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이 자오 감독 〈햄넷〉

〈햄릿〉을 하였던 옛 관객의 몰입과 〈햄넷〉을 향하는 요즘 관객의 몰입이

by 우주에부는바람

영화를 보고 십여 년 전에 구매하여 고이 모셔만 놓고 있던 《셰익스피어 전집》(2016년 출간, 이상섭 역)을 책장에서 어렵게 꺼냈다. (《셰익스피어 전집》은 255*290*80mm의 판형이고, 모두 1,808쪽에 셰익스피어의 작품 전체를 담고 있는 한 권으로 된 전집이고, 그 무게만 4.5킬로그램이다.) 마침 책에 묻혀 있던 서재의 책상을 정리한 것이 주초였다. 꺼낸 책을 책상에 올려놓고 〈햄릿〉을 읽었다.


그러니까 클로이 자오 감독의 영화 〈햄넷〉을 보고 난 다음에 내가 한 일이다. 만약 〈햄넷〉을 보지 않았다면 지금 이때에 〈햄릿〉을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희곡 〈햄릿〉의 내용과 영화 〈햄넷〉이 문학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만약 그러기를 원했다면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아니라 영화의 원작인 매기 오패럴의 소설 《햄닛》을 읽어야 했다.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니 중고 가격이 꽤 높게 책정되어 있다.)



영화 〈햄넷〉은 희곡 〈햄릿〉이 만들어진 배경에 초점을 맞춘다. 윌(윌리엄 셰익스피어)은 아녜스와 만나 결혼하여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첫째 딸 수잔나 그리고 쌍둥이 남매인 햄닛과 주디스이다. 아녜스는 윌을 도시로 내보내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하고 자신은 아이들을 키우며 시골에 남았다. 그러던 어느 날 주디스가 병에 걸려 사선을 넘나든다. 하지만 실제로 죽은 것은 햄넷이다.



아녜스는 햄넷의 죽음 이후 다시 도시로 나가 작품 활동을 하는 윌을 원망한다. 희극이나 쓴다고 욕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햄릿〉은 셰익스피어 쓴 첫 번째 비극이다. 아들 햄넷의 죽음 이전에 셰익스피어는 비극을 쓰지 않았고, 영화의 가장 처음에 당시 영국에서 Hamnet과 Hamlet은 다른 의미가 아니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그리고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아녜스가 〈햄릿〉 공연을 보는 장면이다.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며 고통에 몸부림치며 남편을 원망한 아녜스는 공연을 통해 윌이 느낀 고통을 그제야 느낀다. 공연에서 윌은 죽은 아들 햄넷 대신 유령이 되어 등장한다. (희곡 〈햄릿〉에서 유령은 햄릿의 아버지이니, 햄넷의 아버지인 윌이 유령인 것이 자연스럽긴 하다.) 아녜스는 다른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점차 공연에 빠져들고 무대 위의 햄릿을 향하여 팔을 뻗는다.



영화 속 아녜스의 연기가 너무 출중한데, 무대 위의 햄릿(과 윌)을 향하는 그 눈빛을 잊기 힘들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보여지던 아녜스의 야생성이 영화의 마지막 즈음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폭발하는 것 같다. 초반에서 중반으로 이어지는 동안 영화 《햄넷》의 스토리는 그저 평이하다. 로맨스가 있고 하나의 가족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있다. 남편의 능력 발휘를 위해 헌신하는 아내도 있다.


하지마 클로이 자오 감독의 연출력은 이 부분들마저 셰익스피어의 연극처럼 몰입시킨다. (햄넷이 죽기 전까지는) 별다른 사건이 발생하지 않지만, 그 평이한 시간들 안에 내재된 무언가가 감독의 연출 안에서 무르익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장면 장면들은 절제되어 있고 배우들은 크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입할 수밖에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희곡 〈햄릿〉의 공연장에서 손을 뻗던 오래전 관객과 영화 〈햄넷〉에 연출된 바로 그 장면을 보고 눈시울을 붉히는 요즘 관객의 몰입이 다르지 않다.



햄넷 (HAMNET) / 클로이 자오 감독 / 제시 버클리, 폴 메스칼 출연 / 126분 / 미국 / 202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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