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 《브루클린 풍자극》

장지(葬地)에서조차 새로 시작될, 시큼 달콤 풍자극으로서의 삶...

by 우주에부는바람

우리들 인생을 연극에 비유하고들 하던가... 이제 그 마지막 장에 다다르고, 막이 내려가기만을 기다리는 주연배우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그는 이제 한 번의 연극에서 그 마지막을 코앞에 두고 어떤 심경이 되어 막이 내려가는 것을 바라보게 될까. 그리고 우리들, 우리 인생의 주인공인 우리들이 그 주연배우와 같은 순간에 도착하여 있다면...


“믿지 못할 꿈처럼 나의 기쁨은 막을 내렸고, 내 좋았던 시절은 모두 과거로 돌아갔다네. 사랑도 잘못되었고 환상도 완전히 물러갔고 그 모든 지난 일 중에 슬픔만이 남아 있다네.“


월터 롤리의 「궁정이여 잘 있어라」中


소설의 주인공인 네이선은 평생의 직장이었던 보험회사에서 은퇴하고 아내와는 이혼을 한 채로 ‘조용히 죽을만한 장소’로 선택한 브루클린의 한 켠에 자리를 잡는다. 언급된 시에 드러난 심상 그대로 네이선은 이제 인생의 막차를 탄 것처럼 마음은 무상할 따름이다. 스스로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책>이라고 스스로 이름붙인 책을(스스로가 겪은 ‘모든 실수와 잘못과 어줍은 짓과 바보짓, 그리고 모든 무의미한 행동을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언어로 그려 낼 셈’으로 시작한 작업) 쓰는 일 뿐이다.


그러나 네이선을 둘러싼 인물들이 한 사람씩 추가되면서(그의 인생에서 사라져간 아내, 그리고 멀어져버린 딸의 자리를 대신하기로도 하듯) 브루클린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한 편의 풍자극이 시작된다. 항상 네이선이 식사를 하는 식당의 여급인 마리나,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브라이트먼의 다락방’으로 통하는 해리의 헌책방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외조카인 톰, 톰을 통해 좀더 친해질 수 있었던 헌책방의 주인이기도 한 중년의 게이인 해리 브라이트먼까지...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은퇴 남자의 장지(葬地)와도 같았던 브루클린에 마치 새싹이 돋듯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 실존(實存)의 호텔... 호텔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약속의 상징이자 단순한 장소 이상의 장소, 우리가 꿈속에서 살 수 있는 기회이자 가능성을 의미하고 있었소... 실존이란 말은 단순히 삶이라는 말보다 더 포괄적인 거요. 그건 모든 사람들의 삶을 아우르는 말이고... 우리의 삶이 얼마나 하찮은가는 문제가 되지 않소.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다른 모든 이에게 일어난 것과 똑같이 중요한 것이거든.”


그렇게 네이선과 톰과 해리는 때때로 모여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하면서 추수 끝난(별다른 성과가 없는) 벌판 같았던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씨앗이라도 뿌리는 것처럼 에너지를 얻는다. 특히 해리는 어린시절 자신이 꿈꾸었던 ‘실존의 호텔’을 설파하며, 네이선의 측면 지원을 받아가며,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냉소적이기 그지없는 톰을 추스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라졌던 톰의 여동생이 살아있는 소포라도 보내듯 자신의 딸 루시를 이들에게 보내면서 이야기는, 레코드 판이 튕기듯 또다른 이야기를 향해 튄다.


<북쪽으로의 자동차 여행>이라는 챕터에서 톰과 네이선이 나누는 대화도 인상적이다. 한때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했던 톰은 보험 외판원으로 평생을 보낸 자기 자신이 글을 쓰려 한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품는 외삼촌을 향해 말한다.


