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의 날개짓으로, 맹랑한 상상력으로 날아라...
「무용지물 박물관」.
“10년 정도 대기업의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예술과 판매량은 정확히 반비례한다는 사실이다. 간단한 공식이다. 예술을 위해 제품을 만들면 실패하고 고객을 위해 제품을 만들면 성공한다. 내가 그 회사의 사장이었다면 디자이너들에게 이런 지침을 내렸을 것이다... 예술은 집에 가서 하고 회사에서는 디자인을 해라.” ‘그러게요아가씨’라는 직원과 함께 ‘레스몰 디자인(LesSmall Design)’이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시작한 나는 몸이 축나는 딱 그만큼만 돈을 벌어 그럭저럭 살아가는 중에 메이비라는 별명의 의뢰인으로부터 라디오 디자인을 의뢰받는다. 그리고 그 디자인은 대성공을 거두고 다시 한번 메이비로부터 디자인을 의뢰받는데, 이번에는 그 의뢰를 받아들이지 못한다.“오래전부터 나는 디자인이란 통조림이라고 생각해 왔다. 통조림을 따는 순간부터 내용물은 썩기 시작한다. 디자인이 완성되어 제품이 출시되는 순간, 디자인은 이미 낡은 것이 된다...” 자신의 디자인이 메이비가 하고 있는 시각 장애인을 위한 라디오 방송에 비한다면 얼마나 추상적일 따름인지 느꼈기 때문일까...
「발명가 이눅씨의 설계도」.
“... 전골을 먹는 도중에 한마디도 하지 않던 이수연 기자는 밥그릇이 깨끗하게 비워지자 숟가락을 놓으면서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익사 직전의 상태에서 인공호흡을 받고 깨어나는 듯한 모습이었다. 밥 알갱이 사이사이에는 역시 공기가 많이 들어 있으니까.” 기자로부터 발명가들의 사진을 의뢰받은 나... 하지만 제대로 된 사진은 건지지도 못하고 그저 허기진 하루... 그 와중에 이눅이라는 발명가의 설계도를 잃어버리고 그가 발명을 하는 작업실인 지하의 공간에 들어서게 되고... “그 사람도 발명품이 있어요. 그 사람 발명품은 ‘필요’야. 개념발명가답죠? 그 사람 얘기로는 발명을 하기 위해선 필요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 필요라는 게 전부 사라지고 말았대요. 그래서 자신은 필요를 발명할 뿐이래.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지? 실은 기사 쓴 나도 잘 모르겠어. 아무튼 그래서 자신은 구체적인 물건이나 상품은 발명하지 않는대.” 개념예술이라는 것은 있지만, 개념발명이라니... 과학을 빗대어 예술을 논하려는 것일까... 여하간 작가의 재기출중함은 문장에서도 논리에서도 번쩍인다.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
“... 사진 아래에는 나무 지도를 읽는 법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이것은 눈으로 보는 지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상상하는 지도입니다. 손가락을 나무 지도의 틈새에 넣은 다음 그 굴곡을 느껴야 합니다. 그 굴곡을 느낀 다음에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해안선의 굴곡을 상상해야 합니다. 촉각과 상상력이 완벽하게 일치해야만 당신은 당신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차측량원이라는 직업을 가진 나... 어린시절부터 지도를 그리기를 좋아했던 나...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나침반을 잃은 듯 헤매는 내게 도착한 외삼촌의 나무로 된 지도 한 장... “... 책상 앞에 붙여놓은 나무 지도 그림을 보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이런 게 훌륭한 지도란 말이지. 아니, 훌륭한 지도가 아니라 그냥 지도란 말이지. 삼촌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어쩌면 내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세상의 끝으로 간다고 해서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의 끝은 지구가 네모라고 생각했을 때에야 가능한 장소이다. 지구가 둥근 이상 모든 곳이 세상의 끝이다.” 어둠 속처럼 헷갈리는 삶을 헤쳐 나갈 힘은 오히려 어둠 속을 더듬듯 차근차근 진행해야 하는 것...
「멍청한 유비쿼터스」.
시간대별로 진행되는 영화의 한 시퀸스를 지켜보는 것만 같다. 어떤 회사의 컴퓨팅 보안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투입된 나는 멍청한 유비쿼터스의 시대를 엿이라도 먹이듯 대상 회사의 보안망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나... “... 완벽한 보안을 꿈꾸신다니 제가 충고 하나 해드리죠. 해커들 사이에 이런 잠언이 있습니다. 가장 안전한 컴퓨터는 꺼진 컴퓨터이고, 가장 안전한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차갑고 완벽해 보이는 컴퓨터 만능의 시대, 하지만 이처럼 논리적으로 보이는 시대 또한 도처에 허점이 있다. 그리고 완벽함과 허점 모두에 키를 쥐고 있는 것은 바로 사람이 아닐까...
「회색 괴물」.
