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약방문과도 같은 보르헤스 따라잡기...
“사람들은 믿지 않을 테지만, 왜냐하면 나도 믿지 않았으니까, 광화문 한복판에 땅굴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여섯 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는 소설은 각 챕터의 서두를 위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세 개의 챕터는 위의 문장 이후에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같은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고, 나머지 세 개의 챕터도 토씨가 조금 틀리지만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니까 나는 8월 25일 밤에 종로에 이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라는 찻집에 세 번째 들른 참에(단락 안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지만 그녀와 함께) 김소령이라는 위인으로부터 광화문 한복판에 땅굴이 있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는 것...
조금 미리 이야기 하자면 소설은 완화된 (보르헤스적) 환상적 리얼리즘의 글쓰기에 한국적 불륜(또는 사랑) 소재가 결합되어 있는 형국이다. 실은 덕분에 보르헤스의 책을 오랜만에 빼어 들었다. 극중에 나오는 보르헤스의 책은 예원출판사의 『바벨의 도서관』이었고, 내가 주섬주섬 빼어든 책은 민음사에서 나온 보르헤스 전집의 두 번째 권인 『픽션들』이었고, 이 두 권의 책에 공통으로 실려 있는 단편소설이 바로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다.
등장인물인 나는 비행기 안에서 우연하게 같은 자리에 앉게 된 그녀와 똑같은 책을 읽게 됨으로써 모든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우연은 서울의 종로 한 귀퉁이에서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라는 찻집을 만나면서 더욱 강화된다. 이러한 작중 인물들과 보르헤스의 연관들은 소설로 확대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 김소령이라는 사실을 비롯하여(보르헤스의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군인이다) 아마도 다양한 장치들이 보르헤스의 소설과 맞닿아 있다고(그런 장치들을 찾아내는 것은 한량을 자처하는 독자의 몫은 아니니, 넘기도록 하고...) 여겨진다.
물론 보르헤스는 머릿속에서 지우고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도 좋다. 소설은 연애 소설의 외양을 한 보르헤스풍의 픽션이 아니라 보르헤스의 외투를 설핏 빌린 듯한 연애 소설이니까... 연애 소설로 읽는 것이 좋겠다.
소설에 이르는 시간의 시작은 이렇다. 친구의 출판사에 기획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어 있는 나는 친구의 배려로 파리의 도서전시전에 갔다 오는 길에 자신과 똑같은 책을 읽고 있던 한 여자를 비행기 안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유부녀인 그녀의 신분과 상관없이 희미하지만 예측이 가능한 윤곽을 지닌 사랑의 아우라에 휩싸이고 서울에 도착한 이후에도 몇 차례의 만남을 갖게 된다.
“... 사랑의 대상인 애인을 세상에 노출되지 않도록 은밀히 감추려는 욕망과 반대로 세상에 드러내놓고 알림으로써 자신이 사랑에 빠졌고 또 사랑을 받고 있다는 자부심을 표현하려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다.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자신들의 사랑과 신상에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런 종류의 어려운 사랑을 하고 있는 경우조차도 그 안쪽에서 꿈틀거리는 노출에의 욕구를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사랑에 도달하는 일은, 더군다나 세상의 일반적인 도덕률에 부합하지 않는 사랑을, 그것도 사랑의 일탈과 세상을 향한 반격에 익숙하지 않은 지긋한 나이에 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그리고 그녀는 조심스럽고 그래서 우유부단하고 욕망의 숨김과 욕망의 드러냄 사이의 번민으로 가득 찬 만남을 이어간다.
“... ‘어찌할 수 없다’가 언제나 ‘할 수 있다’를 이긴다. ‘할 수 있다’가 자유의지라는 깃발로부터 나온 구호라면 ‘어찌할 수 없다’는 운명론이 불러낸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 사이사이 신학적인 혹은 철학적인 사유에 능통한 작가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한 다양한 잠언들을 심어 놓고, 사랑에 이르는 과정 혹은 사랑의 국경을 넘나드는 밀입국의 쾌감을 은밀하게 설파한다.
“... 사랑이 알게 하는 앎은 정보가 아니라 이해이다. 양이나 부피가 아니라 깊이이다. 세목이 아니라 핵심, 순간이면서 영원한 어떤 포착이다... 만나면서 서로를 알아보자는 그녀의 말은, 그녀가 자신의 의도를 이해했든 이해하지 못했든, 이미 자신의 내부에서 시작된 사랑이라는 새로운 감정을 조심스럽게 누르는, 그러나 마침내는 완전히 누르지 못하고 표현하고야 마는 어법이다...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물론 나이와는 상관없이, 도덕률의 부합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 또한 사랑인 것은 확실하여 나는 때때로 그녀를 시기하고 그녀와의 관계로 괴로워한다. 질투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랑하는 자의 특권이자 사랑하는 자가 지고 가야 할 짐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다시 한번 귀뜸하기도 한다.
“... 소속되지도 독점되지도 않는 연인, 누군가와 공유해야 하는 연인은 의혹과 불신의 대상이고 괴로움의 조건이다. 연인과 헤어져 있는 시간을 못 견뎌 하는 것은, 실상은 그리움 때문이 아니라 의혹과 불신 때문이다. ‘보고 싶다’로 표현된 감정의 진짜 정체는 ‘믿을 수 없다’이다...”
그리고 육체적인 맞닿음과 그걸 잔혹하게 거부하던 두 사람의 두터운 외피는 김소령이라는 위인의 허황된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에 현혹된(혹은 현혹되어야만 자신들의 사랑을 완성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이 마침내 찾아낸 땅 속의 아지트에서 드디어 벗겨지게 된다.
“현실의 보이지 않는 뒤쪽. 우리들 사랑의 간절함과 안타까움이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틈. 일종의 블랙홀. 우리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 틈을 통해 여기로 들어온 걸 거예요...”
두 사람의 사랑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소설은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사랑을 나누었던 공간과 그들이 사랑을 나누었던 지금까지의 시간으로 족한 것일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나름의 품격을 지니려고 꽤 노력한 흔적이 여실한 소설을 읽은 것으로 족해야겠지... 오랜만에 읽는 국내작가의 연애소설이었다...
이승우 /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 / 창해 / 2005
ps. 보르헤스의 단편을 읽는 중에 “나는 마치 암호처럼 각기 다른 이야기들에서 똑같이 반복되던 마지막 문구를 기억한다...” 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그리고 문장 중의 이야기라는 단어에 대해 “원문에 나와 있는 redaccion, 또는 영어로 version이라는 말은 같은 작품에 대해 여러 가지 다른 판형이 존재하거나, 같은 사건을 두고 다른 여러 가지 얘기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말에 이러한 뜻을 정확히 전달해 줄 수 있는 단어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들이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닌 같은 사건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그런 다양성을 가리킨다.” 라는 각주도(번역자에 의한) 달려 있다. 혹시 소설 각 챕터의 첫 단락들의 공유가 이와 연관이 있는 것일까, 넘겨 짚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