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작가를 있게 만든 여전한 뼈대를 확인하며...
《아니 에르노의 말》은 학제간 독일 연구소가 개최한 심포지엄의 폐막행사로 열린 2021년 5월 26일에 열린, ‘마르크 블로크 연구소에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인 사라 카를로타 헤쉴러, 클레르 멜로, 클레르 토마젤라가 기획한 좌담회’의 내용과 2022년 3월 24일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출판사의 제안으로 ‘로즈마리 라그라브와 아니 에르노, 사라 카를로타 헤쉴러와 클레르 토마젤라,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출판사의 클레망스 가로와 에티엔 아나임이 참여한 추가 대담’의 내용으로 엮여 있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 사회학적 · 전기적 auto-socio-biographique” 텍스트들과 로즈마리 라그라브의 “자전적 조사 enquête autobiographique”를 통해 우리는 주관적으로 체험된 것과 사회적 권력관계가 분리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기 자신의 전기 속에서 사회적 권력관계를 분석한다... 작가 에르노와 사회학자 라그라브가 공유하는 독창성은 두 사람 모두 사회계급의 관점을 직접 겪은 체험의 젠더적인 측면과 관계 짓는다는 데 있다. 즉, 여자라는 위치에서 겪은 물질적 조건들을 지식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에르노와 라그라브는 스스로 지배관계의 주체임을 알아보고, 그럼으로써 개인적 체험이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문맥 속에서 갖는 집단적 성격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한 지배적 상황은 자연적 여건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상황이고, 따라서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 주어진 대화는 아니 에르노와 로즈마리 라그라브가 지나온 길 그리고 쓴 글들을 통해 그들의 경험과 참여가 어떻게 만나고 갈라지는지 보여준다...』 (p.8~10, 〈서문〉 중)
사회학적이지만 동시에 자전적이고 전기적인 아니 에르노의 어떤 말들을 소설 바깥에서 읽을 수 있다는 기대로 책을 들었지만 이러한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책은 아니 에르노의 말, 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니 에르노와 사회학자 로즈마리 라그라브가 동등하게 지분을 할당받고 있다. 책은 두 사람의 (대화라기 보다는) 대담을 정리한 것인데, 인터뷰이와 인터뷰어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 같은 여자이고 또 연배가 같아서인지, 당신 책을 읽는 거의 대부분 동안 난 그 안에서 내 모습을 보았어요. ‘어느 페미니스트 계급 탈주자의 자전적 조사’라는 부제는 사실 내가 문학에서 시도한 탐구를 그대로 정의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죠.” (p.36, 아니 에르노의 말)
실려 있는 내용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사뭇 진지하다. (책은 ‘사회적 계급의 성찰과 자전적 글쓰기의 탐구’라는 부제를 달고 있기도 하다.) 아니 에르노는 여성 소설가로 다른 한 사람인 로즈마리 라그라브는 여성 사회학자로 평생에 걸쳐 지금까지 활동을 하고 있다. 대담을 나누기 전까지 사적인 접점이 없던 두 사람이지만, 페미니스트 특히나 계급 탈주자인 페미니스트라는 점에서 대담 내내 의기투합한다.
『보편적인 페미니즘은 불가능해요. 페미니스트 투쟁을 사회 투쟁과 분리할 수 없죠... 여자들은 어떤 사회계급에 속하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인종화되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남성 지배라는 조건을 같은 방식으로 겪지 않으니까요...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페미니즘은, 당신이 사용하는 표현을 그대로 가져오자면, “경험의 페미니즘”이에요...』 (p.61, 아니 에르노의 말)
‘계급 탈주자’라는 개념은 아니 에르노가 적극 사용한 개념이고 ‘낮은 계급 출신이 교육이나 사회적 상승을 통해 상위 계급 문화권으로 이동’하였다는 의미를 가진다. 특히나 이러한 계급의 변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존재론적, 문화적 소외감이나 정체성 혼란 상태’를 내포하고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에서는 그 탈주의 과정 중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작가 자신의 사립 학교에서의 경험이 실려 있다.
“... 난 분열된 아비투스가 나의 정체성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어요. 어떤 사회적 상황들에선 여전히 나타나고 있죠. 분열된 아비투스는 내가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이고, 그런 뒤에 그것을 글로 쓰는 방식이에요. 그것이 이해할 수 없는 거북함으로 느껴질 때는 고통스러웠지만, 이젠 오히려 사회가 나뉘어 있고 위계화되어 있음을 기억하라는 내 안의 요청 같아요...” (p.95)
그리고 아니 에르노는 이러한 ‘계급 탈주자’로서 불가피한 ‘분열된 (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해 형성되어 몸에 배인 개인의 습관, 취향, 태도, 분위기, 가치관 등의 총합으로서의) 아비투스’까지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표명한다. 그리고 그것이 글을 쓰게 만드는 원동력임도 밝힌다. 조금 부담스러운 읽을거리이긴 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말》을 통해 현재의 작가를 있게 한 굵고 길고 여전한 뼈대를 확인할 수도 있다.
아니 에르노, 로즈마리 라그라브 / 윤진 역 / 아니 에르노의 말 (Une conversation) / 마음산책 / 176쪽 / 2023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