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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소설을 뛰어넘는 소설이 만든 장벽...

by 우주에부는바람

처음 죽음의 한 연구를 접한 것은 아무래도 조금 늦었다 싶은 1994년이거나 1995년이었을 것이다. 당시에 나는 남산 오르막에 위치한 서울예전 문창과에 다니던 지금의 마누라, 그리고 그 친구들과 어울리는 재미에 흠뻑 빠져, 당연히 향해야 할 홍대입구가 아니라 명동역에서 하차하기를 밥먹듯 했다. 그곳에서 학생들의 시를 창문 밖으로 던져버린다는 오규원 시인의 이야기를 듣고, 아름다운 것 밝힘증이 심하다는 평론가 남진우의 이야기를 듣고, 수업시간에 핸드 피씨를 두들기는 소설가 하재봉의 이야기를 들으며 술을 마셨던 시기였다.


그리고 당시의 우리 맴버들 중에는 이미 당시에 서른 서너살이었던 한 형으로부터 이 책을 소개받았다. 아직 읽지 않았다면 꽤 통탄할 일이지만, 까짓꺼 없던 걸로 해줄 터이니 당장 이 책을 읽거라, 라는 요지의 말과 함께 형은 그 소설이 자신에게는 하나의 벽으로 다가선다고 첨언하였다. 그리고 아마도 치기어린 당시의 나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벽이야 뛰어넘으라고 있는 것 아닌가, 아니면 다가가서 오줌 한 줄기 뿌려주거나...


하지만 술자리 때마다 빠지지 않는 형의 책소개는 점점 도를 지나치더니 나중에는 거의 애틋한 하소연에 가까와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별 수 없이 예닐곱살이 빠지는 손아래 동생으로서, 문학하는 후배로서 그런 하소연을 모른 척 하는 것은 동방예의지국의 일원으로 흠잡힐만한 일이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느날 술에 취해 이런 예의범절이 도가 지나치게 나를 들쑤시던 날, 학교 앞의 이어도라는 사회과학서점에 들렀다가 덜컥 책을 사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술기운에도 꽤나 두꺼운 책을 몇 페이지 들추어보고는 입에 거품을 물었다. 이건 뭐 글자는 깨알같고 단락도 가물에 콩나듯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솔직히 당시의 심정은 아이씨 왜 이렇게 좋다는 책은 초반부터 독자의 기를 팍팍 죽이는 게야, 였다. 그리고는 괜스레 죄없는 서점의 주인 누나에게 술깨게 커피나 한잔 타서 달라고 보챘던 것도 같다.


그러고도 며칠이 지나서야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도 전날의 숙취를 이기지 못한 채 지하철에서 고개를 꺼떡거리면서... 하지만 독서의 과정에서 술기운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고, 난 지하철을 한 바퀴 훌쩍 넘어가면서 입까지 꼼지락거리며 책을 읽었다. 아뿔싸 내가 타고 다니는 지하철이 순환선이기 망정이지, 하며서 역에 내렸지만 난 다시금 학생 회관 앞의 벤치에 털썩 주저 앉아 또 책을 읽었다. 봄날 신입생의 면면을 검수하기 위해서가 아니고서는 그렇게 오래 앉아 있을 이유도 없고, 물론 앉아 있어본 적도 없는 그곳에서 나는 죽어라고 촛불 스님의 그 희한찬란한 말투에 흠뻑 빠져서는 헤어나오지를 못했다.


“흐흐으, 아 줄겼읍지, 즐겼읍지, 그렇습지, 재미가 있었습지, 그러느라 말입지, 그 일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말입지, 마음을 가다듬어 가며 했었읍지, 어쨌든 이것 좀 들어 보십지. 꿀물입지...”


기독교와 불교, 연금술과 주역을 그것도 이것들을 그저 입술 추기는 반주 정도가 아니라 거나하게 취할 정도로 제 것으로 만들고 있는 작가가 존재하다니. 게다가 기존의 문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멋대로(하지만 그래서 그 꿈틀거리는 역동성에 휘둘리지 않을 수 없는) 토해내는 진한 육성들은 또 어떻고.


