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리디 살베르 《울지 않기》

1936년 스페인, 박제화될 수도 있는 역사의 한 토막에 생명력이라는 옷

by 우주에부는바람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살인자들에게 매수된 에스파냐 주교단은 살인자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펼치는 공포 정치를 축성했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온 카톨릭 유럽이 입을 닫았다. 이 파렴치한 위선 앞에서 베르나노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나도 똑같은 혐오감을 느낀다.” (p.75)


소설 《울지 않기》의 저자인 리디 살베르는 책 앞부분 한국 독자들에게 보내는 글을 통해 이 소설이 1938년 프랑스에서 발간된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책 《달빛 아래의 대 공동묘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힌다. 카톨릭 신자이면서 왕정주의자였던 조르주 베르나노스가 목격한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파의 만행 그리고 이러한 만행에 대한 카톨릭 사제들의 방관을 고발한 책 《달빛 아래의 대 공동묘지》를 2012년 읽었던 저자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이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있잖니, 날더러 1936년 여름과 네 언니의 출생부터 오늘까지 살아온 칠십 년 중에 고르라고 하면 후자를 고를 것 같지가 않구나... 그녀들은 사랑을 꿈꾸었다. 사랑을 갈구하고, 가슴 떨리는 희망을 품고 탄성을 지르며 사랑이 오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사랑에 빠졌다. 그 사랑이 안착할 상대만 없었을 뿐.” (p.128~129)


그래서 소설에서는 베르나노스의 책 속의 내용, 그러니까 프랑코 파의 만행과 사제들의 방관을 향한 베르나노스의 팔마에서의 목격담이 직접적으로 거론되고는 한다. 동시에 소설은 1936년 스페인에서 내전의 상황을 몸소 겪은 몬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소설에서는 소설의 화자이며 1936년 스페인에서 머물고 있었던 몬세, 그리고 같은 시기 같은 땅에 머물고 있었던 베르나노스가 동시에 등장하고 그들의 이야기는, 그러니까 소설과 실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뒤섞인다.


“...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사는 게 아니야, 이건 사는 게 아니야, 이건 사는 게 아니야... 팔마에 있는 베르나노스에게도 그건 사는 게 아니었다. 《달빛 아래의 대 공동묘지》를 읽으면서 나는 그렇게 상상하고 짐작한다.” (p.215)


소설 속 몬세는 대도시에서 아나키즘의 세례를 받고 온 오빠 호세에게 영향을 받은 열다섯 살의 젊은 처녀이다. 모든 것이 뒤섞여 있는, 근대와 현대가 뒤섞여 있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와 무정부주가 뒤섞여 있는 1936년의 스페인은 이제 막 피어나는 꽃 다운 나이라고 할 수 있는 몬세를 고스란히 닮아 있기도 하다.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젊음이 곧바로 세계사의 한 단락 안에서 키워드가 되어버리는 것과도 같다.


“... 호세는 볼셰비키들이 수립하고 디에고가 혐오도 저항도 없이 받아들인 괴물 같은 질서보다 태동 중인 것의 혼돈과 취약함이 더 좋다고 수없이 주장했다. 그는 공유 농지에 대한 생각을 여전히 옹호했고, 여전히 두루티 민병대를 향한 신뢰를 부르짖었고, 스탈린에 격렬히 반대했다... 다른 한편 디에고는 질서를, 제도를, 정규군의 지원을, 유보 없는 소련의 가담을 몸소 구현했다...” (pp.179~180)


