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시선에 사로잡힌 우리들의 무진하지 않은 삶...
김훈은 부화뇌동하지 않는다. 김훈은 너무도 담담하게 삶을 그린다. 때때로 너무 냉정한 것 같은 작가의 시선은 어쩌면 그래서 굉장히 믿음직스럽다. 되도록 감정은 자제하고, 무연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의 시선에 사로잡힌 사람의 계급도 계층도 성별도 아무 소용이 없다. 김훈의 시선에 사로잡히는 순간, 그는 아무것도 아닌 그저 인간이 될 따름이다.
「배웅」.
‘저녁반 택시 운전사 김장수(47세)’가 살아가는 궤적... 한때는 소기업의 사장이었던 적도 있었던 그는 이제 영업용 택시를 몰고 있다. 막힌 길 위에서 남편의 부고를 듣는 아내를 싣고 가기도 하는 그의 생활, 혹은 오래전 자신과 같은 직장에서 일했고 외지를 함께 다니다 통정을 나누기도 했던 윤애와의 만남을 위해 손 안에 들어온 돈을 헤아려야 하는 생활... 흘러가버린 세월을 배웅하듯 필리핀에서 살고 있는 윤애를 배웅하는, 택시 기사임을 숨기지 않고 자신의 택시로 공항까지 배웅하는 마흔 일곱 살 김장수의 생활 한 켠을 플래시조차 터뜨리지 않고 아날로그 카메라로 찍어낸 것 같은 소설...
「화장(火葬)」.
“... 아내가 치를 떨던 그 구린내는 본래 음식 깊은 곳에 종양처럼 숨어 있던 냄새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뇌가 온전할 때 맡을 수 없었던 그 냄새가 종양이 번지자 비로소 아내에게 감지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누리고 비리고 향긋하고 상큼하던 냄새들이 아내에게는 모두 구린내로 느껴지는 것은 아닌지를 나는 생각했지만, 아무런 생각도 더듬어낼 수 없었다...” 아내의 죽음을 앞에 둔 전립선염으로 오줌을 제대로 누지 못하는 남편. 하지만 소설은 갑작스러운 추은주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색깔을 달리한다. “... 내 마음 속에서, 당신의 살들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풍문과도 같았습니다...” 화장품 회사의 중역이며 상중인 남편인 나와 같은 회사의 여직원인 추은주를 향해 끊임없었던, 하지만 실재적으로 드러내지는 못했던 연모를 가슴에 품고 있는 나 사이의 간극. 김훈다운 미려한 문체, 너무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스르르 보는 사람을 옆에 앉히고 토닥거리는 듯한, 중년 사내와 죽어가는 그의 아내, 그리고 그가 연정을 품었던 여자의 단상이 정연하다. (예전에 보았는데, 느낌? 달라지지 않았다... 극심한 고통 중에도 개밥을 찾는 그 여자의 모습이 너무 생뚱맞음에도 너무 리얼해서, 문득 김훈에게 경의를 표했다고나...)
「항로표지(航路標識)」.
소라도의 등대장인 김철과 무림전자 재무관리상무 송곤수... 김철은 사직서를 제출해 놓은 상태로 뭍으로 아이를 낳으러 나간 아내를 기다리는 중이다. 무림전자의 파산과 함께 등기이사인 송곤수는 달아난 회장을 대신하여 채권자에게 시달리는 중이다. 컴컴한 어둠뿐인 바다를 향해 빛을 뿜어내어 배의 항로를 잡아주는 등대, 그러면 사람들의 삶의 항로를 잡아줄 빛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등대지기 김철의 자리에 기업체의 상무이사였던 송곤수가 들어옴으로써 마주칠 일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 은근슬쩍 비껴가게 되는 것... 이러한 삶의 행로는, 사람의 의지를 등대처럼 비추는 것은 무엇일까...
「뼈」.
기원사 뒤편에서 발견된 쇠붙이들... AD4세기 무렵의 철제무기들이라고 파악되는 그것들을 조사하는 손길... 그리고 그러한 조사의 일선에 선, 지방 대학의 언저리에서 ‘뚜렷한 생업도 없이 漢籍 한 줄 제대로 읽지 못하면서 학문합네 하는 동네의 변두리에 빌붙어서 허송세월로 나이를 먹어가는 지식인 잡배들’과 같은 오문수와 그의 지도교수인 나... 하지만 그곳에서 발굴된 쇠붙이들은 제대로 된 역사적 인과관계를 찾아내지 못한 채 가야군과 신라군들의 우연한 조우와 작은 전투의 잔존물로 결과지어지고, 그곳에서 발굴된 여자의 뼈는 ‘기원화’라는 이름을 달고 대학의 박물관에 보존된다. 그리고 연구의 종말과 함께 오문수 또한 지도교수이자 선배인 내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자취를 감추어버린다. 살아가면서 별다른 느낌 받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몸의 근간을 이루는 뼈, 인간이 죽고 나서도 짐작할 수 없는 기간동안 남아있게 될 뼈, 그럼으로 살아 근간을 이루지만 죽어서야 겨우 그 의미가 꽃피워지는 바로 그 뼈의 이야기...
