결국 김씨를 통해 소설의 종자 이야기가 되고, 그것이 소설가인 김씨의 아들에게 전해진다.


「단란주점 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를 모르면 그야말로 말짱 도루묵인 소설... 그래서 작가 또한 소설의 진행 중간중간 등장하여 스타크래프트를 너무 모르거나 너무 많이 알고 있다면 그만 읽으라고 엄포를 놓는다. 저그족을 이용한 스타크래프트 연습 게임과 오버로드/가로 지칭되는 주인공의 하룻밤 단란주점 고생기가 오버랩되며 이야기는 진행되지만, 그것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 듯하다.


「절멸의 날」.

매춘을 이용해서 관광객을 모으고, 또 그렇게 관광객이 모이자 축구라는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며 성장한 율려국... 섹스와 스포츠를 통해 마비되었던 율려국에 봉기가 일어나지만 그것이 또 일일천하로 끝나게 되고... 민주주의라는 이념이 가지고 있는 취약점에 대한 탐구를 기사 형식의 소설을 통해 풀어내고 있다.


「쇠북공기전 망징패조편」.

2021년, 과거에는 물을 판매하였으나 이후 공기를 판매하면서 사세를 확장한 서씨 집안의 쇠북공기가 어떻게 성장했고, 또 어떻게 망해갔는지를 조명한다.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에 조금, 자본주의 사회의 기업이라는 것에 조금, 경영자와 노동자의 관계라는 것에 조금 이야기를 맞대어 놓고는 있는데...


「조싼은 헤맨다」.

‘엽기’를(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지는 나오지 않는 듯... 물질적인 쓰레기와 비슷한 어떤 정신적인 쓰레기를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처리하는 언론군에는 수년간 한없이 쌓여 이제는 남자의 성기를 닮은 모양을 한 ‘조싼’을 품고 있는 ‘엽기 매립장’이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인터넷 중독자인 혼주고등학교의 정호채 교사는 이 ‘조싼’이 혼주시로 옮겨질 것이라는 정보를 인터넷으로부터 입수하게 되고... 이를 인터넷을 통해 여기저기에 알린 결과 혼주시에는 대책위원회가 꾸려지며 사람들은 ‘조싼’을 들여오지 않기 위한 결사 항전을 이어간다. 결국 ‘조싼’을 들여오지 않겠다는 시장의 구두 약속으로 시위대는 해산하지만, 글쎄 ‘조싼’이 혼주시로 들어오는 것은 정말 막아진 것일까... 쓰레기 같은 정신의 보고이며 처치곤란인 언론군의 ‘조싼’이 드러내는 비유가 좀더 정밀했으면 좋았을 것을...


시골과 도시를 가리지 않고 구석구석 눈길 보내지 않는 곳이 없는 듯한 다양한 소재를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구사하기도 하고, 여러 명의 나레이터를 둔 다중 시점, 신문의 기사 형식을 띤 나레이션을 보여주는 등 다양한 형식적 실험도 마다하지 않는 작가... 김종광은 스스로 발굴하고 시도하며 자신의 소설적 지평을 넓혀가며, 동시에 간간히 자신의 특기인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추임새 삼아 독특한 향을 품은 소설을 쓰고 있다.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 또한 그러하며, 율려나 혼주와 같은 실재하지 않는 나라, 혹은 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임에도 현실과 유리되지 않는 독서를 가능하게 만드는 비유가 가득하다.



김종광 / 낙서문학사 / 문학과지성사 / 354쪽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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