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 크라우스 《사랑의 역사》

메타 텍스트 속, 길 잃기의 행복감...

by 우주에부는바람

첫 번째 챕터가 끝나고 두 번째 챕터를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장편 소설이 아니라 단편 소설집을 읽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폴란드가 등장하고 유대인이 등장하더니 두 번째 챕터에선 유대 역사학자가 등장하기에,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작가가 자신의 유대인 가족들을 소재로 하여 여러 편의 단편들을 쓴 것인가, 라고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어디 사랑의 역사가 단편 소설 분량에 담아지겠는가, 그렇게 소설은 여러 줄기의 지류가 하나로 합해져 강이 되고, 몇 개의 강이 합해져 바다가 되듯이 사랑의 역사로 합류한다.


“진화의 개념은 너무나 아름답고도 슬펐다. 지구상에서 생명체가 처음 생겨난 이후 약 50어에서 500억의 종이 있었는데 그중 500만에서 5000만 정도만이 현존한다. 지구상에 살았던 종의 99퍼센트가 멸종한 셈이다.”


지구상에 살았던 여러 생명체들 중 99퍼센트가 멸종해 버리는 동안에도 어쨌든 지금 이렇게 지구의 역사 속에 살아남아, 사랑으로 그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 이라는 종에 속해 있는 것도 다행일진대 그 와중에 자신의 전 생애를 걸쳐 가슴에 품고 있을만한 사랑의 역사를 지니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사랑은 또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슬픈 일이기도 해서 이제 소설의 주인공인 레오 거스키는 방 안에서 홀로 이런 생각을 품고 있기도 하다.


“내 가슴, 그러니까 내 심장은 약해서 믿을 만하지 못하다... 어떤 일이 충격을 줄라치면 관심을 다른 쪽으로 유도한다. 예컨대 창자나 폐 말이다... 매일 매일의 작은 작은 모욕감은 주로 간으로 받아들인다... 췌장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충격을 받아들이려고 남겨둔 부분이다... 개인적인 실패는 창자의 몫이다... 망각의 고통은, 등뼈다. 기억의 고통도, 등뼈다... 누가 내 옆에서 자고 있다고 믿는 실수를 저지르던 그 모든 시절, 그 모든 시간은, 치핵이 맡는다. 외로움, 그것을 전부 받아들일 만한 내장은 없다.”


400 페이지가 되지 않는 분량이지만 소설에는 범접하기 힘든 내공이 깃들어 있다. 형식적으로 소설은 메타 텍스트의 형태를 띠고 있다. 소설의 제목인 『사랑의 역사』는 소설 속에서 똑같은 제목으로 등장한다. 사랑이 『사랑의 역사』라는 책을 낳았고, 『사랑의 역사』라는 책은 또다른 사랑을 낳게 되고, 그 사랑이 다시 『사랑의 역사』라는 책의 기원을 찾게 되고, 그렇게 세 개의 세대를 거쳐, 『사랑의 역사』라는 책을 탄생시킨 저자와 그 책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태어난 소녀는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 내용은 한 편의 추리소설을 방불케 하는데, 레오 거스키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나오는 브루노, 레오의 첫사랑이었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알마 메레민스키와 그의 아들이며 작가인 아이작 모리츠, 친구의 원고를 받았던 즈비 리트비노프와 그의 비밀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로사, 『사랑의 역사』라는 책을 통해 결혼한 다비드 싱어와 샬롯과 그들의 딸인 알마 싱어는 폴란드와 미국, 그리고 체코라는 공간과 1990년대 초에서 현재에 이르는 시간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독자들을 즐거운 혼란에 빠뜨린다.


“... 리트비노프는 진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웠다.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같이 사는 것이다. 그건 코끼리와 함께 사는 것과도 같았다. 그의 방은 작았다. 아침마다 화장실에 가려면 진실 옆을 간신히 돌아가야 했다. 팬티를 입으러 옷장에 갈 때는 진실이 그의 얼굴에 주저앉지 말기를 기도하며 진실 아래로 기어가야 했다. 밤에 눈을 감을 때면 진실이 위에서 배회한다고 느꼈다.”


게다가 소설은 굉장히 유머러스한 문장들로 채워져 있다.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하는 이 위트의 문장들은 자칫 헤어 나오기 힘든 미스테리의 늪으로 빠져 독서를 포기할 수도 있었을 독자들에게 길 안내를 해준다. 서두르고 발버둥을 치면 더욱 빠져들게 되지만, 가슴을 조금 헛헛하게 만들고 조금씩 움직여 독서를 진척시키면 결국 그 늪을 빠져나올 수 있을 터...


“... 그는 위대한 작가였다. 그는 사랑에 빠졌다. 그것이 그의 삶이었다.”


어쩌면 레오폴드 거스키의 죽음에 바치는 헌사가 나오는 소설의 마지막 단락에 다다르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많은 독서의 시련들이 곧 우리들 사랑의 역사일 수도 있겠다. 소설의 앞과 뒤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복선들을 통해 수없이 많은 독법들을 낳을 것 같고, 그럼에도 별다른 오차 없이 작가가 의도한 결말에 다다르게 하고, 그러면서도 독자의 마음 속의 긴장과 이완을 조절하는 것만 같은 소설을, 74년생이 썼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 라고 아내는 이야기했고, 그러니까, 음, 내 생각도 그렇다.


니콜 크라우스 / 한은경 역 / 사랑의 역사 (The History of Love) / 민음사 / 2006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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