「고향의 그림자」.
서툰 강도 용의자인 조동수, 그를 검거하기 위해 자신의 고향인 P항으로 내려간 나, 아직 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나의 딸, P항에서 형이 돌보다 얼마전 요양원으로 모셔진 노망난 나의 어머니... 용의자 조동수의 어머니를 만나고, 도대체 어느 시절인지도 모를 시절에 자신이 지운 아이를 미즈코라는 이름까지 붙여서 베개를 인형삼아 모시는 어머니를 만나고, 나는 P항으로 들어온 어선에서 내리는 조동수를 눈으로만 좇다가 그냥 잡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이후 조동수가 저지른 사건들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결국 경찰직에서 물러나 개인택시를 몰게 된다. 고향의 그림자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렇게 짙어서 삶의 행로조차 바꿀 수 있게 되는 법일 것이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고향, 갖지 못한 현대인들이라면...
「언니의 폐경」.
항공기 사고로 갑작스러운 남편의 죽음을 경험해야했던 언니, 남편의 죽음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런 하혈과 함께 폐경을 맞이한 언니, 남편의 죽음 이후엔 보상금으로 인해 여러 사람들의 다툼을 지켜봐야 했던 언니... 딸의 유학과 함께 내연의 여자가 있다는 남편과 합의 이혼을 하고 아파트를 얻어서 나온 나, 남편과의 이혼 후 남편과 입사 동기였지만 부하 직원이 되어야 했던 남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나... 이제 폐경의 시기에 접어든 두 자매가 간혹 아파트에서 서로의 살 부대끼며 나누는 조근조근한 목소리... 깊다면 깊은 그들의 사연이 만들어가는 작고 늙은 소곤거림...
「머나먼 俗世」.
‘남해 한려수도 서쪽 풍도(風島)라는 섬 안에 있는 해망사(海望寺)’... 해망사의 주지인 난각과 언제부터인지도 모른 채 그곳에서 젊음을 바닷바람에 삭히며 보내고 있던 나, 그리고 1급 시국사범으로 해망사를 피신처 삼아 숨어든 장일식... 하지만 결국 이미 장일식을 알고 있던 주지 스님과 장일식을 신고하고, 지긋지긋하던 섬 생활을 끝장낸 나는 지금 ‘투지의 싸움’이고 적개심의 싸움이기도 한 권투 시합을 하고 있는 중이다. 소설은 그 시절 섬에서 보내던 나의 그 시절의 한 때와 지금 4라운드 권투 시합을 치르고 있는 나의 현재의 한 때를 오버랩으로 보여주고 있다. 결국 링의 한복판에 쓰러지는 나... 그리고 링에는 제약회사의 발기부전치료제인 NIRVANA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열반이라는 뜻을 지닌 ‘NIRVANA의 한복판, V자의 계곡’에 쓰러지는 나와 그런 나의 밀고에 의해 잡혀 나가시던 주지 스님의 ‘성불하여라’라는 마지막 말... 그런데 속세 아닌 곳이 어디 있을까, 싶은 이때에 ‘머나먼’ 속세라니... 김훈의 속내가 주지 스님의 속내처럼 깊어서 헤아리기 힘들다.
「강산무진(江山無盡)」.
탄탄한 중저가 의류업체의 상무로 일하던 나, 김창수는 간암 선고를 받고, 입원 치료(와 죽음까지를)에 대비한 주변정리를 해야 하리라는 진단을 의사로부터 받는다. 그는 회사에 명예퇴직을 신청하고, 이혼한 아내에게 위자료 잔금을 보내고, 어머니의 산소를 없애고(화장을 하여 납골당으로 옮기고) LA에 있는 아들에게로 비행기를 타고 떠난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정리의 과정, 박물관에 들러서 보게 된 조선후기 화가 이문진의 산수화인 <강산무진도>.... 강산무진, 헤아릴 수 없고 다함이 없는 강산... 그에 비하여 제아무리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그 끝이 존재하고야마는 인간의 삶이란 한낱 환영과도 같은 것...
김훈 / 강산무진 / 문학동네 /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