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보네거트 《타임 퀘이크》

시간의 조각을 SF의 바늘로 퀼트처럼 엮다...

by 우주에부는바람

『제5도살장』, 『갈라파고스』, 『고양이 요람』 등을 쓴 작가... 90년대 말쯤이던가 포스트 모더니즘이 득세하던 시절, 토마스 핀천(우리 세대가 소름끼치면서도 볼 수밖에 없었던 전설적인 외화 시리즈 <V>의 원작자이기도 하며, 『제49호 품목의 경매』라는 작품이 번역되어 있다)과 함께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들을 읽었다. 두 사람의 소설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미국의 소설가로 (물론 그러한 사실이 미국에서도 통용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 알려졌던 것이다.


그렇게 십여년이 흐른 다음에 들여다보는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이 조금은 낯설다. 퀼트처럼 조각조각 서로 다른 색을 띠면서도 하나로 합쳐지고, 시간을 무시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되풀이되는 시간을 SF적으로 이용하며, 스스로를 객관화시킨 자서전이라는 외형을 띠고 있으니 여간해서는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소설은 잘 읽히는데, 그것은 작가의 냉소적 유머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핵무기 실험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 공로로 1975년 노벨상을 탔다. 물론, 자기 폭탄은 이미 실험을 마친 뒤였다. 그의 아내는 소아과 의사였다! 세상에, 어떤 위인이 아동 치료 전문가와 결혼해 살면서 수소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대체 어떻게 돼먹은 의사가 이런 인격 파탄자와 함께 산다는 말인가?


“오늘 직장에서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자기?”


“그럼. 내 폭탄이 곧 기가 막히게 작동할 것 같아. 수두 걸린 아인 좀 어떻소?”』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한 구소련의 사하로프 박사를 두고 하는 이런 농담 같은 것... 그런가 하면,


“당시에는 차만 좋고 운전만 잘하면 경찰을 따돌릴 수 있었다. 페어플레이란 이런 거다! 우리가 미국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거다... 딜린저는 거짓으로 웃는 교활한 사기꾼이 아니었다. 그는 스포츠맨이었다.”


라면서 희대의 은행털이범인 존 딜린저를 이렇게 묘사하기도 한다. 유머는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을 읽는 동안 내내 따라다닌다. 심각한 내용에 과학적인 이론을 이용하는 동안에도 커트 보네거트는 웃음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2001년의 타임퀘이크는 하나님의 근육에 일어난 우주적 경련이었다. 뉴욕 시간으로 그해 2월 13일 오후 2시 27분에 우주가 자기 확신의 위기를 겪었다. 무한히 팽창해야 하는가?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 우주는 갑자기 10년을 수축했다. 그 바람에 나와 다른 모든 사람들이 1991년 2월 17일로 되돌아갔다. 나는 오전 7시 51분에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의 한 혈액은행 바깥에 줄을 서 있었다.”


‘우주적 경련’이라는 절묘한 표현을 통해 타임퀘이크를 설명하고, 그렇게 되풀이되는 10년 동안 자유의지를 잃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유의지로 움직여야 하는 새로운 시간 앞에서 느끼는 갑작스러움을 ‘타임퀘이크 후 무감각 증후군’이라 부르며 너스레를 떤다. 그런가 하면 SF의 형식을 차용하되 작가의 관심은 조금 다른 곳에 있는 것도 같다.


“트라우트가 자유의지가 다시 작동하는 순간 아카데미 근처에서 그토록 이성적인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내 생각에는, 그가 여느 사람과는 달리 기지감(旣知感)으로서의 삶과 원본으로서의 삶 사이에 중요한 차이는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했던 SF작가 킬고어 트라우트를 등장시킨 작가는 그를 통해 자유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쓰는 일에 전념하는 일종의 작가 정신을 드러낸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전념하는 동안 세상의 회전과는 무관하게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작업을 진행하는 예술가의 표방으로서 킬고어 트라우트를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킬고어 트라우트는 실존하는 SF 소설가인 Thedore Strugeon에서 영감을 받아 창조했다고 한다)


“예술 작품이라고들 하는 것을 감상하는 것은 사회적 행동이에요. 감상하는 사람은 보람 있는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지만, 뒤에 이유를 말할 필요는 없어요... 어떤 그림이나 판화 같은 것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 예술가에 대해 전혀 모르면서 그러는 경우는 좀체 드물지요... 예술 작품은 어느 것이나 반쯤은 두 인간 사이의 대화이기 때문에 대화 상대가 누구인지 알면 많은 도움이 되는 겁니다...”


대중들 전체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대중문학으로부터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지만 내심 자신과 코드가 통하는 사람들과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넌지시 자랑하는 예술관을 피력하는 커트 보네거트... 그의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예술관과 작가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의 의지를 지켜보는 일이 힘들기는 하지만 흥미롭다.



커트 보네거트 / 박웅희 역 / 타임 퀘이크 (Time Quake) / 아이필드 / 2006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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