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시 슈발리에 《진주 귀고리 소녀》

섬세하고 풍요롭게 재생산된 그림 한 장...

by 우주에부는바람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것이 재작년이다. 영화의 느낌이 좋아서 (보통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지만, 무슨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닌데) 책을 읽어야겠다, 싶었는데 2년이 지나서야 마음의 바램을 이룬다. 그리고 책을 읽는내내 어찌나 텍스트가 선명하게 이지미로 떠오르는지 영화를 보고 있던 그 때 그 순간으로 고스란히 돌아간 느낌이다. 애초에 영화는 원작의 느낌뿐만 아니라 원작의 디테일한 부분까지를 옮겼던 것이로군, 하고 되새기게 된다.


서문에 내용에 따르면, 한 장의 그림에서 시작된(열 아홉에 <진주 귀고리 소녀>라는 그림을 처음 본 소설가는 이후 이십년 동안 그 그림을 자신의 방 한 쪽 벽면에 붙여 놓고 있었다) 작가의 애정은 어느 날 갑자기 호기심으로 바뀐다.


“‘소녀를 저렇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베르메르는 그녀에게 무엇을 했을까.’ 화가와 모델 사이에 어떤 유대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소녀는 베르메르 때문에 이런 표정을 지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난 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좀더 알고 싶었다... 하지만 화가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다. 더구나 그림에 나온 모델은 완벽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아무도 이 소녀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난 즐거웠다. 그건 내가 상상하는 대로 글을 쓸 수 있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마음껏 자신의 상상력을 이용하여 자신을 매료시킨 한 장의 그림, 그 그림의 모델인 그리트를 창조하고, 그리트의 눈빛으로부터 유추한 베르메르의 시선까지를 창조하여 소설을 그리고 있다. 특히 소설은 화가와 모델, 그리고 그림이라는 소재를 택하고 있음에도 예술지상주의로 흐르지 않는다. 오히려 소설 속의 그리트는 예술을 대하는 소수 엘리트들의 허영에 반감을 품고 있으며, 예술이 좀더 대중적이어야 하고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정직해야 함을 토로한다.


“나중에 마리아 틴스는 빵집 주인이 반 라위번처럼 그림을 가까이 들여다보지도 않았고, 맥주를 마셔 감각이 둔해져 있는 데다 데려온 아이들 때문에 주위가 산만해서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있었겠느냐고 비꼬았다. 비록 입밖에 꺼내지는 않았지만, 나는 큰 마님의 의견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빵집 주인이 그림에 대해 더 정직한 반응을 보인 것 같았다. 반 라위번은 그림을 볼 때 입에 발린 달콤한 말과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짐짓 너무도 열심히 살폈다. 빵집 주인이 자기가 느낀 것을 단순히 얘기한 반면, 반 라위번은 주위 사람들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연기를 했던 것이다.”


하녀의 신분으로 화가의 작업실을 청소하는 처지에 있지만 그리트는 타일에 그림을 그리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향과 타고난 듯한 명민한 시선으로 베르메르의 일을 돕는다. 베르메르를 위해 물감에 쓸 재료를 만들고, 베르메르를 위해 기꺼이 그의 모델이 된다. 화가와 모델 사이에는 선을 통하지 않고도 전파가 흐르듯 교감이 이루어지고, 그 교감은 신분적인 차이, 경제적인 차이와 무관하다.


『... “배경에는 뭔가 질서를 흩트리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반 라위번 마님의 고요함과 대비될 수 있게요... 뭔가 눈을 간질이는 것 말이에요. 물론 눈을 즐겁게 해줘야 해요. 그러면서 간지럽게 하는 거요. 왜냐하면 천과 마님의 팔이 비슷한 자세로 있으니까요.” 긴 침묵이 따랐다. 그는 탁자를 보고 있었다.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나는 기다렸다. “하녀한테 한 수 배울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걸.” 마침내 그가 말했다.』


그리트와 눈이 먼 그리트의 아버지 이후 남편이 된 정육점 아들 피터, 그리고 하녀로 일하는 동안 잃게 된 여동생과 아버지의 직업을 따르기 위해 도제 수업에 들어간 남동생... 베르메르의 신경질적인 아내 카타리나와 장모 마리아 틴스, 그리고 그의 후원자이며 그리트를 끊임없이 탐하는 반 라위번과 그리트를 괴롭히는 카타리나의 딸 코넬리아...


17세기 네델란드의 델포트(실제 베르메르의 고향이면서 그가 단 35점의 그림만을 그리며 평생을 살았던 동네)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은 베르메르의 화폭으로부터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문장으로 자리를 옮겨가며(이후 다시 영화로도), 그 사람의 심리까지 섬세하고 풍요롭게 재상산 되고 있다. 물론 모든 것은 한 장의 그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진주 귀고리 소녀>라는...



트레이시 슈발리에 / 양선아 역 / 진주 귀고리 소녀 (Girl with a Pearl Earring) / 강 / 2003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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