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신의 땅에서 인간의 시선으로 예술을 논하다...

by 우주에부는바람

“그림은 그 아름다움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속에 삶의 풍요로움과 사랑, 신이 창조한 세계의 다채로움에 대한 존경심과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가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죠.”


소설의 첫 번째 소재가 되고 있는 것은 그림(혹은 예술)을 대하는 예술가의 시선이다. 16세기말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서 세밀화를 그리는 예술가들, 동양과 서양의 중간에서(작가는 터키 태생이다) 그림이란 신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계를 그리는 것이 화가들은 그저 이러한 신의 뜻에 따를 뿐이라는 자신들의 예술관과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향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예술가의 운명일지니) 이웃해 있는 베네치아에서 유행하고 있는 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인간의 욕망에 의해 재현되는 인간의 모습이라는(르네상스의 그것일터) 예술관 사이에서 갈등하는 예술가들이 책의 가장 큰 주인공이다.


“... 그는 원근법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는 것, 베네치아 화가들의 화풍을 모방하는 것은 악마의 유혹에 빠지는 거라고 말했답니다. 마지막 그림에서 우리가 서양인들이 사용하는 기법으로 그린 인간의 얼굴은 마치 진짜 같았답니다. 그래서 그 그림을 본 사람들이 교회의 우상 앞에서 그렇게 하듯, 엎드려 경배하고 싶어질 정도라고요. 엘레강스의 말에 의하면 원근법은 그림을 신의 시선으로부터 거리를 쏘다니는 개의 시선으로 격하시켰고, 베네치아인들의 기법을 모방하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화풍을 이교도의 화풍과 뒤섞어 우리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행위인 겁니다. 그는 우리가 한 일이 우리를 서양인들의 노예로 전락시키려는 악마의 꾐에 빠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차이 혹은 그 차이를 몸소 겪어 보고 싶어한 화가들의 열망은 급기야 엘레강스라는 그림에 금박을 입히는 세공화가의 죽음을 불러오고 소설은 그 때문에 미스터리라는 외양을 띠게 된다. 엘라강스의 죽음과 함께 술탄으로부터 요구받은 책의 제작에 영향을 받게 된 에니시테는 12년 동안 고향을 떠나있던 카라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카라에게 엘라강스를 살해한 범인을 밝혀줄 것과 책의 완성을 도와 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이러한 카라의 귀향과 에니시테의 만남은 소설의 두 번째 소재가 되는 사랑에 불을 지핀다. 카라는 자신의 사촌이기도 한 에니시테의 딸, 셰큐레와의 사랑 때문에 고향을 등진 것... 그리고 이제 돌아온 카라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지만 아직 아름답기 그지없는 셰큐레를 다시 보는 순간 십여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다시금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셰큐레는 전쟁터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 그리고 셰큐레의 남편을 대신하여 셰큐레의 가족을 돌보다 사랑에 빠져버린 시동생, 딸을 너무도 사랑하여 다른 이에게 주고 싶어하지 않는 아버지 에니시테라는 난공불락에 둘러싸여 있다. 독자들은 도대체 살인범은 누구이고 카라가 그 살인범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하는 미스터리와 함께 두 사람의 로맨스는 해피 엔딩을 갖게 될 것인가 하는 궁금증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책을 읽는 작업이 녹녹치 않다. 꽤 포스트모던한 작가는 다중의 군상들 모두에게 1인칭 시점을 부여한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카라를 비롯해서 심지어 이미 죽은 몸인 세공화가 엘레강스, 밝혀지지 않은 살인자, 용의자들인 나비와 황새와 올리브를 비롯해서 그림 속에 그려진 개, 나무, 금화, 악마들까지 1인칭을 부여받는가 싶더니, 급기야 그림에 사용된 빨강이라는 색조차 이러쿵저러쿵 사상과 철학을 피력하는 경지에 도달한다.


“당신들이 던지는 질문을 들었다. 색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 색은 눈길의 스침, 귀머거리의 음악, 어둠 속의 한 개 단어다...”


“... 나는 세상의 모든 악과 죄의 원천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의 부추김이나 속임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 욕정, 부족한 신념, 저질스러움 그리고 대부분은 아둔함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나에게 모든 사악한 것들에 대한 면책권을 주고자 하는 신비주의자들의 노력이 쓸데없는 일인 것처럼, 모든 악이 나로부터 나온다는 생각 역시 코란에 위배됩니다...”


동양과 서양의 예술에 대하여 그리고 신의 것과 인간의 것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어느 한쪽으로 간단하게 요약되지 않는다. 베네치아의 화풍을 은근히 부러워하는가 싶다가 세밀화의 장인들에 대하여 경외를 바친다. 진정한 예술의 가치는 신의 뜻을 장인들의 화풍에 따라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라 말하는가 싶다가 어느새 자신만의 스타일을 갖기 위해 염원하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느냐고 항변하는 듯하다. 그런가하면 소설은 셰큐레의 입을 빌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자신의 막내 아들인 오르한(그러니까 오르한 파묵인 작가 자신)에게 자신이 전달한 자료들로 구성된 것이며, 못된 오르한이 진실만을 말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이 이야기들을 너무 믿지 말라는 너스레를 떠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그려지지 못할 이 이야기를, 어쩌면 글로 쓸 수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에 제 아들 오르한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하산과 카라가 제게 보낸 편지들과 가엾은 엘레강스의 몸에서 나온, 물감이 번진 말 그림을 주저 없이 그 애에게 주었지요. 그 애는 항상 신경질적이고, 심술궂고, 불만에 차 있으며,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차 없이 공정하지 못한 평가를 내리지요. 이 때문에 카라를 실제보다 더 얼빠진 사람으로 묘사하고, 우리의 삶을 더 험난하게 쓰고, 셰브켓을 나쁘게, 저를 더 아름답고 부도덕하게 묘사하더라도 여러분은 절대로 오르한을 믿지 마세요. 그 애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고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하지 못할 거짓말이 없으니까요.”


쉽지 않은 소재를 다루고 있고, 익숙하지 않은 문법으로 씌어져 있지만 소설은 그러나 독서가 끝나는 순간 깊은 충족감을 줄 수도 있겠다. 부지불식간 책에 집중하게 되면 야릇한 시간 여행 속에서, 우리는 오백 여년 전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도시에 살았던 화가들의 삶과 사랑이 만들어낸, 말과 그림의 풍랑을 만나고 이를 즐거운 추억거리로 만들 수 있다. 물론 책읽는 과정에 발생하는 어지러움증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면...


오르한 파묵 / 이난아 역 / 내 이름은 빨강 (전2권) / 민음사 / 2004 (1998)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니콜 크라우스 《사랑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