“시인과 소설가의 삶을 면밀히 살펴보면 결국에는 그것이 진짜 혼돈, 예외의 무한한 뒤섞임이라는 걸 알게 돼요... 그건 글을 쓴다는 게 일종의 질병, 이를테면 정신의 감염이나 인플루엔자라고 할 수도 있어서 언제 어느 때건 누구든 덮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젊은이든 늙은이든, 강자든 약자든, 술 취한 사람이든 취하지 않은 사람이든, 제정신인 사람이든 미친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조이스는 세 권의 장편소설을 썼어요... 발자크는 아흔 권을 썼고요... 카프카는 첫 번째 단편소설을 하룻밤 만에 썼어요. 스탕달은 『파르마의 수도원』을 47일 동안에 썼고요. 또 멜빌은 『백경(白鯨』을 16개월 동안에 썼고 플로베르가 『보바리 부인』을 쓰는 데는 5년이 걸렸지요. 무질은 18년 동안 『특성 없는 남자』를 쓰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고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그 어느 것에든 상관을 하나요?”


그렇게 루시와 함께 하는 동안 떠난 여행, 여행 기간동안 머물게 되었던 버몬트 지방의 호텔(그들이 첫 번째 손님이었던), 호텔에서 톰과 하룻밤을 보냈던 허니, 해리의 실존의 호텔이 현현한 것처럼 보여 시작된 호텔 인수 흥정, 그렇지만 느닷없는 해리의 죽음과 함께 이들은 또다시 브루클린의 한 켠으로 돌아오게 되고, 그곳에서 남은 사람들은 해리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가 남긴 것들을 마무리함으로써 해리가 주인공이었던 연극을 끝내준다. 그렇지만 다시금 시작되는 모두들의 또다른 연극...


“내 아이디어는 이런 것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와 사실과 기록이 사라지기 전에 건져내서 그것을 영속하는 이야기, 삶의 이야기로 구체화하기 위해 잊힌 사람들에 대한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를 설립하는 것...”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생각했음에도 병원 응급실에서 그 순간을 넘기고 다시금 회복을 한 네이선은 아직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마치 작가 자신이 그동안 즐겨 다루었던 환상적이고 이색적인(비록 매우 일상적인 배경 위에서이지만) 소재들 대신, ‘보통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크지 않은 목소리로 풀어내고 있는 소설을 설명이라도 하는 것 같은 네이선의 또다른 야망을 보여주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네이선이 죽음의 장소로 선택했던 브루클린은 소재 고갈된 소설가와 같고, 네이선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나 그에게 힘을 부여한 사람들은 소재 고갈된 소설가의 영혼에 일침을 가하는 구체적이고 주변에 만개한 소설의 소재와도 같다. 글을 쓰는 일과 사는 일, 그것이 무엇이든 인간은 자신의 운명이 정말 끝나는 바로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도전해 볼 일이다, 라는 진부해보이는 명제를 폴 오스터 특유의 재치있는 문장과 서술로 잘 풀어낸 작품이다.



폴 오스터 / 황보석 역 / 브루클린 풍자극 (The Brooklyn Follies) / 열린책들 / 394쪽 / 2005 (2005)



ps. 풍자극을 빛내며 각각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배우들의 목록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네이선 글래스(톰과 로리의 외삼촌), 준(톰과 로리의 엄마이며 네이선의 여동생으로 오래전에 죽었다), 톰, 오로라(톰의 여동생), 데이비드(오로라의 남편, 사이비 종교에 빠져 있다), 루시(로리의 딸), 레이철(네이선의 딸), 해리(헌책방 주인), 마리나(식당의 여급), 루퍼스(해리가 죽은 이후 톰과 함께 헌책방을 물려받음), 낸시(톰과 네이선이 BPM이라고 부르는 톰의 집 근처에 사는 여인으로 이후 레이철과 레즈비언 커플이 됨), 허니(루시를 데리고 버몬트를 여행 중에 만난 여자, 이후 톰과 결혼함), 조이스 마추켈리(BPM의 엄마로 이후 네이선과 사귀게 됨)...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