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가운데서도 유머러스를 잃지 않는 21세기식 20세기 퀼트 연대기.
파트리크 오우르제드니크, 라는 이름만큼이나 유니크 한 이 체코 작가의 작품 《유로피아나》를 소설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것은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친 일종의 연대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연대기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조잡한 사실들까지를 마구잡이로 섞어 놓고 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일종의 자유 연상과 자유 기술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 뜯어서 쓰는 화장실용 휴지는 1901년 스위스의 종이 제조업체에서 발명했는데 그날은 스위스 정부가 이탈리아 왕을 암살한 것으로 의심되는 어떤 무정부주의자를 이탈리아 정부에 넘겨준 날과 같은 날이었고 신문에서는 화장실용 휴지가 소박하지만 중요한 발명품이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1914년 어떤 프랑스 여자가 브래지어를 발명했는데 신문에서는 브래지어의 발명으로 더 활동적이고 현대적인 삶을 갈구하는 여성들이 새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코르셋의 소멸은 온갖 편견에 옥죄었던 구세계의 종말을 표현하는 거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1945년 미국 사람들은 가슴이 작은 여성을 위해서 컵 안에 솜을 댄 브래지어를 발명했다. 그리고 1968년 서구의 여러 도시에서 여자들은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시위를 하다가 기자들 앞에서 남성과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시위를 하다가 기자들 앞에서 남성과 여성의 권리가 같아야 함을 보여 주려고 입고 있던 브래지어를 일부러 찢어 버렸다. 그리고 1인당 물 소비량이 하루 10리터에서 115리터로 늘었고 지하수 수위는 전세계적으로 낮아졌으며 50년이나 1백 년이 지나면 물이 고갈되기 시작할 거라는 걱정이 생겨났다...” (pp.24~25)
화장실 휴지의 탄생에서 브래지어의 탄생과 그 브래지어를 대하는 변화된 세태로, 그러다가 문득 현대인의 물소비량에 대해 걱정하는 식이다. 잡다한 물건들의 역사, 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면 그 책의 이 항목 저 항목을 건너 뛰어다니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또 그렇게 이 책을 얕잡아 보려는 찰나 아래와 같은 부분이 등장한다. 그러니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요술공처럼 랜덤으로 튀어 오르다가 어느 순간 정좌를 하고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한다.
“... 역사학자와 철학자들은 인본주의가 글쓰기 중심의 문화 사조였으며 그 때문에 사회는 문학 공동체처럼 운영될 수 있었는데 1918년 라디오의 등장과 1945년 텔레비전의 등장 이후로 그리고 1980년대와 1990년대의 테크놀로지 혁신으로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인본주의에 마지막 치명타를 날린 것은 생명 공학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괜찮다고 왜냐하면 인본주의는 인간 사상의 역사에 존재했던 거대한 속임수였으니 인본주의가 수백 년 동안 이어졌음에도 인간을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것이 틀렸고 인본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함으로써 인간을 발전시켰으며 그것은 대단한 진일보라고 했다...” (p.32)
게다가 대부분의 문장들은 걷잡을 수 없이 길어지고 있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 계속해서, 문장 안에서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는 식이다. 마치 우리의 역사란 그것이 토막 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결국은 거대한 연쇄 작용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게 파편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 또한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역사의 사슬 안에서만 존재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지적당하고 마는 것 같다.
“나중에 역사학자들은 20세기의 정권을 전체주의와 권위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세 가지 종류로 나누었다. 전체주의의 정권은 공산주의와 나치 정권이었고 권위주의 정권은 파시스트 정권과 파시스트에서 영감을 얻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와 스페인과 포르투갈과 그리스와 폴란드와 루마니아 헝가리와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등지에서 생겨난 독재 정권들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파시즘과 나치즘이 사실상 동일하다고 말했지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고 파시즘이 근본적으로 보편적이며 어디에나 이식되어 특정한 문화적 역사적 조건 안에 즉각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반면에 공산주의와 나치즘은 근본적으로 적용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그 안에서 현실이 이데올로기에 종속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pp.137~138)
그나마 분명해 보이는 것은 이 작가가 전쟁을 싫어하고, 공산주의와 나치를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1957년 사회주의 시절의 체코에서 태어났고 1984년 프랑스로 이주하였다.) 작가는 아주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지만 특히 제1차 세계 대전을 그리고 나치 정권과 제2차 세계 대전 그리고 공산주의 정권을 자주 다루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나라를 두루 섭렵한 유럽인으로서의 트라우마가 작용한 탓일지도 모른다.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와 영국에는 평화주의자가 많아지고 여론도 평화를 사랑한다는 쪽이 대세였던 반면에 독일인들은 제복을 맞추고 탱크와 비행기를 제작했다. 그리고 스페인에서는 내전이 발발해서 파시스트들은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고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무정부주의자들과 싸웠는데 무정부주의자들은 혁명이 영원하기를 원했고 파시스트들은 혁명이 민족적이기를 원했다. 그리고 평화주의자들은 평화야말로 최고의 가치라고 말했지만 나치는 승리야말로 최고의 가치이며 인간의 운명에 존엄성을 가져다주는 것은 선과 악의 투쟁이라고 생각했고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의 승리를 앞당겨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며 스페인에서는 내전이 발발했고 독일인들은 폴란드와 덴마크와 노르웨이와 네델란드와 벨기에와 프랑스를 침공했고 러시아인들은 폴란드와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와 핀란드와 루마니아를 침공했고 그렇게 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명백해지기 시작했다.” (pp.145~146)
소설을 읽고 있으면 텍스트로 가득한 퀼트 작품을 보는 것도 같다. 그리고 19세기와 20세기의 유럽 이 곳 저 곳에 대한, 그곳에서 벌어진 이런저런 사건들에 대한, 그 사건들과 관련된 이런 저런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각각의 조각보에 새겨져 있다. 각각의 조각보가 얼마나 조화롭게 그리고 정교하게 짜깁기 되어 있느냐에 따라 예술이 되기도 하는 퀼트처럼 이 소설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진일보 하고자 한다. 게다가 이 퀼트는 어두운 와중에도 곳곳에서 유머러스하다.
파트리크 오우르제드니크 Patrik Ourednik / 정보라 역 / 유로피아나 (Europeana) : 짧게 쓴 20세기 이야기 / 열린책들 / 171쪽 / 2015 (2001)