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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백수생활백서》

책을 주인공으로 삼아, 독서를 사건으로 삼아...

by 우주에부는바람

2000년,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면서 난 일을 그만두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만큼 책을 읽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조건도 있었는데 아내가 날 거둬 먹여준다는 것... 이렇게 시작된 나의 백수생활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라고 쓸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실은 3년여만에 막을 내렸다. 그 이유는 아내가 날 거둬 먹이는 것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기 때문, 은 아니고 갑자기 아내가 오년 후의 우리들의 삶에 궁금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여하튼 나는 (세상에) 3년이라는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사용하게 해주었던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낌과 동시에 그 시간이 (고작) 3년뿐이었음에 아쉬움을 느낀다. 생의 이력에 이런 시간이 들어가 있는 내가 박주영의 소설 『백수생활백서』에 나오는 주인공 나에게 몰입하기란 그야말로 식은 죽먹기...


“... 사실 내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나는 1년에 최소 300권에서 700권 정도의 책을 읽는다. 지난 10년간 평균은 500권이 아니었나 싶다. 500권이 10년이면 5000권이고, 그렇게 100년이면 5만 권이다. 일생 고작해야 5만 권의 책도 읽지 못한다는 얘기다.”


책 속의 주인공인 나는 그저 책이 좋고 책을 읽는 일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얻는다. 스물 여덟 살의 나는 너무 맛있는 된장찌개를 만들 줄 아는 아빠의 식당에서 (온갖 구박에도 굴하지 않고) 식사를 해결하며 (나 또한 스물 여덟 정도의 나이에 엄마가 운영하는 갈비집의 식탁에 앉아 하루종일 소일하며 책을 읽은 경험이 있다. 물론 구박이 장난 아니었지만...) 갖은 아르바이트를 통해 벌어들이는 모든 돈은 책을 사는 데 소비한다. 그래서 절판된 책을 찾아 누군가를 만나고 그에게서 그 책을 건네받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이 세상이 생긴 이래 모든 인간이 가졌을지 모르는 기억보다 더 많은 것들을 혼자 지니고’ 있다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기억의 천재 푸네스」처럼 나는 내가밑줄 그은 모든 문장을 기억한다. 그 문장들은 내 삶의 순간순간 재생되고 반복되고 변용된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책을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책 속의 문장들을 (영화 속의 대사들도 간혹 포함하여) 인용하기 또한 좋아한다. 친구와 대화를 하는 동안 혹은 혼자만의 사색 동안에도 책 속의 문장들은 여지없이 튀어나온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소설책의 20분의 1 정도는 다른 사람들의 책 속의 문장들로 채워져 있는 것 같다.


“독서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루키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의 책을 모두 읽는 데는 한 달도 걸리지 않는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느냐. 하루키가 좋아한다는 레이먼드 카버를 읽는다. 레이먼드 카버를 읽고 또 그가 마음에 든다. 그 다음은 하루키가 카버를 극찬하듯 카버가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 작가라고 말한 체호프로 넘어간다. 책 읽기의 그물은 그렇게 이어지다가 끊어진다. 레이먼드 카버도 체호프도 죽은 작가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기다려서 나올 새 책이 없다. 죽은 자를 읽는 일은 너무 빨리 끝이 보인다. 그러므로 다시 살아 있는 작가인 하루키로 돌아간다.”


주인공의 책읽기 방식 또한 나는 닮아 있다. (그러니 책 속에 거론된 무수한 작가와 무수한 책들은 내가 읽은 책들과 너무나 닮아 있다.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최종학교까지를 다닌 듯하니 생활권이 겹쳤을 것 같지는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람에서 사람으로, 작품에서 작품으로 건너가는 책읽기의 연결고리는 쉽사리 끊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모두 알고 있는 법이다.


“책을 소유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식은 그것을 쓰는 것이라고 발터 베냐민은 썼다. 나는 책을 소유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여자 친구인 채린과 유희가 등장하고, 남자 친구인 경도 등장하고, 책 읽는 아내를 두었고 주인공과 책을 거래하는 의문의 남자와 단 한 권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쓴 경력의 외할머니도 등장하고, 채린은 이루어질 수 없는 불륜을 저지르고, 유희는 직장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고, 나는 의문의 남자와 미묘한 관계로 발전할 태세를 갖추는 등의 사건도 존재하지만 역시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책이고 가장 중요한 사건은 독서다. 그리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소설을 지지한다. 책이라는 주인공과 독서라는 사건이 있으므로...



박주영 / 백수생활백서 / 민음사 / 2006



책 속에 등장하는 무수히 많은 작가와 작품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다니엘 페나크 『소설처럼』,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태평양을 막는 방파제』 『북중국의 연인』, 파트리크 모디아노 『서커스가 지나간다』, 무라카미 하루키 『렉싱턴의 유령』「토니 다키타니」「얼음사나이」, 존 란체스터 『아주 특별한 요리 이야기』, 엘빈 토플러 『제3의 물결』, 마르쿠스 베르너 『아버지의 연인』, 카뮈 『이방인』, 와타야 리사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인스톨』, 파트리크 모디아노 『잃어버린 거리』, 쓰지 히토나리 『사랑을 주세요』, 파스칼 키냐르, 구효서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프랑수아즈 사강, 요시모토 바나나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마갈리 가르시아 라미스 『일주일은 칠일』, 강석경 『숲속의 방』,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억의 천재 푸네스」, 폴 오스터 『달의 궁전』『브루클린 풍자극』, 『정사』,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아멜리 노통브 『살인자의 건강법』, 르 클레지오 『황금 물고기』, 레몽 장 『오페라 택시』『책 읽어주는 여자』『카페 여주인』,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여자, 전화』, 김영하 『포스트 잇』, 움베르토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빨강머리 앤』, 『작은 아씨들』, 쉼보르스카 『여인의 초상』, 에쿠니 가오리 『울 준비는 되어 있다』『낙하하는 저녁』, 루이스 세풀베다 『감상적 킬러의 고백』『핫라인』, 에단 호크 『웬즈데이』, 미셸 투르니에, 로맹 가리, 장 에슈노즈, 레이먼드 카버, 커트 보네거트, 리처드 브라우티건 『미국의 송어낚시』『워터멜론 슈가에서』, 마르쿠스 T. 키케로, 박상우, 윤대녕, 신경숙, 공지영,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배수아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늦어도 11월에는』, 더글러스 커플런드 『신을 찾아가는 아이들』, 『안나 카레니나』, 『보바리 부인』, 시모 『릴라는 말한다』, 가네시로 가즈키 『레벌루션 No.3』, 주니비에브 브리작 『나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소동파 『마음속의 대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완전한 은둔자」, 『양을 세며 잠드는 책』, 아고타 크리스토프 『50년간의 고독』, 김훈 『현의 노래』, 가타야마 교이치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밀란 쿤데라 『이별』, J.D.샐린저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 잉게보르크 바흐만 『죽음의 방식』,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최승자, 코니 팔멘 『자명한 이치』... 그리고 여기에 잡지인 《로드쇼》《스크린》《키노》, 영화 <밀리언달러 호텔> <정사> <밀레니엄 맘보> <밝은 미래> <귀여운 여인> <첫키스만 50번째> <해피 투게더> <청춘 스케치> <아비정전>, 희곡 베르톨트 베르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가 함께 거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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