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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 《잘 가라, 서커스》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삶의 균열을 체험시키다...

by 우주에부는바람

어떤 작가들은 무척 쉽게 쓰지만 또 다른 작가들은 그렇지 못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넣은 얼렁뚱땅 파전 같은 글들도 맛이 있으면 좋아하지만, 천운영처럼 개량을 하고 재료를 엄선한 다음 맛과 모양까지 고려한 화전 같은 글들은 맛도 있지만 품위까지 있어 더욱 좋다. 작가가 단어의 선택에 문장의 선택에 은글슬쩍 거론하는 옛이야기 하나의 선택에까지 공을 들이면 그것이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이 된다.


소설은 어린 시절 동생의 부추김을 받으며 주변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을 스스로도 즐기다 사고를 당해 제 목소리에 흠집을 당한 형과 그 동생이 형의 신부감을 구하기 위해 함께한 중국 여행에서 구경하는 서커스로부터 시작된다.


“... 서커스 단원의 실수는 완벽한 묘기보다 더 흥이 난다. 서커스를 보는 사람들은 실수를 염두에 두는 법이다. 서커스를 보는 것도 환상적인 성공이 아니라 실수를 확인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난이도가 높을수록 관중들이 열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린 시절 당한 사고로 이 하나뿐인 형은 목소리를 잃은 대신 쉽게 가질 수 없는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의 형이 시도한 높은 난이도의 서커스는 실패로 끝났고, 관중이었던 동생은 이제 그런 형의 실수를 업보처럼 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동생 윤호는 형이 한 눈에 반해버린 신부감에게도 쉽사리 마음을 풀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내장 속까지를 샅샅이 훑듯이 살펴보아야 한다.


“... 여자가 아니었다면 형은 삶의 의욕을 모두 잃은 채 죽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형은 여자만 쫓아다녔다.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온 새끼 새처럼, 눈 뜨자마자 본 여자를 제 어미라고 믿어버린 새끼 새처럼, 여자를 향해 입을 벌리고 살을 부볐다. 어미를 잃은 형은 새로운 어미를 찾았다.”


하지만 윤호는 형의 아내에게서 여자를 보고, 착하기만 한 며느리를 보았다며 세상을 다 얻은 듯하던 형의 엄마는 그만 숨을 놓아버린다. 나는 형과 형의 아내를 떠나고, 엄마는 이들 모두를 뒤에 남겨 놓고 떠난다. 그러니 이제 형에게 남은 것은 아내뿐이다. 그러나 어미를 잃은 대신 자신의 아내를 그 자리에 앉히고 싶어 하는 형의 변화를 조선족 여인 림해화는 쉬이 견디지 못한다. 그렇게 내가 형을 밀어내듯이 형수는 형을 밀어낸다.


“그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형의 얼굴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형은 저 속에서 여자를 만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저 멀리 뗏목을 탄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아주 먼 바다로 항해를 떠나고 있는 중이리라. 나는 모두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잘 가라, 어디든지. 잘 가라.”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죽거나 사라진다. 그렇다고 해서 행적인 분명한 이들의 현재가 긋는 궤적이 뚜렷한 것도 아니다. 이들 모두는 조금씩 모자라고 그 모자람을 서로를 통해 채워나가는 자들이다. 그래서 어느 한 쪽이 움푹 패이는 순간 도미노처럼 고스란히 다음 사람이 그리고 또 다음 사람이 삶의 균열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 균열의 와중에도 잘 가라고 말해주는 것, 그것이 남은 자들의 몫으로 혹은 부채로 남겨질 따름이다.


우리나라로 들어온 조선족 여인을 장편 소설의 주인공으로 끌어온 것도 볼만하거니와 국내에 있는 조선족과 삶을 위해 조선족의 고향을 넘나드는 내국인을 은근히 교차시키는 작업까지도 작가는 잘 해내고 있다. 이러한 자신의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서커스를 들먹이는 데도 발해의 정효공주 무덤을 아련한 모티브로 삼는 데도 어지간히 공을 들이고 있다. 대략 만족스럽다.


천운영 / 잘 가라, 서커스 / 문학동네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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