“나는 어찌하여, 햇볕만 먹고도 토실거리는 과육이 못 되고, 이슬만 먹고도 노래만 잘 뽑는 귀뚜라미는 못 되고, 풀잎만 먹고도 근력만 좋은 당나귀는 못 되고, 바람만 쐬이고도 혈색이 좋은 꽃송이는 못 되고, 거품만 먹고도 영롱히 굳어만지는 진주는 못 되고, 조락(凋落)만 먹고도 생성의 젖이 되는 겨울은 못 되고, 눈물만 먹고도 살이 찌는 눈밑 사마귀는 못 되고, 수풀 그늘만 먹고도 밝기만 밝은 달은 못 되고 비계 없는 신앙만 먹고도 만년 비대해져 가는 신(神)은 못 되고, 똥만 먹고도 피둥대는 구더기는 못 되고, 세월만 먹고도 성성이는 백송은 못 되고, 각혈만 받아서도 곱기만 한 진달래는 못 되고, 쇠를 먹고도 이만 성한 녹은 못 되고, 가시만 덮고도 후꾼해하는 장미꽃은 못 되고, 때에 덮여서야 맑아지는 골동품은 못 되고, 나는 어찌하여 그렇게는 못 되고, 나는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난 책을 모두 읽고나서는 애초에 내게 책을 소개한 형을 찾아가 어째서 내게 이 책을 더 일찍 소개하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형은 늦었지만 읽고 감화를 받았다니 기쁘다고 대답했고. 난 재차 어째서 내가 형의 소개에도 불구하고 바로 책을 사서 읽지 않았을 때 멱살이라도 잡아 끌고 서점으로 데리고 가지고 않았느냐고 따져 물었다가, 이번에는 뒤통수를 한 대 맞았다. 그리고 나또한 형과 마찬가지로 어마어마한 벽을 느끼게 되었노라고 그날 먹은 술과 안주를 화장실에 쏟아부으며 실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때 이후 누군가에게서 네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무엇이냐는(뭐 다양한 변주, 예를 들어 가장 감명깊에 읽은 소설, 무인도에 갇혔을 때 한 권의 책만 가질 수 있다면, 집에 불이 붙어 한 권의 책만 가지고 나올 수 있다면, 등등의 변주가 가능하지만) 요지의 질문을 받으면 반사적으로 이 책의 이름을 주워삼킨다. 그리고는 혼자 곰곰히 생각한다. 이거 이렇게 쉽게 이 책의 이름을 주워삼켜도 되는 것일까. 혹시 이렇게 삼켰다가 뒤탈이라도 생기는 게 아닐까.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책을 대하는 사람들은 두 부류이니 걱정할 것이 없다. 하나는 책을 끝까지 읽고 나와 비슷한 감정의 폭풍우를 경험하는 것이고, 둘은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하는 경우이다. 그러니 뒤탈이 생기지 않는다. 왜 진작에 소개해주지 않았느냐고 징징대면 뒤통수를 한 대 때려주고, 나중에 등 두드려주면서 토악질이나 도우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니까 책을 끝까지 읽지도 않고, 시비를 걸거나 하지는 말라는 이야기의 변주이다. 나중에 늦게 소개했다고 울며불며 하지들 마시고, 지금 당장 사서들 보시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책이 벽이 될 수도 있구나, 라고 뼈저리게 느껴보고 싶다면 한번 도전해보시길 권한다.


박상륭 / 죽음의 한 연구 / 문학과지성사 / 1986


ps1.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를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그의 소설 내지는 수필, 아니면 장르불문의 글에서도 재미를 느껴본 적이 없다. 솔직히 말하면 겁이 나서(이거나 아니면 쳐죽일 이놈의 게으름때문에) 『죽음의 한 연구』를 두 번 읽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ps2. 게다가 난 『죽음의 한 연구』를 읽고나서 학생신분에 걸맞지 않은 무모한 치기를 발휘하여 그의 또다른 작품인 『칠조어론』네 권을 한꺼번에 샀다. 그리고 그 첫번째권의 오십페이지에서 읽기를 멈추었다. 이건 아무래도 당시의 나로서는 쳐다보기에도 벅찬 벽이었던 셈이다. 물론 『열명길』이나 『아겔다마』등 다른 책들도 사서 쟁여놓기는 했지만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심지어 빠진 주판알을 모른척하고 수를 셈하듯, 각종 문학 계간지에 실리는 그의 글들도 슬쩍 비껴가기 일쑤이다.


ps3. 하지만 마지막으로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사정은 이렇다. 이 책을 내게 소개시켜준 형의 고향땅인 강릉으로 놀러간 적이 있다. 그리고 그날 4절지만한 창문으로 강릉 특유의 폭설이 내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형이 내게 말해주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가 어느날 죽음의 한 연구를 읽고는 넋이 빠져 너처럼 칠조어론 네 권을 모두 샀다. 그리고 그는 이제 칠조어론을 중앙에 둔 세 개의 책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책장의 책들은 칠조어론을 읽기 위해 필요한 책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물었다. “그래서 그 분은 칠조어론을 읽으셨답니까?” 형이 대답했다. “아니? 아직 칠조어론은 읽지 못하고 사법시험준비는 그만 둔 것 같더라.” 그러니 어떻게 내가 박상륭의 또다른 소설에 범접할 기운을 차릴 수 있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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