그 와중에 몬세는 호세를 따라갔던 대도시에서 공화파에 참전하였던 프랑스 젊은이와 사랑을 나누게 되고, 그렇게 임신을 한 상태에서 디에고와 결혼을 하게 된다. 프랑코 파에 반대하는 것에서는 뜻을 같이 하지만, 호세는 절대자유주의를 표방하고 디에고는 공산주의자이니 이 두 사람은 하나의 울타리에 들어서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그러니까 오빠와 남편 사이에서 몬세는 정신적으로는 오빠를 따르면서도 디에고의 집안에 머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식탁엔 당시 에스파냐의 거의 모든 당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국민군과 친분을 맺고 있다고 의심받는 그 집 주인 돈 하이메, 친한 사람들끼리 있을 때는 프랑코와 팔랑헤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그의 누이 도냐 푸라, 소지주들의 사회주의 조합에 소속된 신부의 아버지, 얼마 전에 공산주의 사상으로 전향한 신랑, 그리고 끝없는 시적 욕망 때문에 어떤 노래나 어떤 얼굴에 반하듯 오빠의 절대자유주의 사상에 반한 몬세.” (pp.196~197)


스페인 내전의 복잡한 상황은 그렇게 몬세를 중심으로 한 가족 내부의 식탁 안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부모와 반목하는 양자인 디에고, 그리고 마찬가지로 자신의 부모와 반목하는 몬세와 호세, 이와 함께 자신들끼리도 공유하지 못하는 디에고와 몬세와 호세는 당시의 복잡한 스페인 상황, 그러니까 공산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 아나르코생디칼리즘, 파시즘과 같은 사상 그리고 팔랑헤당, 급진공화당, 자유공화우파, 카탈루냐 연맹, 공화좌파, 카탈루냐 공화좌파, 에스파냐 사회주의노동자당, 에스파냐 공산당, 카탈루냐 통합사회당, 마르크스주의 통합노동자당, 절대자유주의 운동, 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합, 바스크 민족주의자당 등으로 나뉜 사회 세력들을 넌지시 은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내 어머니는 학교 운동장으로 난 창가에 놓인 커다란 초록색 안락의자에 앉아 쉬고 있다. 찬란했던 그녀의 여름을 이야기하느라 지쳤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기쁨에 그녀는 지쳤다... 그 모든 기억에서 어머니는 앞으로도 가장 아름다운 기억만, 상처처럼 생생한 기억만 간직할 것이다. 다른 모든 기억들은(나의 탄생을 비롯해 몇 가지만 제외하고) 지워졌다. 무거운 기억의 짐은 모두 지워졌다... 그녀의 기억 속에는 이 1936년의 여름만이 남아 있다. 삶과 사랑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던 여름, 자신이 온전히 존재한다고 느꼈던, 그리고 세상과 하나가 된 것 같았던 그 여름... 눈부신 그 여름을 나는 이 글 속에 안전하게 담아두었다. 책이란 그러려고 만드는 것이 아니던가... 내 어머니의 눈부신 여름, 그리고 그의 기억 속에 두 눈을 후벼파는 칼처럼 박힌 베르나노스의 참담한 해年. 하나의 역사에 대한 두 개의 장면, 두 개의 경험, 두 개의 비전이 몇 달 전 나의 밤과 낮들에 들어왔고, 서서히 우러나고 있다.” (pp.284~285)


소설은 역사 속의 개인이었던 베르나노스, 개인들의 집합으로서의 역사인 스페인 내전을, 몬세라는 인물을 통해 고스란히 재현해내고 있다. 형식적으로도 소설은, 실제하는 책의 저자와 소설 속의 인물을 병치시키고, 후일담의 대상이 되는 과거와 그 후일담을 기록하는 현재를 중첩시킴으로써 그 현장성을 극대화시킨다. 치매에 걸려 모든 기억을 잃었어도 1936년의 스페인, 그곳에서의 시간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하는 몬세를 통하여 박제화 되어 버릴 수도 있는 역사의 한 순간에 생명력을 입히는 것이야말로 이 소설이 가진 힘이다.



리디 살베르 Lydie Salvayre / 백선희 역 / 울지 않기 (Pas Pleurer) / 293쪽 / 뮤진트리 / 2015 (2014)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마커스 주삭 《내 첫번째 여자친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