“컴퓨터 하는 사람들은 타자기가 종이를 낭비한다고 하는데 그건 정말 웃기는 소리입니다. 종이를 버리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게 낭비입니까, 아니면 컴퓨터처럼 종이를 아끼면서 생각을 지우는 게 낭비입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계에서 가장 빠른 타자수가 되려는 목표를 세웠으나 컴퓨터의 등장과 함께 일거리조차 잃게 된 어느 한 남자... 그리고 그 남자가 글을 쓰기 위해 찾아다닌 오래된 타자기 한 대... 어느 날 우연히 타가지 매니아인 내 손에 들어오게 된 타자기와 그 남자의 필연적인 만남의 이야기...
「바나나 주식회사」.
오래전에 정리해 놓은 흔적이 있다. 자전거 박물관, 입술이 매력적인 안내원, 다정한 노부부, 크랭커-31이라는 최초의 MTB 모델, 쓰레기 호수와 바나나 주식회사, B연필을 좋아한 B와 B연필보다 날카롭다는 이유로 H라 명명되던 나... B의 자살과 B가 남긴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바나나 주식회사 명함과 약도. 『“어째서 자전거를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뒤로 가지 못하잖아.” “그게 다야?” “ 그럼 뭐가 더 필요해?” B가 죽어버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B가 자전거를 좋아했던 이유를 어렴풋하게 알 것 같다. 자전거란 확실히 인생을 닮아 있다. 뒤로 갈 수 없는, 뭐랄까, 전진할 수밖에 없는 삶의 비애랄까, 뭐 그런 게 닮지 않았나 싶다. 물론 이런 얘기를 B에게 했더라면 “웃기지 마, 그냥 뒤로 가지 못하는 게 좋을 뿐이야. 인생이나 뭐 그런 것과 비교하진 말라고”라며 핀잔을 주었을 거이다...』익살과 환상이 잘 조화된 환경주의(바나나현상:Build Absolutely Nothing Anywhere Near Anybody 어디에도 아무것도 짓지 말라, 환경 오염 시설을 자신의 집 앞에 설치하지 못하게 하는 지역 이기주의, 님비 현상과 비슷한 용어)라고 못박기엔 광의의 해석이 가능한 단편 소설...
「사백 미터 마라톤」.
“그런데 40킬로미터면 40킬로미터지 42.195킬로미터는 대체 뭐야, 구질구질하게. 내 스타일이 아냐...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말은 했지만 나 역시 궁금했다. 도대체 42킬로미터라는 건 어떤 거리일까? ... 직접 그 긴 거리를 뛰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지만 마지막 골인 지점을 통과할 때의 느낌은 궁금했다.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스포츠 혹은 스피드를 이용한 신세대식의 농담. 400미터 15연승을 구가하는 달리기 선수, 그가 찾은 42.195km짜리 인생. 비트, 삶의 속도라는 것, 삶의 레이스 그 속도에 자신을 튜닝하는 방법 찾기. 게다가 아마도 소설은 현재가 아니라 현재로부터 조금 더 나아간 미래의 어느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듯하다. 제 몸을 직접 움직여 뛴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 흥미로운 것이 되어버린, 도래할 어떤 시절의 이야기...
「펭귄뉴스」.
표제작이다. “... 그녀의 이야기는 늘 반복이고 리메이크이고, 스스로에 대한 표절이다. 아마 다섯 살 때쯤에도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었을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소희의 가장 큰 매력은 아무렇지도 않게, 전혀 신경쓰지 않고 미안해하지도 않으면서 그 많은 이야기를 단숨에 해버린다는 데 있다...” 모든 비트가 범죄로 취급받는 시대... 라디오에서는 클래식이나 틀어주고, 가정용 TV에는 P-칩이라는 것이 작동하고 있어 TV를 통한 비트의 전파조차 봉쇄당한 상태이다. 어느 날 나는 우연히 라디오 방송에 전화를 걸었다가 그녀에게 비트가 들어간 옛 노래를 신청하고, 나의 느닷없는 신청에 스파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채 흥분한 그녀는 요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그들은 1978년 몇 명의 초기 비트주의자들에 의해 주창된 펭귄뉴스 이론에 따라 비트 전파를 위한 자신들의 작업을 수행하다 장렬하게 (한쪽만) 전사한다. 썰렁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이지만(그러니 펭귄이지) 언중유골이라고 했던가. 시스템으로 억압하려는 무리와 그러한 시스템에 저항하는 무리라는, 이 시대의 또 다른 계급 갈등(혹은 세대 갈등)을 특유의 발랄함이 통통 튀는 문체로 잘 그려내고 있다.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는 작가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따라 가다보면 부지불식간 작가가 오래전에 준비해놓은 듯한 잠언의 늪에 빠지게 된다. 대충대충 펜 가는대로 쓰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모든 것이 작가 나름 치밀하게 준비해놓은 상상의 지도에 따라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외려 좀 미안해진다고나 할까... 근본적으로 작가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그럼에도 위대해질 각오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을 듯한 (그래서 또 맘에 드는) 작가의 소설, 재밌다...
김중혁 / 펭귄뉴스 / 문학과지성사 / 377쪽 /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