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유한 ‘기억이 흐르는 방식’으로 존재할지니...
잊으려 하지만 잊히지 않는 기억도 있고, 기억하고자 애를 쓰지만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기억들도 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기억이 흐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이 흐르는 방식’이야말로 한 인간을 다른 인간들과 구별되어 존재하도록 만드는 가장 중요한 특질이다. 우리는 바로 자신만의 고유한 ‘기억이 흐르는 방식’에 의하여 지금 이 순간의 자신으로 존재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있는’ 구역의 위치를 알려주는 유료 지도앱이 출시되었다. 앱 ‘세이프 시티’는 노후화나 안전도에 따라 도시를 5등급으로 나누었다. 신시가지는 0등급... 0등급은 파란색 원 속, 눈과 입이 활짝 웃는 이모티콘이 표시되어 있었다... 5등급 구역의 표시는 이모티콘이 아닌 빨간 엑스 자였다...” (pp.20~21)
손보미의 《세이프 시티》는 일종의 범죄 소설이고 사회파 추리 소설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세이프 시티’라는 멀지 않은 미래의 도시가 있다. 이 때의 도시는 단순히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만 나뉘는 대신 보다 구체적으로 구획된다. 범죄율은 수치화 되고 이미지화 되어서 도시를 나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구별이 도시를 안전하게 만든다고 하고, 이러한 안전 희구는 좀더 극단을 향한다.
“... 시장의 연설 내용에는 그날, 그러니까 임윤성과 최진유가 그녀의 집에서 밥을 먹으며 했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범죄자가 같은 죄를 반복하는 건 범죄를 저지를 때 뇌에서 만들어지는 도파민에 중독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이전 범죄의 기억을 없앰으로써 도파민이 주는 쾌락에 의한 중독을 단절시킬 수 있다고. 그렇게 기억 교정(그녀는 이 단어 때문에 웃음이 났다)을 해서 범죄를 막겠다고...” (p.145)
재선을 노리는 현재의 시장은 ‘기억 교정’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범죄율을 획기적으로 줄이고자 한다. 자신의 범죄를 기억하고 이를 통하여 또다른 범죄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범죄자의 범죄와 관련된 기억을 아예 삭제하는 방법을 시행하려는 계획이다. 이 기술은 도박 중독 등 각종 중독에 빠진 이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지만, 일단 위험의 최소화를 위하여 범죄자에게 실행할 생각인 것이다.
“... 여자 화장실을 부수고 그녀의 배를 찢은 그 남자의 기억은 온전하게 남아 있게 될 터였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남자가 그날 밤의 기억을 언제까지 간직하게 될지 그녀는 궁금했다. 그 기억이 어떤 식으로 그 남자의 머릿속에서 변질되고 오염되고 흐르고, 결국 어디서 고정될지 궁금했다... 기억이 흐르는 방식이야말로 한 인간이 존재하는 특정한 방식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p.193)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이러한 기술 적용을 위한 여론 형성의 도구로 사용될 위기에 처한다. 내가 새벽의 산책을 하던 중 맞닥뜨린 범죄자, 그 범죄자의 공격으로 내가 크게 상처를 입었고, 이러한 상황을 기술 적용에 사활을 걸고 있는 측에서 이용하고자 애를 쓰고 있다. 게다가 그 기술의 책임자인 임윤성 부부는 나와 남편과 각자의 집을 오가며 식사를 할 정도의 사이이다.
“저지른 잘못을 스스로 잊어버리고 그걸 기억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기억을 모조리 없앤다 한들, 잘못을 저지른 자신은, 그 시간 속에서 존재했던 자신은 여전히 이 세상에, 이 지구에, 이 우주에 남아 있을 것이다. 영원히 남을 것이다.” (p.215)
소재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 충분하고 스토리의 진행을 위한 장치들도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는데 이상하게 몰입감이 떨어진다. 임윤성과 나 사이에 형성되는 긴장감의 정체가 모호하고 남편의 정체성은 흐릿하다. 새벽 산책 그리고 그 산책 과정에서의 여러 돌발 행동은 이유가 불분명하고 범죄 현장과의 조우는 그저 우연적이다. 일단 이 소설에 대한 기억은 잊도록 해보고,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도록 해야겠다.
손보미 / 세이프 시티 / 창비 / 247쪽 /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