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응준 《약혼》

인공의 낚시터에서 낚인 듯 언제나 여전한 시적 감수성...

by 우주에부는바람

시로 먼저 등단한 작가의 이력은 그의 문장들에서 보이는 단어와 단어 사이, 혹은 문장과 문장 사이로 툭툭, 벼룩처럼 눈 깜짝할 새에 이동해버리는 추상적인 상념들을 들여다보며 다시금 상기된다. 읽는 이의 마음을 깊게 가라앉히는 작가 특유의 문장은 여전한데, 그것이 어째 융숭 깊지 않다. 어린 나이에 미적분을 깨친 수학 천재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미적분을 풀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미적분보다 낮은 수준이어도 좋으니 무언가 다른 포인트의 실력을 보고 싶다.


「내 어둠에서 싹튼 것」.

“그녀가 자살한 다음날 나는 만취해 인사불성이 되었다. 내가 답답했던 것은 아무도 내가 그녀의 애인이었음을 믿어주지 않는 더러운 상황이었다... 내가 그녀의 애인이라는 것은 그녀만이 아는 진실이었다. 나는 혈관에 녹이 스는 것을 느꼈다...” 팔년 동안의 고시 공부를 이제 막 포기한 나는 파리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여자를 만난다. 그리고 고시 낙오생인 나와 비교해 너무나 우월해 보이는 그녀는 자신이 구년 전부터 나를 사랑했음을 고백한다. 그렇게 세 번을 만나고 서로 애인이 된 지 칠일 째 되는 날 그녀는 자살한다. 삶의 혹은 인간의 표면, 그리고 그 이면 사이의 간극에는 어떤 심연이 있다는 것일까...


「약혼」.

“... 나는 해원이 그토록 보이길 꺼려했던 얼굴을 일부러 보지 않았다. 대신 여섯 번째 손가락이 잘려나간 흉터가 뚜렷한 그녀의 왼손을 흰 천 밑으로 잠시 잡아주었을 뿐이다...” 나의 절친한 친구인 병우의 약혼녀였으며, 여섯 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태어나 그 중 하나를 잘라냈으며, 카페 ‘자서전’의 주인이었던 해원의 죽음... 안개가 잔뜩 긴 호숫가의 숲처럼 소설 속의 바스락,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였지만 작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바를 정확히 포착하지 못했다. 사라진 사람들, 하지만 언젠가 만날 것 같은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설의 마지막, 나는 화장되어 흩뿌려진 해원과 마주칠 수 있을 따름이다.


「네가 계단에 서서 나를 부를 때」.

“창 밖 청어떼처럼 물결치는 포플러 나뭇잎들을 바라보면서 수화기를 들고 있다.” “우리는 괴로워 죽고 싶다고 악쓰며 사랑하는 이를 죽인다. 영혼과 후회를 맞바꾸는 것이다...” 이혼한 부모와의 헤어짐 이후 자신의 손으로 크고 싶었던 내가 찾은 간호조무사 양성학원에서 만났던 해령... 하지만 나는 계단에 서서 나를 부르는 해령을 뿌리쳤고, 그녀와 헤어진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시간이 흐른 뒤의 조우... 결벽증이 있던 해령의 방은 이제 도저히 예전의 그녀를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지저분하다.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바람은 아마도 지구상의 동물 중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있는 속성일 터... 그렇게 요령부득의 동물인 인간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방법을 탐구하는 것만 같다.


「애수의 소야곡」.

“... 고양이는 넓이보다는 구조에서 재미를 느끼는 동물이에요. 파고들거나 뛰어오를 장소를 마련해주면 실내에서도 충분히 행복해하죠...” “... 고양이의 조상은 사막에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고양이는 열을 감지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 수염이 다 타버릴 정도로 불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 흔하다. 그러고보면 고양이와 나는 의외로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나는 불에 그을린 내 청춘을 후회한다. 나는 스승의 여자와 사랑했다.” 위계가 너무나 분명한 무도의 세계에서 자신의 스승의 여자를 사랑함으로써 스스로에게 형벌을 지운 나...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이제 그 형벌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한다.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

“... 당신을 새겨두고 싶어서. 한 남자의 정액을 삼킨 여자는 그이를 영원히 못 잊는대.” 내가 중국에서 만난 금화는 나의 차가운 성기를 입 안에 넣으며 그렇게 말한다. 퇴폐적인 탐미주의를 지향하는 듯한 작가가 보여주는 을씨년스러운 에로틱함의 모양은 이렇다.


「황성옛터」.

“... 비록 실수였지만 애인이자 친구를 살해했다는 죄책감마저, 상쾌하고 의젓했던 그녀의 천재가 재(災)로 변한 것에 비하면 견딜 만하다. 스러진 그 빛은 그녀의 존재 자체이고 미래였다. 그녀 마음의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것이다.” 영민했던 내 친구 현경은 그렇게 마음의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이후 정신이상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현경과도 친구인 수담과의 결혼을 앞둔 나는 그 결혼을 포기하고 현경에게 청혼을 한다. 살다보면 어느 순간 우리들 모두는 폐허 같은 시기를 겪게 된다. 황성옛터처럼 뒤돌아 보게 되고, 또 자꾸 확인하게 되는 우리들 마음의 폐허 속을 향한 작가의 시선은 언제나처럼 스산하다.


「어둠에 갇혀 너를 생각하기」.

의사로부터 폐암말기를 선고받고 아직 사랑의 유효기간이 남은 여자와 헤어진 나... 하지만 그렇게 내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을 때, 내가 신장을 넘겨 준 적이 있던 적이 있던 승희가 서둘러 세상을 등졌다는 사실은 소설의 말미에 가서야 등장한다. 아찔한 반전을 노린 작가의 의도는 충분히 납득이 가지만...


「나의 포도주와 그의 포도나무들」.

“성경은 대중의 흔한 착각과는 달리 원본이 없고 다양한 사본들만이 존재하기에 조금이라도 더 좋은 본문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인 본문비평이 있어야 하고,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 등이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를 연구하는 언어비평이 있어야 하겠으며, 성경을 역사 속의 산물로서 분석하는 역사비평이 동원되어야 한다...” 음악을 가르치는 내게 있어 아버지나 다름없는 서목사는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다. 그리고 나는 기존 교단과 다른 생각으로 자신의 신을 섬겼던 서목사의 사상을 이렇게저렇게 구성해본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 서목사가 자신을 내친 기존 교단 사람들의 판단을 향해 ‘모함이 아니었다.’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되기는 하지만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한 작가 나름의 성찰...


「인형이 불탄 자리」.

의대생이던 나는 덜컥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바람에 엉뚱한 길로 들어서 스스로를 망쳐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혼하여 아이들을 그 아버지와 함께 브라질로 보낸 나의 이모는 이제 병에 걸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재혼을 준비중이다. 여기에 극우 보수의 사상으로 무장한 여자를 나는 만나고 있다. 가슴 아파할 만한 것들의 총합과도 같은 소설, 속의 극우는 조금 우스꽝스럽다. 그리고 어떤 굴곡이 있었든 그 마지막엔 죽음이 있다. 나의 이모, 미선의 죽음처럼...



이응준 / 약혼 / 문학동네 / 295쪽 / 2006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김종광 《낙서문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