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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도르 마라이 《열정》

얕은 감흥이 아니라 융숭한 감응으로...

by 우주에부는바람

애초에 나는 침대에 누워서 잠시 읽다가 내처 잠에 들 생각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래서 왠지 보통의 소설보다 가로가 잘록하고 두께도 덜한 이 책을 고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 가벼운 마음은 책을 읽는 동안 아주 조금씩 무거워졌다. 책의 중반 즈음을 넘어서면서는 처음의 그 비스듬한 자세를 거두고, 침대맡의 조명에 바짝 붙어 정좌하고 앉아서는 숨소리조차 아껴가며 읽어야 했다.


도대체 이 소설 속의 인물들에게 부과된 과거의 진실이 무엇인지가 궁금하여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이 순간이 한없이 지루할 정도였다. 그러함에도 건성건성 건너 뛰어 소설의 결말부로 다가설 수 없도록 만드는 위압감은 또 다른 한 켠에서 날 옥죄었다.


중간에 잠깐 눈오는 소리(가 들렸던 것은 아니고 왠지 그럴 것 같다는 내 의식의 소리 때문이었겠지)에 놀라 길에 서서 몇 조각의 눈을 맞은 것만 제외하고는 네 시간여를 꼼짝없이 책에 묶이고 말았다.


그리고 소설을 모두 읽은 다음 혜안이라도 뜬 것처럼 새벽길에 다시 섰을 때 눈의 흔적은 마치 소꿉장난처럼 희미했을 뿐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일흔 다섯의 장군이다. 그는 사십일년만에 누군가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 때문에 사십일년동안 출입하지 않았던 자신의 성에 식사를 준비시켰다. 그리고 사십일년만에 장군을 방문한 것은 열두살 이후, 우정 보다 더한 우정(아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어 안타깝다, 난 그들이 우정을 나누는 부분을 읽으면서 이거 혹시 동성애 소설 아냐, 라고 의심해야 했을 정도라고 부연설명을 하면 좀더 나은 설명이 되려나)을 나누었지만 사십일년전 갑자기 사라진 장군의 친구 콘라드이다.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본다.


"...몸의 변화에 대한 나이 든 사람들 특유의 혜안으로 두 노인은 서로를 관찰했다. 본질적인 것에 집중해서 아주 주의 깊게, 생명력의 마지막 표시, 삶의 기쁨에 대한 희미한 흔적을 상대방의 얼굴과 태도에서 찾았다."


그런데 도대체 이들을 헤어지게 한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그것만 알면 어떻게 이 갈증이 해결될 것 같다고 여기며 계속 책장을 넘긴다. 그리고 그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다.


어느날 장군의 성에서 사냥이 벌어진다. 다른 무리와 떨어져 장군과 콘라드는 앞장을 선다. 그들 앞에 사슴이 한 마리 나타난다. 그런데 장군은 자신의 등 뒤에 서있는 콘라드가 사슴이 아닌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낭했다는 사실을 느낀다. 그러나 콘라드는 장군을 쏘지 못한다. 그렇게 사냥이 끝나고 콘라드는 자신의 집이 있는 도시로 떠났다가 저녁 만찬을 위해 다시 장군의 성으로 온다. 바로 그 시간 장군의 부인인 크리스티나도 성을 비운다. 그리고 저녁 식사 시간, 장군의 부인 크리스티나와 콘라드는 열대의 지방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날 저녁 장군은 부인인 크리스티나와 비밀을 나누는 일지를 찾는다. 하지만 함께 지정해둔 자리에 그 일지는 보이지 않는다. 다음날 장군은 콘라드의 집을 방문하지만 이미 열대의 어느 지방으로 떠난 후이다. 콘라드의 집에는 장군의 성에서만 키우는 서양란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여기저기에서 크리스티나의 취향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잠시 후 크리스티나가 그 집으로 들어선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를 짐작한 이후 장군은 크리스티나가 살고 있는 자신의 성을 떠나 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로부터 팔년 후 크리스티나가 죽기까지 두 사람은 다시는 대면하지 않는다.


그렇게 성에서의 저녁 식사 후 사십일년이 지나 장군과 콘라드는 다시 한 자리에서 식사를 시작한다. 장군은 자신을 사십일년만에 방문한 콘라드에게 그 날 자신이 느끼고 짐작한 모든 사실, 현실이거나 또는 진실인 정황들을 묻고 스스로 대답한다. 그리고 크리스티나가 죽은 후 찾아냈던 일지, 그러나 콘라드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개봉하지 않기로 작정한 일지를 콘라드에게 함께 열어볼 것을 제안하지만 거부당한다. 사십일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당시의 정황을 머리 속에서 수없이 떠올리며 자신의 짐작과 현실, 그리고 현실과 진실 사이를 오가는 사색 속에서 살아온 장군은 마지막으로 콘라드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한다.


"...자네가 그날 아침 숲에서 나를 죽이려 한 것을 크리스티나가 알고 있었나?"


이 질문에 콘라드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헤어짐의 순간 장군은 두번째 질문을 던진다.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정열은 그렇게 심오하고 잔인하고 웅장하고 비인간적인가? 그것은 사람이 아닌 그리움을 향해서만도 불타오를 수 있을까?...선하든 악하든 신비스러운 어느 한 사람만을 향해서,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정열적일 수 있을까? 우리를 상대방에게 결합시키는 정열의 강도는 그사람의 특성이나행위와는 관계가 없는 것일까?..."


그리고 콘라드가 이 마지막 질문에 대답한다.


"왜 나에게 묻나? 그렇다는 것을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정열. 한때의 열정, 또는 사랑, 우정. 이런 것들은 생이 마감되는 즈음에 이르러 돌이켜 보면 모두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정열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함께 정열을 공유했던 사람을 죽음으로 보내고 남은 삶이라는 건, 또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정열, 그리움, 사랑, 우정, 자존심 등의 심리에 대해 이토록 지독하게 잘근잘근 씹어뱉는 듯한 소설을 아주 오랜만에 읽었다. 희안한 자극이라고 불러야 할까. 무언가 얕은 감흥이 아니라 시시각각 뇌 속의 어느 한 부분을 자극받는 듯한 감응.


1942년에 출간되었으나 헝가리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이 책은 이후 1998년 이탈리아에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다음해인 1999년에는 독일에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 자리에 올랐다 한다. 헝가리의 대문호, 라는 수식어가 상업적 치장이라 생각하고 코웃음을 쳤는데, 책을 모두 읽은 지금, 겸허하게 반성한다.



산도르 마라이 / 김인순 역 / 열정 / 솔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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